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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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아직 콜레라가 창궐하던 시대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그 시대, 중남미의 굴곡진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인간의 모습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사랑이야기, 때로는 욕정인지 사랑인지 분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대화문이 거의 없는 서술과 묘사 위주로 가득찬 페이지만큼이나 빽빽하게 숨막히게 이어진다. 

  어쩐지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삶은 작가의 다른 작품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 나오는 90세 노인의 삶의 흔적과 많이 닮아 있었다. 첫사랑의 연인만을 평생 사랑해왔다는 것은 다르지만 첫사랑을 잃고 산 그 이후의 자유분방한 삶은 많이 비슷해 보였다. 때로 그의 수많은 여성 편력은 그가 페르미나 다사만을 사랑한다는 그의 말이 사실일까, 그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집착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밀면 그의 행동에 후한 점수를 줄 수가 없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완성해나가는 인물이라고 포장할 수만은 없는 게 그의 사랑인지 욕정인지 알 수 없는 행동 때문에 한 여자는 남편에게 살해당하고, 십대의 어린 소녀, 아메리카 비쿠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한 수많은 여인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제목이 콜레라 시대의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첫사랑의 순수함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알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모습의 사랑이야기를 콜레라 시대의 불결한 환경처럼 복잡하게, 음울하면서도 유머스럽게 그려낸다. 때로는 순수한 욕망 그 자체만 있는 사랑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회사 동료였던 흑인 여자와의 정신적인 사랑이 있기도 하고... 반면 그녀는 해변에서 자신을 성폭행했던 얼굴도 모르는 남자만을 평생 사랑하고 찾으며 살아가는 여자였고...  세상에는 60억 인간의 수만큼 사랑이 존재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성폭한 남자를 평생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이건 남자의 환상이 아닐까? 혹은 카톨릭 국가에서 자란 한 여자의 잘못된 사랑 방식은 아니었을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평생을 사랑한 페르미나 다사는 여러 인물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보여진다. 아버지에게 플로렌티노와의 사랑을 들킨 후 떠난 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첫사랑인 남자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환상속의 멋진 남자가 아니라 비쩍 마르고 어딘지 음침해 보이기까지하는 그런 남자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고 결국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을 해서 신분상승을 이루게 된다. 그녀는 첫사랑을 잊었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남편이 죽음으로 자신을 배신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녀의 남편, 후베날 우르비노박사는 자신의 신분과는 걸맞지 않은 상인의 딸과 결혼을 했지만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는 그 도시에서 벌어지는 온갖 행사에 어울리는 그런 기품과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였기에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선택할 만큼 현실적이다. 아니 낭만적인가. 모르겠다. 그의 아내가 자신의 삶이 남편의 악세사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현실적인 남자가 되는 것이고, 만약 꿈같은 삶을 살았다고 느낀다면 그의 행동은 낭만적 사랑이지 않을까. 어쨌든 그는 아내를 사랑했다. 그가 새장을 탈출한 앵무새를 잡기 위해 망고나무에서 떨어져 죽기 전까지는.  단 한번의 외도를 빼고는...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의 죽음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기다려온 것이었다. 바로 그날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그의 미망인에게 그녀의 곁에는 평생 자신이 있었노라고 당당히 고백한다. 이미 서로는 주름투성이의 걸음마저 불편한 그런 노인이 되고 말았지만. 그녀가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얼마 후 그들은 함께 선박여행을 하게 되고 늙고 비참해진 서로의 몸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이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아메리카 비쿠냐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되고 그들이 탄 배는 입항을 거절당한다. 그리고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다시 출항할 것을 명령하고 그들의 사랑이 끝날 때까지 여행을 계속할 거라고 말한다. 

  마지막 장면은 느닷없으면서도 놀라운 장면이었다. 대체로 이야기들은 결말이 드러나 보이는데 이 소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야기가 끝나는 느낌이었다. 뒤에 남겨진 수많은 문제들을 팽개친 채 전혀 현실감이라고는 없는 결말을 맺고 있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그들은 다시 그들이 사는 도시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사랑이 환상 혹은 환멸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스스로 배를 돌린 것은 아니었을까. 50년 전 페르미나 다사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 플로렌티노 아리사를 다시 만난 순간 그에 대한 사랑이 막연한 환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처럼,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생각했던 것처럼 선박여행이 아름답지 만은 않았던 것처럼. 강에는 시체들이 떠다니고 있었고, 한때 무성했던 나무는 베어지고, 동물들마저 사라진 그런 황폐한 곳으로 변해버렸듯이... 

