내 생애의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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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 속의 송어

가브리엘 루아의 중편 소설. 깐깐하기로 소문난 김화영 선생님이 번역하셨음. 선생님은 지금 은퇴 후 명예교수로 계신다는데, 좋은 번역을 지속적으로 내 주시니 감사할 뿐.

이 소설은 가브리엘 루아의 교사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라고. 18살, 처음 시골 마을에 부임한 여교사, 그리고 천방지축, 야생마처럼 날뛰는 늦깎이 남학생. 우짜든동 잘 가르쳐보겠다는 의지에 불타는 초짜 교사와 자연의 부름에 민감한 감수성을 가진 14살 소년. 소년과 청년의 문턱에 이른 소년이 자신의 선생님을 흠모하게 되는 스토리.

메데릭보다 그의 그림자가 먼저 교실의 문턱에 이르렀고, 그 다음에 메데릭 자신이 여러 날, 또 여러 날 동안 자신의 갈 길을 찾아 헤맨 저 골똘한 눈빛을 가진 길쭉하고 젊은 애어른의 모습으로 문틀 속에 들어섰다. 내 눈에 그는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하는 수 없이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인상이었다. 그의 입의 윤곽, 두터워진 입술-아랫입술 위의 그 그림자는 어디로 갔는가?-은 그의 용모를 완전히 바꾸어놓고 있었다. 얼굴 아래쪽은 이제 어딘가 로드리그와 닮은 점이 뚜렷했다. 그러나 부드럽고 쓸쓸하고 아득한 몽상 속에 잠긴 듯한 두 눈은 어쩌면 그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을 순진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아직까지 어른과 아이가 서로를 제압하려고 할 정도로 그렇게 맞물려있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아무래도 함께 보조를 맞추고 갈 것 같지 않은 그 둘에 대해서 똑같이 마음 아파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p254.


두 눈을 꼭 감고 힘들게 숨을 쉬고 있는 메데릭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신음 소리라도 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제 곧 태어나려고 하는 성인의 무자비한 압력에 밀려 죽어가는 한 어린아이를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기어코 달려가서 메데릭의 삶의 그 위협받는 몫을 구원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p258.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시기, 10대들이 겪는 변화를 유려한 문체로 잘 그려냈다. 책을 덮고 나서 이 짧은 소설이 내게 이토록 매혹적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건 아마도 캐나다의 대자연 속에서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보낸 작가, 자신의 일부인 그 풍경을 이 소설 속에서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무지 어떻게 해도 길들여지지 않는 이 아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적대감과 선생님의 관심과 애정이 대비를 이룬다. 마치 학교라는 인위적이고 제도화된 공간과 창밖의 대자연의 풍경이 그러하듯이.

‘찬물 속의 송어’라는 제목도 참 마음에 든다. 메데릭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원시적인 숲, 송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 머무르는 그곳으로 선생님을 초대한다. 어떻게 송어가 이렇게 차가운 물 속에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손으로 잡아도 버둥대지 않는지, 소설은 그 의문에 대한 과학적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경이로운 자연 현상에 대한 감격과 환희를 공유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나는 이 부분이 참 좋았다. 송어를 가져다 구워먹자는 선생님의 장난기어린 제안에 당황하여 이렇게 가만히 자신을 ‘믿고 있는’ 생명체를 어떻게 먹을 수 있냐고 더듬거리며 되묻는 이 소년.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나는 무릎 위에 얹어놓은 꽃다발에 눈길을 던졌다. 보드라운 풀줄기가 리본처럼 주위를 둘러묶고 있어서 아직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내 뺨에 가져다 댔다. 섬세한 향기가 배어들었다.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벌써 죽어가기 시작하는 젊고 연약한 여름을 말해주고 있었다. p270-271.


‘태어나자마자 벌써 죽어가기 시작하는 젊고 연약한 여름’이라...소녀에서 여자로 변해가던 시기의 혼란과 두려움, 설레임이 떠올랐다. 아마도 이 시기는 생애에서 찰나처럼 짧지만 가장 강렬한 순간이 아닐까. 줄거리는 어찌 보면 뻔한 내용일 수 있다. 나는 책을 덮고 하루 종일 미묘한 감흥을 겪었다. 그 기분을 놓치기가 싫어 『내 생애의 아이들』에 실린 다른 단편들을 읽지 않고 잠시 보류해 두었다. 책을 읽고 나면, 러시아 민속 음악을 들을 때처럼 황량하고도 고독한 감정을 비롯하여 복잡한 울림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프랑스어로 쓰여진 글이지만, 캐나다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글이라서 그런지 여느 프랑스 소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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