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
마리 드루베 지음, 임영신 옮김 / 윌컴퍼니(윌스타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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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올 즈음 자신은 이 세상에 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저자의 마지막 글이라 처음부터 울컥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는, 원제 <살아야 할 6개월>이다. 대대적으로 광고가 되어 소개 글만 보아도 내용이 훤하나 슬픔과 고통의 구구절절을 읽으면서 갖는 차분한 시간은 경건하고 소중했다.


하지만 환자는 자기 몸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치료받도록 부추기는 의사와 가족들한테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몸이 죽을 지경이 되더라도 말이다! 소중한 사람을 자기 곁에 계속 두기 위해서 사람들은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


떠나는 사람은 그럼 이기적이어도 되는가. 소중한 사람들끼리, 물론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서로의 이기심이 충돌할 때 불치병으로 무의미한 고통을 받는 당사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게 여전한 내 생각이다. 슬픔은 당연히, 남는 사람들의 몫. 그것과 함께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당사자 본인에게 주는 것이 남는 사람들의 마지막 예의이자 배려일 거라 본다. 헛된 고통을 중지시키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끝까지 괜찮은 모습으로 기억되고자 하는 바람. 오규원 선생의 <죽고 난 뒤의 팬티>가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마리 드루베의 글을 보충하는 남편 베르트랑의 문장이 군데군데 보라색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내게는 온통 눈물로 보였다. 벨기에로의 마지막 여정은 둘이 가서 혼자 돌아오는 ‘막막한 외로움’, 왜 아니겠는가. 드루베가 ‘선택’한 죽음의 기록의 뭉클함은 저 사랑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자주 나에게 와서 말을 걸어주세요. 다정히 대답할게요, 여보. 나의 영원한 사랑.”

-마리가 남편에게 쓴 마지막 편지 중에서


마리 드루베는 살았고 이제는 죽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했던 사람이다.

결국 이게↓ 답이라면,


“사랑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르네 바르자벨


그럼 나는 이미 죽은 사람, 아니면 이젠 죽지도 못할 인간인가...? 엉뚱하게,

죽기위해 사랑해야겠다, 귀찮기 짝이 없게도.


이런, 참 좋은 책인데 이상하게 삐딱선을 타고 말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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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9-10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에르고숨님, 삐딱선을 타신 게 아니라...생각의 미로가 확장된 것으로 보여요...

오규원의 저 시는 참 와닿네요. 저도 저런 생각을 수시로 하곤 하답니다.^^

에르고숨 2013-09-11 02:32   좋아요 0 | URL
흡- ‘생각의 미로가 확장’, 혹시 그 미로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언젠가부터 말이 많아지면서, 옷을 하나하나 벗어가는 느낌입니다. 부끄럽고, 부끄럽고, 부끄럽고...
견디셔 님도 그 느낌 아실 듯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