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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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끊어질 것만 같은 신경. 사무치게 절망적인 질투의 감정. 읽어내기가 무척 힘들고 피가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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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이 대산세계문학총서 75
사무엘 베케트 지음, 김경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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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두었던, 은 거짓말이다. 다른 만만한 술들을 먼저 꺼내 마시다보니 마지막, 다시 말해 오늘까지 손대지 않은 병으로 남아 있던 포도주를 땄다. 크리스마스라기에, 그리고 마침 아주 조금은, 나 외로운가? 아니, 외로워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자책 아닌 자책이 들어, 부제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든 책을 들었다가 조금 전에 집어던진 참이다. 제목에 속으면 안 된다. 형식에도, 인터넷 사전을 띄워놓고 단어를 확인해가며 읽게 하는 현란함에도, 단정함에도, 책 만듦새에도, 필자의 이름에도.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약간의 위무를 찾고 있었지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틀 전에 읽은 놀라운 책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기에, 좀처럼 하지 않는, 그것은 내가 반추동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으른 습성에 따른 것이기도 한데, 되새김질을 해서라도 자위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적잖은 걱정거리를 던져주는 일임을 모르지 않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볼 어떤 한 시선이 벌써부터 따갑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위무가 필요한 나는 그 책 바깥에서는 어떠한 어루만짐도 만날 수 없고 지금 나는 그런 손길이 무척 필요하므로 차라리 뚫어보고자 하는 그 시선을 견디어내고 말리라.

 

결코 이야기가 되지 않으려 하는 쓰기, 그래서 어쩌면 성공적으로 이야기 아님, 또는 아무것도 아님이 되어버린 어떤 글로부터 어떻게 감동을 받으며 아름답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수 있었는가가 의문인, 그래, 언젠가는 밝혀야 할 제목, 사뮈엘 베케트의 『몰로이』다. 아니, 질문이 틀렸다. ‘이야기 아님’에 어째서 감동받을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답다는 감탄도 불가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 거지? 감동이 일관된 ‘이야기’에서 오는 거란 말인가? 알아 볼 일, 그러므로 리뷰에 소설의 줄거리가 들어갈 필요가 하등 없음주의자!인 나의 게으른 성격에 참으로 맞춤한 작품이건만, 간혹 일탈하고 싶어 하는 기질이 하필 지금 발현하여, 굳이 줄거리를 여기에 한 줄로 말하겠으니, 소설에서 이야기를 원하는 영혼들에게 이건 엄청난 스포일러가 될 터이다, 아무렴. 몰로이는 모친의 집을 찾아가는 중이고 모랑은 그런 몰로이를 찾으러 다니는 이야기다. 끝.


하지만 나도 인간이라,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전진은 이러한 일의 정황으로 영향을 받아, 내가 지금까지 그것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든지 간에, 그때까지 항상 그랬었듯이, 느리고 고통스러운 데서 이제는,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정지의 끝도 없고, 십자가형의 희망도 없고, 내 진정으로 말하건대, 시몬도 없는, 진짜 갈보리의 고난으로 변했고, 난 빈번하게 멈춰야만 했다. 그렇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나는 점점 더 자주 멈춰야 했고, 멈추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114쪽)


낯선 숲길을 한참이나 헤매는, 꿈인지 왜곡된 기억인지 심각한 농담인지 저자의 입꼬리가 슬며시 은밀하게 올라가는 장난인지, 내뱉는 말은 통하지 않고 귀도 어두우며 다리까지 굳어 몹시도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발걸음, 급기야는 배를 땅에 대고 기어, 기어서 나아가는 악몽 같은 여정에 오로지,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줄기차게 혼자 말하는 문장들만이 명료하다. 꿈같은 공간, 종잡을 수 없는 시간, 끊임없이 이어지는 중얼거림. 배경 없는 인물 사진에서 인화된 인물만이 부담스럽게 두드러지며 관람자를 쳐다보듯, 사유들이 수정 같은 문장들로 성큼 와서 뜻밖의, 맙소사, 위로를 선사한다.


