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싸면서 즐겁게 읽었다. 앞날개 작가 소개 글에서 잠깐 웃고 시작했다. ‘대학에서 생물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그녀는 졸업 후 14년 동안 부동산업에 종사했다. 작가에 대한 꿈을 다시 살려 로맨스를 쓰기 시작했는데, 의도와 다르게 스릴러로 이야기가 발전하는 걸 보고 자신의 진짜 재능을 깨닫는다.’ 의도와 다르게 스릴러로 발전하는 이야기, 하하. <당남죽>도 과연 로맨스 없지 않은 스릴러다. (로맨스 싫어하는 독자로서도) 재밌게 읽었고 다시금 깨닫기를, 호모사피엔스에게는 동지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애인보다 동지.




기차용으로 고른 게 <익명 소설>이다. 원제가 ‘원고 검토부’ 정도 되는 모양이다. ‘소설 속 연쇄 살인이 현실이 되었다!’고 표지가 말하는 바, 재밌을 것 같잖아. 출판 희망 원고를 검토하는 얘기라니 솔깃하잖아. 얇고 가볍기도 해, 까지가 휴가 전 감상이다. 휴가 후 (즉 지금) 쓰는 후기는 간단하다. 미안하지만 난 재미없었어. 오랜만에 느끼는 프랑스식 유치함이랄까. 매력적인 캐릭터나 인상적인 장면 하나 없이 작위적이고 시시했다. 살인과 강간이라는 심각하고 우울한 사건을 깔고 있음에도 핍진성이 떨어져 감흥도 없었어. 한편, 돌아오는 KTX는 비 때문에 서행했다. 2시간 거리를 3시간 반에 왔다. 사고 나지 않은 게 어디냐며 안도했다. 




사거나 대여해둔 전자책이 많아서 휴가지에서 책 고프지는 않았다. 크레마마 님을 깜빡 잊어, 수중에 없었던 사실이 약간 아쉬웠을 뿐. 휴대폰으로 보기에 만만한 것으로 <살인의 방>을 골랐다.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3권이다. 아홉 편이 실렸다. 표제작(다니자키 준이치로)보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듯한 <어떤 항의서>(기쿠치 간)를 기록해두고 싶다.


법무장관에게 쓴 항의 편지가 내용이다. 편지 작성자의 누나 부부가 5년 전 살해당했고 모친은 그 충격으로 일찍 사망했다. 가해자는 누나 부부 포함 9명을 살해한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작성자는 온갖 마음고생 후 겨우 안도하고 살다가 사형수 사후 출간된 그자의 저서 때문에 복장이 터질 판이다. 범죄자가 두려움에 떨다가 사형장에 짐승처럼 끌려갔으리라는 자기 짐작과 달리, 기독교에 귀의하여 ‘흔연한’(353/477) 죽음을 맞았단다. 흔연하다, ‘기쁘거나 반가워 기분이 좋다’는 뜻이다. 흉악범에게 사형이 처벌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 부당하고 억울해 이를 어찌할꼬. 사형제나 감옥 선교 관행에 질문을 던지는 셈이기도 하다. 영화 <밀양>이 떠올랐고 마침 내가 <어떤 항의서>를 읽은 곳도 밀양이었다.