  의문 하나,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페르미나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만났던 수많은 여자들은 결코 사랑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그녀들은 오로지 페르미나의 대용품일 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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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 우편기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19
생 텍쥐페리 지음, 배영란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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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동적인 작품은 늘 장면으로 기억이 남는다. 중편이나 단편이었는데 제목은 잘 기억 나지 않고, 그 주인공도 배행기 조종사였고 사막의 한 고원에 불시착했던 것 같다. 조종사가 불시착한 그 사막의 모습이 마치 꿈속인듯 기억에 남아 있다. 바닥에는 보석과 같은 모래 알갱이들이 깔려있고 배경은 모두 오렌지색으로 물들어있던 그 느낌. 사막의 밤은 그럴까하는 생각이 들게 했던 장면이었다. 어린 왕자보다 그 작품 이후 생텍쥐페리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실제 비행기 조종사였던 그의 생활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품이어서 더 좋아하게 되었다. 삶과 작품이 크게 다르지 않은 작가가 바로 생텍쥐페리였다. 지중해 어딘가에서 실종된 그의 마지막 모습도 한편의 그의 소설처럼 아련하다. 비극적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형태로 삶을 마감한 느낌이랄까. 그저 책상 앞에서 앉아서 머리만 굴리는 그런 작가가 아닌 삶에 철저히 다가선 작품을 쓴 작가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어린 왕자처럼 순수한 감정이 느껴지는 그의 작품들... 작품들을 통해 느껴지는 작가의 이미지는 참으로 세상의 시선보다는 자신이 느끼는 대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대로 살다간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 남방우편기는 작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같다. 어쩐지 작가의 삶과 닮아 있는 작품 같기도 하고, 그의 처녀작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베르니스의 죽음이 20년 쯤 뒤에 오게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나의 억측이긴 하지만.  그의 직업이 비행기 조종사이고 보면 죽음은 그의 삶에 언제든, 경고도 없이 닥칠 수 있는 것이었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직업을 갖고 있었기에 그의 소설은 언제나 삶의 본질, 삶의 그 순수한 모습을 추구하는 작품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이 땅, 이 세계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내려다보는 비행기 조종사의 시선에 세상은 때로는 잘 구획된 울타리나 들판, 숲처럼 질서 정연하기도 하고, 지상 가까이로 다가가면 비행기의 동체를 흔드는 느닷없는 바람과 구름처럼 오히려 세상이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작가 자신의 모습이나 다름없는 주인공 자크 베르니스에게는 지상에서의 삶이 비행기조종 만큼이나 혹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지 않았을까. 첫사랑의 연인을 자신의 삶 속으로 데려오고 싶어했지만 그럴수 없었던 것처럼. 결국 누군가의 우편을 전달하기 위해 비행을 계속 하던 그는 피살되고 그가 전달하려했던 우편물만 사람들 속으로 돌아오게 된다. 

  생텍쥐베리의 작품은 20세기 초 항로를 개척할 당시의 상황과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막 알아가기 시작하던 무렵의 호기심과 아직은 베일에 싸인 생명력 가득찬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아직 세상은 다 개척되지 않았고 그것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용기와 두려움, 순수함을 작품마다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처녀작인 남방우편기를 시작으로 새롭게 생텍쥐페리의 작품세계로 다가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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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4
J.M.G. 르 클레지오 지음, 김윤진 옮김 / 민음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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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는 내내 아니 한장한장 넘길수록 가슴이 답답하다. 아니 폭발하기 직전의 꽉 막힌 듯한 느낌이다. 애초 사건을 따라 가는 소설이 아닐 거라 예상은 했고 이런 심리소설 혹은 무의식 혹은 한 남자의 의식을 따라가는 소설일 거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참기가 힘들다. 읽어내기가 힘들다. 왜 이 남자는 이렇게 살아야하는가? 정신병자여서? 탈영병이어서? 혹은 그가 살고 있는 세상에 적응해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모르겠다. 아마도 이 세상 누군가는 이런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무의미한 세상에 회의와 좌절을 느끼면서... 

  하지만 꼭 이렇게 숨 막히게 답답하게 그 무의미한 일상을 보여줘야 할까? 과연 독자들이 해변가에서 마주친 개나 따라다니고, 동물원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일상을 보내고, 아무 의미도 없는 사물들에 시선을 주고, 아무 의미도 없는 대화를 하고 듣는 한 남자의 삶에 흥미를 가질까? 한 사람의 평범한 독자로서 결코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이다. 인류를 대표하는 한 인물로서 만들어진 아담 폴로라는 인물,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온갖 감정을 느끼며 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소설 속 인물 그 자체라는 생각이든다. 소설 속에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대로 움직이는 인물, 그는 왜 평범한 인간의 행동을 보이면 안 되는 것일까?  아직 20대의 젊은이로서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 야망을 갖고, 아니면 평범한 인간적인 사고를 갖고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가면 안 되는 것일까?    

