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유자적한 소설이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유유자적한 태도의 고양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쥐 같은 하찮은 건 절대 잡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쓸모없는 고양이란 주인 가족들의 눈치를 챈 후 딱 한 번 쥐를 잡아보려다 실패를 맛보긴 했지만. 그는 죽음 앞에서도 여유를 보인다. 나, 고양이 죽을 땐 죽는다. 아직 이렇게 멋진 고양이를 실제에서도 가상에서도 만나본 적이 없다.  아니 만 난 듯도 하다.

  책을 읽는 동안 이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듯도 한데 싶어서 막 책꽂이를 뒤져 봤더니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 중 6권에 '토버모리'란 단편에 말을 할 줄 아는 고양이가 나온다.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영국소설가 "사키"가 쓴 작품이라 되어 있다. 작가의 이름이 무척 낯설다. 이 고양이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뿐 아니라 말을 할 줄도 안다. '하지만 이 고양이는 스스로 인간의 언어를 깨우친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인간의 언어를 배운다. 그러나 고양이가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걸 알게 되자 사람들은 자신의 숨겨진 모습이 탄로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다 고양이 먹이에 약을 타서 죽이기로 한다. 이 고양이는 밤이건 낮이건 사람들이 거처하는 방 밖의 난간을 지나가곤 하므로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거나 은밀한 장면들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이 토버모리라는 고양이는 다른 고양이와 싸우다 죽고 만다. 이 소설도 영국 중산층의 이면을 풍자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훨씬 날카롭고 차갑다는 느낌이다.

  이와 다르게 이 작품은 분량부터가 앞의 단편과 비교도 안 되게 긴 작품이기도 하지만 훨씬 여유가 있고 웃음이 있다.  이 고양이는 이름도 없다. 비록 고양이 아무개란 이름은 없지만  이름은 귀가 닳도록 들었다. 고양이의 주인 구샤미처럼 뒤죽박죽인 문장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선언을 들은지는 20여년은 넘은 것 같다.  물론 그 선언이 있었던 건100년이 넘었긴 하지만.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 멋진 고양이를 만날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이 고양이를 만나기를 회피해왔던 듯 싶다. 좀 말하기 창피한 감이 있긴 하지만 그 고양이라는 녀석이 일본 고양이이므로. 일본 고양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일본 소설에 좀 흥미가 없어서이리라. 좁은 소견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본소설은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어떤 작품은 소설인지 작가의 경험담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인지 모를 만큼 사적인 영역이 많이 보였던 듯하다. 일본 사람들은 듣기엔 사적인 영역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는데 소설은 왜 이럴까 싶을 만큼.

  이름도 없는 고양이의 주인인 구샤미도 소세키 자신을 반영한 모습인 듯하고 이 작품을 비평한 사람의 이름도 등장하며 현실과 가상이 뒤섞여 있는 듯한 글이다. 이름도 얻어 가지지 못한 처지에 고양이는 인간보다 뛰어난 교양을 지닌양 하며 주인 구샤미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은근한 투로 풍자한다. 구샤미는 세상물정 모르는 중학교 영어선생이다. 그가 머리를 숙이는 상대는 형사라든가 순사라든가 하는 정도고 돈 많은 사람한테는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콧털을 뽑거나 거울로 곰보 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과연 지저분한 얼굴이군, 하면서 새삼스레 자신의 용모에 실망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의 서재에 언제나 사람들을 놀려먹는 재미로 사는 메이테이가 시도때도 없이 들락거린다. 메이테이는 너무나 완벽하고 그럴싸한 거짓말로 구샤미와 부인을 놀라게 하며 독자를 재미있게 해준다. 메이테이 못지 않는 인물이 간게쓰라는 인물이다. 그는 "개구리 눈알의 전동 작용에 대한 자외선의 영향"이라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인물이다. 완벽한 구형의 개구리 눈알을 만들기 위해 도쿄대학 연구실에서 열심히 유리를 갈고 있다. 게다가 그는 바이올린도 멋지게 연주할 줄 아는 잘 생긴 얼굴의 사내다. 이 세 사람은 세상과는 상관없이 그들만의 논리로 살아가는 지식인들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속세인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그들과 반대편에 있는 인물이 근처에 사는 가네다 부부이다. 세상과 한통속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로 돈 많은 사업가다.    