나는 주머니에서 야채 칼을 꺼내 손목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통증이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난 먼저 소리를 질렀고, 그러고 나서 멈추고 칼을 닫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는데, 내심 다른 결말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거다. 본래로 돌아간다는 것은 나를 항상 슬프게 했지만, 삶이란 본래로 돌아감의 연속인 것 같고, 죽음 또한 일종의 본래로 돌아가는 것임이 분명한 듯하다, 그렇다고 한들 내겐 놀랍지 않다. 바람이 그쳤다고 내가 말했던가? 가랑비가 내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바람에 관한 모든 생각을 제외시킨다. (90-91쪽)


몰로이가 길을 나선 게 맞나? 어디로 가던 중이었지? 모친의 침대에서 글을 쓰고 있노라고 시작한 이 불구의 노인네, 사기꾼, 거짓말쟁이, 간절하게 원하나 허망하게 도달하지 않는 오르가슴의 좌절 같은 여정을 써 놓고 툭,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리는 배신자. 그렇다면 모랑은? 아, 투덜이 모랑, 몰로이를 찾는 임무를 맡은 모랑은 몰로이를 찾아내어서(찾아낸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또 다른 배신자이며 시간이, 그런 게 있다면, 흐를수록 몰로이와 똑같아지는, ‘맹렬히 붕괴해가는’ 섬뜩한 거울 이미지다. 언어를 믿지 않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이야기, ‘부재로의 귀환.’ 말을 하면 할수록 저만치 달아나는 핵심, 혹은 에두를 수밖에 없는, 결코 1:1 대응으로 나서주지 않는 글, 속절없는 무능력 또는 불가능성이 몰로이 혹은 모랑의 절뚝거리며 에두르는 헛걸음이 상징하는 것인가. 상징이라니, 베게트가 들으면 펄쩍 뛰실 일. 무의미, 부재를 추구하는 작품에서 숨겨진 의미 따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부조리’ 정도에서 머물러야지. 부조리극의 대명사, 땅 밑에서 곧 올라와 사방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작가에 의해 몇 년 뒤 ‘심심풀이’ 삼아 쓰일, 고도Godot의 움. 몰로이와 모랑, 행인 A와 B, 혹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라고 불러도 될 베케트 적 연속성.


왜냐하면 내 안엔 항상 여러 어릿광대 중 두 놈이 있는데, 한 놈은 자신이 있는 곳에 그대로 남기만을 주장하고, 다른 한 놈은 좀 더 멀리 가면 덜 나쁠 거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나는 무엇을 하든 간에, 이 분야에서는 항상 만족했다. 그리고 난 불쌍한 그 친구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이해시키려고 번갈아 양보했다. (71-72쪽)


자, 네모반듯하게, ‘까맣게 종이를 채웠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 늘 배신하는 글과 말을 보란 듯이 꺼내, 오늘은 날이 좋구나, 볕에 척 널어 말리듯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발을 질질 끌며 하염없이 흔적만 남기는 에두름, 어디로 가기를 원했더라? 나에게? 그 사람에게? 맞다, 그랬었지, 내 마음 어루만지러. 저 잘생긴 아일랜드 작가가 언어의 장식성을 배제하기 위해 프랑스어로 쓴 글, 한국어 번역으로 읽는 내게까지 전해지는 아득한 감동, ‘반(反)전통’, ‘반(反)내러티브’라는 전위성과 시대성을 뛰어넘어, 아니 그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어슴푸레한 저녁에 위로하는 빛처럼, 마음을 열고 무장해제한 채 보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 그래, 문학의 힘, 2013년 12월 25일에 내가 포도주를 따기까지, 『몰로이』에 다가가기 위해 혹은 멀어지기 위해, 아니 차라리 『몰로이』를 구실로, 흔적을 남기기까지 조용히 기다려온 듬직한 예술. 아껴두었던, 은 거짓말이 아니다. 오늘을 위해 기꺼이 남겨 두었던 포도주를 땄었다. 내 다정한 친구, 내 갑옷.