  그는 왜 현대문명을 인간사회를 거부하게 된 것일까? 모르겠다. 끝까지 읽다보면 그의 행동에 동의할 수 있는, 혹은 최소한 공감은 갈 수 있는 동기가 있겠지. 끝까지 읽고 찾아낸 동기라면 이 정도일까. 어머니의 편지와 아담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들려주는 시몽 트위드뮈르라는 소년의 이야기에서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는 것, 아주 지능이 뛰어나다는 것, 현실을 두려우움의 대상으로 보는 어린아이 같은 감정을 지녔다는 것 등을 찾아낼 수 있었다. 물론 아담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그가 예로든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는 그것들 뿐이므로 그의 말을 듣고 있는 학생들이나 의사처럼 결국 그 자신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폭력, 성숙하지 못한 심리상태로 인해 현실의 폭력성을 알게 되고 현실의 언저리 부근에서만 존재하는 인간이 되었다? 뭐 그런 추리들... 

  유일하게 아담의 편이 되어 읽었던 순간들은 정신병원에 수용된 후 학생들과의 면담에서 였다. 주치의와 학생들은 자신들이 배운 심리학의 잣대로만 아담을 평가하려 하고 아담의 말을 현학적인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몰아부친다. 유일하게 그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한 여학생을 향해 아담은 세상에 대한, 자신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털어놓지만 결국에는 그것조차 지치고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담은 자신이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하고 싶어할 뿐이다.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평화롭다고 느끼는 대로 살고 싶다는 뜻이 아닐까. 아담이 정신병원에서의 생활을 너무나 순순히, 마치 행복한 듯이 받아들이듯이. 

  그렇게 되면 아담 스스로 정신병원행을 택했다는 뜻이 될까? 사람들 앞에서 한 연설과 행동들은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도된 행동이었던 것일까? 심리학은 그런 그에게 온갖 병증을 갖다 붙인다. 계통적인 편집적 망상, 심기증 경향, 과대망상, 극소 집착증, 피해망상, 정당화를 통한 책임 회피 증세, 성도착증, 정신착란... 그는 우리의,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정신병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그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나는 그를 정신병자로 분류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스스로 정신병원에서의 삶을, 지극히 단순하고 한가로운 삶을 선택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아담 폴로에게는 이 세상 삶의 방식이 맞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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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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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읽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순서는 이렇지 않을까 싶다. 먼저 보르헤스를 알고 보르헤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의 이름을 듣고 그의 대표작인 이 책을 읽게 되고,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작품 전에 그의 단편집 러시아 인형을 읽었다는 것만 추가하면. 작품 말미에 나오는 해설을 보면 중남미 문학에서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새롭게 시도하는 환상문학의 선두에 이 작품이 서 있다고 한다. 그래 그런지 기발하다기보다는 모범적이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어쩐지 결말을 미리 알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70년 전의 작품이란 생각을 하면 그 당시에는 상당히 획기적인 작품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 작가가 그동안 보르헤스에 가려져있다가 보르헤스 사후에 새롭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 글을 읽고는 보르헤스와 그의 작품을 비교해보게 된다. 이 작가에 비해 보르헤스의 작품이 훨씬 밀도 있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 두 권의 책만 가지고 대작가의 반열에 드는 두 작가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순전히 주관적인 입장으로 보면 비오이 카사레스의 작품이 조금더 순수하다는 느낌이랄까. 좀 단순한 구성같기도 하고. 그리고 좀더 서정적이고.  

  주인공인 나는 사형 선고를 받고 도망쳐 영국령의 엘리스 군도에 있는 한 무인도로 도망친다. 그 섬은 소문에 의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의 근거지로 손톱, 발톱이 빠지고 각막도 피부도 벗겨진 채 죽어가는 사람들이 발견된 곳이라고 한다. 나는 그런 소문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피하기 위해 홀로 이 섬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흘러들어오게 된다. 그 섬은 1920년대에 세워진 박물관과 수영장, 예배당 건물만이 남아 있고 쓸모를 알 수 없는 수차와 무성한 나무와 꽃들이 있는 그런 곳이다. 

  섬에서 홀로 생활하던 어느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박물관 주변의 언덕에 나타나게 되고 나는 그들을 피해 밀물이 밀려드는 저지대에 살면서 그들을 관찰하게 되고 한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들이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이 유령이거나 혹은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일까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 왜 이 소설의 제목이 모렐의 발명인지는 알 수 없고 모두 아리송한 것 투성이다. 그러다 나는 한눈에 사랑하게 된 그 여자의 이름이 포스틴이라는 것과 그녀 주위에 머무는 키큰 한 남자의 이름이 모렐이라는 것 등을 알게 되고 그들을 둘러싼 주변인물도 조금씩 알게 된다. 

  그들 주위를 맴돌던 어느날 박물관의 지하방에 모인 그들의 대화에서 나는 이 섬과 그들의 정체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하고 모렐의 발명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모렐은 포스틴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녀와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 어떤 기계를 발명하게 되었는데... 