  완벽한 스토리의 이야기는 아니다. 줄거리를 따라가다보면 엉뚱하다 싶을 만큼 잡다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온다. 목매기의 역학이며, 가네다부인의 위대한 코에 대한 이야기며,  공중 목욕탕 관찰기, 중학생들의 놀림에 어린아이처럼 반응하는 주인의 모습, 간게쓰가 바이올린을 구입하게 되기까지의 긴긴 이야기 등등 에피소드 같은 재미난 이야기를 읽어가다보면 어느새 두꺼운 책이 끝나 있다. 100년 전의 일본인이 이렇게 유머스러웠던가...  잠깐 의아해 하다가 아참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이지, 하는 엉뚱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은근한 유머가 사람을 실실 웃게 한다. 책을 읽으면서 실없이 픽픽 웃곤 하는 이상한?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의 결투 - 일본 현대문학 대표작가 에센스 소설
다자이 오사무 지음, 노재명 옮김 / 하늘연못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덮으면서 내내 드는 생각, 쓰가루가 어디에 있지? 아모모리? 많이 익숙한 데 정확히 어디였지? 지도책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변방이라는 느낌이 든다. 일본의 역사에 중심으로 떠오른 적이 없다는 작가의 말처럼 작가 자신도 고향 쓰가루처럼 자신의 인생도 한 변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겠다. 그래서 그토록 치열하게 자살을 시도한 것인지도. 자살만이 그의 삶을 화려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작품'쓰가루'에 나오는 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기 전에 머뭇거리는 그 지점에서 그는 바다로 흘러가는 대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 느릿느릿 주저주저하며 흘러가는 그 강물을 따라 한번 흘러가보았더라면 그의 인생이 그의 소설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의 글을 통해 나를 생각하게 된다. 아직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이미 강하구를 흘러 바다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의 끊임없는 자살 시도가 젊은 시절의 충동이 혹은 무모한 허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작품 말미에 소설가 한수산이 쓴 글을 보면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애정과 경멸이라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나로서도 소설자체로서의 매력은 그다지 없다는 느낌이다. 실험적인 형식을 시도했다고 하는 '여자의 결투'나 '광대의 절규' 같은 작품들이 오히려 매끄럽게 읽히지 않았다. 작가가 그것을 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 불쑥불쑥 나타나서 작품을 설명하려고 하고 혼잣말도 하고 독자에게 말을 걸기도 하는데 그게 내게는 걸리적거리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소설은 상상의 산물아닌가. 독자는 완벽한 거짓말을 원하는 거지 작가의 머릿속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하지만 '쓰가루'는 괜찮았다. 소설로서가 아니라 40년대의 일본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동감있게 느껴져서. 작가와 함께 그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마지막 장면을 자신을 키워주었던 하녀 다케와의 만남으로 마무리 함으로서 소설다운 마무리가 가능해진 것 같았다. 감동적인 장면이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시골 마을에 내린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다케의 집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날은 운동회가 있는 날이라서 다케의 집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다. 작가는 운동회가 열리고 있는 학교를 찾아간다.운동장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아이들은 색색의 옷을 입을 차려입고 이미 술에 취한 어른들도 보이고 집에서 마련해온 음식을 먹는 사람들. 작가는 이 풍경 앞에서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움을 느낀다. 운동장 주위에는 100여 채의 천막이 쳐져 있다. 작가는 그 천막 속 어느 하나에 있을 다케를 찾아 운동장을 두 바퀴나 돈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다. 학교를 나와서 버스를 기다린다. 혹시 싶어  다케의 집으로 다시 찾아간다. 그런데 아까는 잠겨 있던 문이 열려 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열서너 살의 여자아이가 있다. 다케의 딸이다. 운동회하는 도중에 배가 아파 약을 먹으러 온 것이다. 작가는 다케의 딸의 안내를 받아 드디어 다케가 있는 천막 앞에 도착한다. 천막 속에서 다케의 모습이 보이고 두 사람은 그저 서로의 모습만 확인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두 사람은 천막 속에 말없이 앉아 운동회만 구경할 뿐이다. 작가는 그 순간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란 이렇게 편안함을 주는 존재구나, 생각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화를 체험했다고.

  분명 '쓰가루'의 마지막 장면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감동과 함께 씁쓸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작가는 국운을 걸고 聖戰을 벌이고 있는 이 때에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연회(운동회)를 즐기줄 아는 일본은 희망이 있는 나라라고 감동하고 있다. 국운을 걸고 벌이는 대전쟁...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남의 나라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그리고 그 한편에서는 눈물날 만큼 아름다운 운동회를 열고 있다. 그냥 씁쓸하다. 그의 작품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일본 작가의 작품을 읽다보면 종종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식 - 일본 현대문학 대표작가 에센스 소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노재명 옮김 / 하늘연못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아쿠타카와상 수상작이라는 문구가 실린 도서 광고에서 흔히 접하던 이름의 작가였지만 제대로 읽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요즘 읽고 있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다른 일본작가들의 작품과 비교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훨씬 뛰어난 작품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소설다운 맛이 느껴지는 구성을 취하고 있어서 좋았다. 아마도 내 개인적인 취향이 그의 작품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겠지만.

  여러 작품들에서 천재적인 작가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감성이 뛰어난 작가다. 그게 지나쳐서 불안정한 정신 세계를 보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불안한 정신세계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작품도 많았다.