승호 씨 집과 밭과 풀!과 와이파이가 있는 전원이다. 예정보다 더 오래 머물러 3주를 채웠다. 쨍한 해와 세찬 비를 번갈아 보았다. 가끔 한가로이 풀 뜯, 아니 뽑았다. (게으른) 소처럼 일 (잘)했다고 여물도 꼬박꼬박 거하게 잘 받아먹었다. 2주째 어느 날 서울 ㅇㅇ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 이게 그 유명한 스미싱이로구나, 잔뜩 경계하며 통화를 했다. 서울 ㅇㅇ빌라에 사는 사람 맞는가. 그렇다.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왜 묻는가. 신고가 들어왔다, 지금 집 앞이다. 나는 지금 집에 없다. 신변에 문제는 없는가. 지방에 내려와 있고 문제없다. 지방 어딘지 말해줄 수 있나. 밀양이다. 이름과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나. 그걸 왜 말해야 하나. 신고가 들어왔다니까, 앞집 주민이 불렀다, 집 앞에 우편물은 쌓이는데 며칠째 그대로라고, 요즘 흉흉한 일들이 많아서 확실하게 해 두려고 그런다. (현관문 딸 기세) 아이고, 그렇구나, 수고하신다, 고맙다, 아무개이고 모년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지금 휴가차 시골에 내려와 있고 무탈하며 내가 책을 좀 주문한 게 집 앞에 쌓이고 있는 모양이다, 이상 없다, 거듭 고맙다... (왜 부끄러웠는지?)





풀 뜯, 아니 뽑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면 집 문 따일 뻔했다. 나는 좋은 이웃을 둔 건가. (본인은 오지랖이라고 하셨다) 눈떠보니 후진국인 요즘,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위 소포 중 일부 내용 인증한다. ebs 티셔츠 꽤 큼직하고 프린키피아 문진은 목직하니 귀엽다. 돌아왔고 살아 있고, 창문 너머 들리건대 매미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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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7-24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택배함이 필요한듯 하네요
그 와중에 죄다 알라딘 ^^

에르고숨 2023-07-24 22:38   좋아요 1 | URL
이웃의 관심이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운 듯도 하고; 어쨌든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연락 받고는 앞집 눈치 보여서 알라딘 주문을 더 못 넣었다는 비밀이 있습니다...ㅎㅎ
 
드립백 코스타리카 라 알퀴미아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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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 감기는 이것이 뭔가 했더니... 벌꿀맛이었구만요+부드럽고 상큼 깔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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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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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되기 싫은 사람들과, 엄마이자 딸을 몰랐던 사람이 쌓아온 합리 혹은 오산. 추리소설의 탈을 쓴 심리소설, 고발소설이랄까. 애증과 오해의 모녀 관계 및 모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절묘하게 담음. 리타가 마지막으로 한 일이 계속 마음에 남아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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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프, 바이 더 시 - 조이스 캐럴 오츠의 4가지 고딕 서스펜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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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곁의 여성 삶의 단편들. 뭘 좋아할지 혹은 뭐에 빡칠지 몰라서 다 준비해봤다는 듯, 의구스럽거나 통쾌하거나 답답하거나 위험스러운 이야기가 골고루 들었음. 빡침 포함 개취는 통쾌(먀오 다오) 쪽. 이것도 없었다면 오츠 선생 끊을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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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신는 법 몰라서 사 보는 사람 없겠지. 귀엽기로 작정한 책에는 헤죽, 무장해제하는 수밖에 없다. 색색깔 양말 그림들이 어찌나 예쁜지, 기분도 예뻐진 것 같다(응?). <연필 깎기의 정석> 류 있잖은가, 혼자 심각하게 진지할 덕후의 쿵짝에 기꺼이 동참해줄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필요하겠다. 전문적인 엉뚱함, 다른 말로 덕력이 <연필 정석>에까지는 못 미친다만. 흑백 내지였던 <연필 정석>에서는 현저히 부족했던 색깔 보는 재미가 <양말 법>에는 있다. 양말의 초짧은 역사, 양말 해부학, 양말 신는 법(하하), 양말의 종류 및 소재, 관리, 수선, 개는 법, 신는 대신 양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 등이 짤막짤막하게 적혔다. 꽤 괜찮은 양말 한 켤레 가격으로 값을 내린 <양말 신는 법>이다. 읽는다기보다는 보는 책 되겠다.