Merci, Samuel Barclay Beckett. (1906~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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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지다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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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아름다운 글발이 품고 있는 보수성. 그 어긋남이 힘겨워서 못다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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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 지음, 김경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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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적 소설의 ‘해체’라는 전복성만을 강조하기에는 너무 아름답다. 눈부시게 찬란하고 쓸모없이! 아름답다. 에움길을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에 서는 헛걸음에도 신세계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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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된 책 리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바보 같은 짓일지도. 하필 그런 바보를 기꺼이 자처하고자한다. 걸핏하면 내가 저지르는 불모의 헛걸음, 우울한 헛짓에 그보다 더 어울릴 것은 없기에. 아래 쓰일 내용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과, 내게 불쑥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영어 단어 하나에 관한 것이다.

 

정원 얘기부터 해보자. 프랑스와 영국의 다른 점은 저 유명한 정원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프랑스 문학, 문화 등의 수업시간에 슬라이드 사진으로 곧잘 비교해 보여주는 프랑스식 정원과 영국식 정원이 그것이다.

 

 

                 (프랑스식 정원)

 

 

                  (영국식 정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대칭, 웅장한 규모, 빈틈없이 인공적인 (살짝 토할 것 같은) 프랑스식 정원에서 프랑스 고전주의의 엄격함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에 반해 훨씬 자연스럽고 자유분방한 영국식 정원은 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자연에의 인위적이고 절대적인 개입은 저절로 ‘통제’라는 의미와도 연결된다. 이런 기조는 언어정책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하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40인!의 석학으로 구성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권위 : 영국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찬 과정에의 민중참여 도식을 보면 과연 그렇다.


OED 즉,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찬의 민주적인 면모는 자원봉사활동에 있다. ‘영어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자 한 야심, 즉 ‘모든 어휘와 뉘앙스, 미미한 차이를 보이는 모든 뜻과 철자, 발음, 어원의 변화 전부와 모든 영어 저술가들의 글에서 따온 최대한 생생한 인용문 전부를 담는 사전’을 만들기 위해, 일반인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프랑스 식의 중앙집권적이고 절대적인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비약을 하자면, ‘성당’이 아니라 ‘시장’*을 추구했다고 할까. 밀폐된 먹물들의 세계인 성당이 아니라, 시장 ‘어중이떠중이’의 잠재력을 처음부터 믿고 들어간 OED의 출발점이 내게는 무척 감격스러웠다. 물론 이런 방침 덕분에 ‘교수와 광인’이 서로 만날 수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시의성이 있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훌륭한 책에서는 늘 어느 정도 지금 여기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시의성에 고개 끄덕여지는 면이 있다. 심지어 이 영어 사전 편찬 이야기책에서도 보인다. 바로 이런 멋진 문장. ‘사전 편찬자는 역사가이지 비평가가 아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 문제에 곧장 대입해 볼 수 있는 이런 관점이 한 세기도 넘게 떨어진 과거에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음을 어찌 해야 하나. 아닌 게 아니라 OED 이전의 사전 편찬 과정에 가치 평가적인 기준이 적용되었음을 꼬집는 지점이다.