  이 부분에서는 비오이 카사레스가 단순히 환상이 아닌 과학과 환상을 적절히 잘 조화시키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그 당시에 홀로그램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는 작가가 작품 속에서 그린 대로 시각 뿐만 아니라 오감과 영혼 까지 담을 수 있는 영상이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단편집 러시아 인형에 나오는 '물 아래에서'라는 작품도 과학과 환상의 결합이 절묘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었고 오히려 이 작품보다 더 기발하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탐정 소설 같은 재미도 있으므로 끝까지 줄거리를 이야기 하면 재미없을 것 같다. 모렐의 발명이 무엇이었나. 나는 그 후 어떻게 되고, 거기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환영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나 하는 것들은 직접 읽으면서 확인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난 요즘 들어 남미 풍의 환상문학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아예 대놓고 판타지 장르라고 말하는 수많은 대중 소설보다는 현실과 환상이 절묘하게 직조되어 있는 남미작가들의 작품이 이국적이면서도 새롭게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독서 부족 탓에 너무 늦게 발견한 아쉬움이 크다, 좀더 어렸을 때 이런 책들을 접했더라면 좀더 다양한 세계를 경험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예전에는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었다. 특히 90년대에는... 그러나 세월과 함께 우리 소설이 너무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고, 자기 소설의 반복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것들에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그때 들어온 것이 SF소설이고 남미 문학이었다. 진득하지 못한 성격의 나로서는 이런 작품들도 결국에는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하는 실망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내 감성을 끌어내는 작품들은 후자의 것들이다. 

  씨실과 날실이 빈틈없이 교차하는 답답하고 일상적인 현실 속에서 절묘하게 드러내는 환상의 영역은 어떤 카타르시스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닫힌 일상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저쪽 세계로의 도약이 소설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순간을 만끽하고 싶어서 아직은 환상문학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 현실을 뛰어넘고 싶어서 그런 작품을 읽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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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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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 추석에 근 30년 만에 반딧불이를 보았다. 몇 년 전부터 부모님께서 우리 동네에 반딧불이가 보이기 시작했다며 전화 통화를 하는 도중에 종종 말씀해 주시곤 했다. 그런데 이 반딧불이들은 어찌나 예민한지 자식들이 오지 않는  주 중에는 우리 동네 할머니들이 여름밤마다 놀러 나오시는 정자 근처까지도 날아오곤 한다는데 우리가 가는 주말에는 도통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주말에는 우리를 비롯한 다른 집을 찾아오는 자식들의 차들까지 사람의 왕래가 많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재작년 추석에 이번에는 꼭 눈으로 확인하고 말겠다며 조카들과 언니들이랑 정자에 앉아 그 귀하신 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반딧불이가 진짜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거였다. 생전 처음보는 조카들은 신기해했고 나이 많은 우리들은 진짜 반딧불이가 있네. 어릴 때 보던 그 반딧불이가. 그런데 너무 잠깐이었다. 반딧불이는 겨우 얼굴만 빼꼼 보여주고 꼬리를 흔들며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다시 반딧불이를 보지 못했고 여름이면 꼭 봐야지 하면서도 올해도 여름도 가을도 훌쩍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다시 만난 반딧불이, 힘없이 가물거리던 노란색 반딧불이로 묘사되던 그 반딧불이를 읽으면서 재작년 겨우 눈도장만 찍어주고 떠난 그 반딧불이가 생각났다. 내가 본 반딧불이는 어린날의 추억과 다시 만나는 반딧불이였다면 하루키의 반딧불이는 죽은 친구의 연인이자 자신의 연인이기도 한 여자를 상징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꺼질듯 약한 빛을 발하며 멀어지는 반딧불이를 보내며 그 여자를 떠나보내는 장면이 참으로 쓸쓸했다.

  하루키의 소설의 인상은 젊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감성이 아주 잘 살아있다는 것. 이런 감성이 하루키만의 것인지, 혹은 일본 젊은이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젊은 감성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에서도 두루 통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세계 모든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공감할 만한 대중문화와 여러 문화 코드들이 잘 접목되어 있는 것이 그의 장점이면서 혹은 단점이 아닐까. 대체로 그의 작품은 그런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므로. 때로는 지나치게 가벼운 것 같다가도 깊은 사유의 영역을 만나게도 되고 그게 하루키 소설의 매력이기도 하고. 

  새로운 단편을 읽고 싶었는데 '반딧불이' 외에 전에 읽었던 단편집이랑 거의 같아서 많이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하루키의 단편은 다시 읽어도 그 산뜻한 맛은 여전하기 때문에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래, 한마디로 하루키의 단편은 산뜻하다. 감정의 질척임 같은게 보이지 않는 산뜻함과 순수함이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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