이대로 끝맺으면 아쉬우니 제목 취지에 맞게 양말 신는 법을 제대로 알려드리겠다. 제1단계. ‘손에 양말 한 짝을 꼭 쥔다. 면밀하게 살펴본다. 당신은 이 양말을 신을 것이다. 그리고 양말을 신은 당신은 아주 멋져 보일 것이다.’(20) 제2단계가 정말 중요하다. 밑줄 쳤다. 결정적인 내용 유출 주의경보를 울리는 바,


삐삐삐3

2.

1.

두둥.



발을 준비한다. (20)




미안, 오발령. 뽀송뽀송하고 포근포근하고 만만하고 흔하고. 불가피하지 않은 한 매일 갈아 신으며 비교적 민주적인 의류 아이템. 새 양말 혹은 빤 양말처럼 기분 좋은 게 있을까. 있지. 많지. 양말 그림도 그렇지. 눈요기 잘 했다. 하지만 뭐랄까, 덕력이 부족해, 덕력이... 할 때는 뭐가 있다?




아무튼 시리즈가 있다. 덕력과 글력(?) 보장하는 시리즈로 알고 있다. 양말을 빌미로 구달 선생을 만났다. 저자도 밝히는 바, ‘아무래도 이 책은 양말 이야기를 빙자해 인생사의 희로애락을 털어놓는 대나무 숲이 될 것 같다’(12)고 한다. 아무튼 시리즈 독자가 기대하는 바도 그러하다. 프리랜서 글쟁이로서의 힘든 일상과 양말 사랑하는 얘기를 들었다. 부디 글 많이 팔아 예쁜 양말 쇼핑하는 데 지장이 없길 바란다. 저자의 양말 컬렉션이 초반에 88켤레이다가 후반부에 110켤레(수드라 양말 82+브라만 양말 28)까지 늘어난 걸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후훗.


살까 말까 망설이고, 사고 나서 후회하거나 사지 않아서 후회, 사고 나서 만족하거나 사지 않아서 만족하는 등의 장면이 익숙하면서, 그게 나는 왜 좋지. 책 또 샀다고 징징대는 글들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양말 구매 고민 글도 재미있어. 곰곰 생각해보니 수집하는 물건이 양말이면 퍽 괜찮을 것 같다. 부피 크지 않고, 매우 다양하고, 비교적 값싸고, 신을 수 있고, 나눠 줄 수 있고, 더구나 글쟁이 구달 선생은 이런 발랄한 양말 책도 써냈고. 뭐니 뭐니 해도 양말은 책보다 훨씬… 아니지. 나는 책 수집하고 있지 않아!(다짐체) 집에 읽을 책이 많을 뿐. 양말로 돌아오자면,


(더럽지 않습니다. 갓 빨아 냄새 좋은 겁니다)


양말 서랍에 회색 양말만 줄줄이 꽂혀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려다가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매일 회색 양말만 신었다가는 글마저 칙칙한 회색 톤으로 써버릴 게 분명하다. (31)


미안하다, 나다. 구달 선생이 보면 진저리를 칠 내 양말 서랍이로구나. 회색과 검은색이 주를 이루고 가끔 알록달록한 것은, 어디 보자… 알라딘 양말이다. 옛날에는 내 서랍도 이렇지 않았다. 음(할많하않체). 꾸준히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기호품이 (책을 제외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위 사람들 고민을 덜어주기도 한다. (책 선물은 무례하기가 쉽다) 일본 여행에서 저자 친구가 눈치 빠르게 사서 건네주고, 저자 모친이 딸을 위해서는 당연히 양말 코너를 둘러보게 되고. 그렇지 않은가. 나 역시 참 편한 사람이라고, 문준이 말한 적 있다. 한 손엔 커피콩, 다른 손엔 포도주를 든 문준이라고, 있다. 양손에 각각 각성제와 진정제를 가진 방문자 tmi. 아무튼, 양말의 구달 선생이 성토하는 회색 양말 소유자가 당신들의 양말을, 취향과 지향과 기호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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