장래에 사전을 만들 사람이라면, 사전이 단순히 ‘언어의 목록’이라는 점을 깨닫는 게 기본 신조라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즉 사전은 언어 사용법 안내 책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좋은 어휘, 나쁜 어휘를 가름해서 사전에 실을 어휘를 선택하는 일은 사전 편집자가 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새뮤얼 존슨을 포함해서 앞서 사전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자의로 어휘를 선택해서 싣는 잘못을 저질렀다. (『교수와 광인』, 131쪽)


사전은 단순히 언어의 목록, 역사는 단순히 일어난 일의 목록. 그게 어려운가? 어휘나 역사는 자의로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는 기초적인 내용임에도 지금 이 시대에 읽노라니 아주 혁명적으로 여겨져 옥스퍼드 사전이 더욱 높아 보이는 것 같다. 정권에 따라 역사(어휘) 기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망상 또는 독재다. 사실만 기록하면 역사(어휘)는 실상 정치와 관계없는 것이어야 한다.


문헌들을 뒤지며 단어의 쓰임새를 살펴보는 일은 솔직히, 내가 참 좋아할 작업이라 부러운 시선으로 닥터 마이너의 꼼꼼한 손길을 살펴보았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니 책에서 각 어휘의 인용문을 찾아 손으로 기록하는 일을 상상해보면 가히 보통 성격으로는 힘들었을 게 틀림없다. 빈틈없는 마이너의 작업과정을 그에 못지않게 꼼꼼히 들려주는 저자. 그 솜씨를 해치지 않기 위해 조금 긴 문장을 그대로 옮긴다.


마이너가 ‘buffoon’이라는 단어와 마주친 순간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우선 뒤 보스크의 책 34쪽에 나오는 문장을 보고 이 단어가 적절하게 쓰인 예가 된다고 느꼈다. 즉시 단어를 소책자에 알아보기 쉬운 작은 글씨로 깔끔하게 썼다. 흠잡을 데 없는 글씨였다. 그는 이렇게 첫 단에 단어를 쓰고, 3분의 1쯤 내려간 곳에 단어와 쪽 수를 적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안성맞춤한 위치였다. 신중하게 선택한 자리였다. 그렇게 위에 빈 공간을 마련해두는 것은 조만간 관심을 끄는 b로 시작하는 단어가 나오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buffoon 전에 넣을 단어가 나타날 확률은 아주 많았고, 그 다음에 들어가야 하는 단어가 나올 확률은 그보다 훨씬 적었다. buffoon의 두 번째 철자는 u이므로 그 뒤에 넣을 단어가 올 가능성은 딱 세 가지였다. 두 번째 철자가 다시 u인 단어가 오거나, w로 시작되는 경우, 즉 bwana(주인님, 나리)라는 뜻의 스와힐리어나, y인 단어가 올 경우 세 가지였다.

몇 페이지 뒤에 ‘balk(방해하다, 말이 갑자기 서다)’라는 흥미로운 어휘가 멋진 인용 구문과 함께 나왔다. 어휘 목록표에 넣을 만한 가치가 충분한 어휘였다. 그는buffoon 위에 balk를 적어넣었지만 두 단어의 사이를 충분히 두었다. 두 번째 철자가 balk의 a와 buffoon의 u 사이에 들어갈 단어가 나올 경우에 대비해서였다. 다섯 페이지 뒤에서 ‘blab(주책없이 지껄이다)’라는 단어를 발견하자 이런 종류의 단어가 나오기를 고대했던 마이너는 흐뭇해하면서 balk 아래, buffoon 보다는 한참 위의 빈자리에 써넣었다. (『교수와 광인』, 170-171쪽)


이렇게 사전 편찬에 맞춤한 것 같은 성격 소유자 마이너는 ‘미친’ 사람이었다. 요즘 용어로는 정신분열증 환자. 망상에 시달리던 마이너의 모습은 안쓰럽고 처참할 정도였다. 현대의학으로는 알약 몇 개로 증상을 완화할 수 있겠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편집증적 환자는 병리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했고, 곧장 사회에서 격리 수용되는 ‘도덕 치료’가 다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이너가 미국 군의관 출신이었으므로 연금이 충분하여 비록 수용소 안이라지만 방 두 개를 호화롭게 쓸 수 있었다. 걱정 없이 책을 주문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 정신분열증 환자가 수용소에 가게 된 연유는 살인.