  영화로 인해 널리 알려진 '라쇼몽'이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비교적 짧지만 단편소설이 전형적인 구성을 그대로 보여준달까. 도입부분의 묘사도 인상적이었고  특히 결말이 눈에 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시신의 머리카락을 뽑아가는 정도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노파의 말에 굶주린 남자는 노파가 입고 있는 옷가지들을 남김없이 벗겨가버린다. 노파의 논리에 따르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므로. '덤불속'은 헷갈리는 이야기다. 한 남자가 도둑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만 존재할 뿐 그 사건의 진실이 뭔지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다.   '고구마죽'에서는 멸시와 조롱을 받는 못생긴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고구마죽만 먹을 수 있다면 어떤 조롱도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구마죽에 대한 욕망이 너무 빨리 쉽게 채워지려하자 오히려 이렇게 욕망이 빨리 달성되어서는 안되는 거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고구마 죽에 대한 욕망 때문에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견뎌낼 수 있었으니까. '지옥변'은 전형적인 예술가소설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화가가 온갖 고통 속에 불타 죽는 딸의 모습을 보고 최고의 걸작을 완성하고 미쳐버린다는. 꽤 익숙한 이야기지만 끝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단편이었다.

  모든 단편들이 자살로 마감해버린 작가의 일생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처럼 발광하진 않을까 늘 불안했던 작가. '점귀부'를 보면 작가의 불안이 고스란히 보인다. 지나친 자의식이 작가를 죽음으로 몰고 가진 않았을까. 소설이 작가에게는 구원이었을까 혹은 불안을 더욱 부채질했을까. 좀 가벼워도 좋지 않았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십야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하늘연못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사실 그동안 일본문학은 그다지 읽어보지 못했다. 하루키류의 작품들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팔리고 있다는게 별로 기분좋은 느낌은 아니어서. 그렇다고 내가 뭐 우리나라 소설을 무지하게 사랑하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요즘 소설을 읽는 것에 많이 식상해 있던 터여서 그동안 읽어보지 못했던 쪽을 찾아읽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즘 많이 팔리는 일본소설보다는 일본문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작가들의 작품부터 읽어갈 작정을 하고 있다. 한두 권으로 끝날지 일본소설이 이런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까지 제대로 읽어낼지는 알 수 없지만.

  우선 이 책의 표제로 쓰이고 있는 '몽십야'는 지금의 시각으로 읽어도 소설적 상상력이 뛰어난 작품이었다. 10개의 짧은 이야기들이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100년전의 작품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달까. 작가의 대개의 작품들이 그랬다. 요즘 작가들이 세밀한 일상의 모습을 차분히 그려내는 글쓰기 방식이 이미 100년 전에 그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있었다. 굵은 선을 지닌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소설에서 아쉬웠던 점도 많았다. 많은 작품에서 소설인지 경험을 그대로 옮겨놓은 수필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수필류의 글보다는 상상력이 뛰어난 작품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의 작품을 통해서 그 당시의 사회상이나 작가의 개인적인 생활을 엿보고 싶은 독자라면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또 아쉬운 점은, 책 말미에 작가의 작품 경향에 대해 비평해 놓은 부분에도 나오지만,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가의 역사의식이다. 100년 전 아시아에 대한 식민지배를 시작하려는 일본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지 못했고 서양인이 동양인에 대해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듯이 그 역시 미개한 아시아인에 대한 우월의식을 글 속에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어쨌든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100년 전 우리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일본이 서양 문명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야욕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이미 우리나라는 일본수중에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던 상황들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볼일 없는 4학년 창비아동문고 152
주디 블룸 지음, 윤여숙 옮김, 오승민 그림 / 창비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별볼일 없는 4학년인 내가 동생 퍼지가 일으키는 재미나고 희한하고 엉뚱한 행동들을 아주 점잔빼며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나( 피터)는 자신이 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해서 정글짐에서 떨어져서 부러진 앞니 두 개를 삼켜 버린 2살 반짜리 동생보다 얼마나 의젓한 아이인지 어른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어른들의 관심은 언제나 엉뚱한 사건만 일으키는 동생에게 쏠려 있다. 나의 마음을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때론 신사인 척도 할 줄 아는 나(피터)보다는 말썽쟁이 퍼지에게 더 끌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앞니 두 개가 빠진 모습은 상상만 해도 웃기고 형이 애지중지하는 거북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꿀꺽 삼켜버리고는 만족스러운 듯 제 배를 두드리는 그 천진난만한 혹은 극악무도한 행동을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나(피터)도 결국에는 동생 퍼지의 온갖 악행들이 그립기까지 하다. 자신의 거북을 삼켜서 수술을 해야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린이 독자의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퍼지와 피터를 주인공으로 한 다른 이야기도 만들었다는데 그것도 꼭 읽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