저자의 가장 멋진 면모가 드러나는 지점인데, 훌륭한 이 책을 다른 누구도 아닌 문제의 살인사건 피해자에게 바쳤다는 사실이다. 광기와 위대한 업적이라는 섹시한 기삿거리에서 죄 없이, 소리 없이 저물어간 사람을 기억하게 해 주는 따뜻한 마음이다. 헌사가 이렇다.


1872년 2월 토요일 밤, 총탄에 맞아 차갑고 축축한 람베스의 길바닥에서 쓰러진 불쌍한 영혼 조지 메리트를 추모하며


이쯤 되면 책 제목의 두 인물 중 ‘교수’도 나올법한데, 그저 딱 한 마디만 하겠다. 천재. (헛발질 페이퍼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


헌사에 이어 이 책의 또 다른 멋은 각 장의 시작에 표제어 하나씩 사전 항목 그대로 삽입해 놓은 점. ‘에필로그’에 달린 단어는 memorial (1.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는 것 / 3. 기념비적인 것으로서 사람, 사물, 사건의 기억을 보존하는 것) 이고 그 편에 피해자인 조지 메리트의 이야기가 담겼다. ‘작가의 말’은 coda ((음악)정확하고 만족스러운 결말을 형성하기 위해서 악장의 주요 부문이 완결된 후에 도입하는 독립적인 부분) 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과 저자 자신의 아름다운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마지막 단어, 고루해 보이고 괜히 어렵게 생긴 acknowledgment에 마음이 쿵-하고 말았는데  ‘감사의 말’에 붙어 있다. 


1. 인정, 고백, 시인하는 행위 ; 고백, 공언

5. 선물이나 호혜 혹은 전갈을 받았음을 인정 ; 감사하며, 예절 바르게 혹은 분명하게 인정함

6. 받았음을 인정하는 적절한 신호 ; 호의나 전갈에 대한 보답으로 주거나 행하는 것, 혹은 그것을 받았다는 것을 알리는 격식 갖춘 통지.


며칠 전 내 인생 최고의 아름다운 ‘애크널리지먼트’를 받고 쩔쩔매던 중 마침 이 단어를 만났으니. 감정도 감상도 와서 잠시 머물다 연기처럼 사라지곤 하는 ‘술과 장미의 나날’**, 복잡하고 떨리는 감정을 농축해놓은 단 하나의 단어를 마주친 일은 벅찬 감동이었다. 가슴 한 구석이 쿡쿡 아려오는 증상을 단어 하나가 와서 ‘이거야.’ 하고 간다. 적확한! 단어가 주는 위무는 놀라웠다. 이 헛발질 페이퍼는 내가 경험한 가장 멋진 애크널리지먼트를 써 준 이를 생각하는 방식인데, 이것으로 내 몫의 애크널리지먼트가 그 사람에게 가 닿는다면 이 시간이 불모만은 아닌, 포근하고 촉촉하며 비로소 조금 미소 지어도 될 하나의 겨울밤이 될 것이다.


품절된 『교수와 광인』저자는 사이먼 윈체스터, 이런 책들도 썼다. 품에 안을 수밖에 없겠다.

 

 


 

 

 

 

 

 

 

*<성당과 시장>, 에릭 레이먼드의 논문

**영화 제목이자, 술에 관한 어떤 책의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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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2-21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지금 두 분이 서로 acknowledgment를 주고 받으며 애정을 속삭이시는 겁니까, 지금? 네? 그런겁니까?

에르고숨 2013-12-21 13:50   좋아요 0 | URL
엇, 다락방 님 오셨다. 사실은 제가... 일방적으로 고백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가슴 아픈 짝사랑이에요ㅠㅠ.

다락방 2013-12-21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

에르고숨 2013-12-22 15:41   좋아요 0 | URL
의 나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