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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평점 :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아직 콜레라가 창궐하던 시대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그 시대, 중남미의 굴곡진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인간의 모습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사랑이야기, 때로는 욕정인지 사랑인지 분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대화문이 거의 없는 서술과 묘사 위주로 가득찬 페이지만큼이나 빽빽하게 숨막히게 이어진다.
어쩐지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삶은 작가의 다른 작품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 나오는 90세 노인의 삶의 흔적과 많이 닮아 있었다. 첫사랑의 연인만을 평생 사랑해왔다는 것은 다르지만 첫사랑을 잃고 산 그 이후의 자유분방한 삶은 많이 비슷해 보였다. 때로 그의 수많은 여성 편력은 그가 페르미나 다사만을 사랑한다는 그의 말이 사실일까, 그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집착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밀면 그의 행동에 후한 점수를 줄 수가 없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완성해나가는 인물이라고 포장할 수만은 없는 게 그의 사랑인지 욕정인지 알 수 없는 행동 때문에 한 여자는 남편에게 살해당하고, 십대의 어린 소녀, 아메리카 비쿠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한 수많은 여인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제목이 콜레라 시대의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첫사랑의 순수함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알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모습의 사랑이야기를 콜레라 시대의 불결한 환경처럼 복잡하게, 음울하면서도 유머스럽게 그려낸다. 때로는 순수한 욕망 그 자체만 있는 사랑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회사 동료였던 흑인 여자와의 정신적인 사랑이 있기도 하고... 반면 그녀는 해변에서 자신을 성폭행했던 얼굴도 모르는 남자만을 평생 사랑하고 찾으며 살아가는 여자였고... 세상에는 60억 인간의 수만큼 사랑이 존재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성폭한 남자를 평생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이건 남자의 환상이 아닐까? 혹은 카톨릭 국가에서 자란 한 여자의 잘못된 사랑 방식은 아니었을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평생을 사랑한 페르미나 다사는 여러 인물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보여진다. 아버지에게 플로렌티노와의 사랑을 들킨 후 떠난 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첫사랑인 남자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환상속의 멋진 남자가 아니라 비쩍 마르고 어딘지 음침해 보이기까지하는 그런 남자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고 결국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을 해서 신분상승을 이루게 된다. 그녀는 첫사랑을 잊었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남편이 죽음으로 자신을 배신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녀의 남편, 후베날 우르비노박사는 자신의 신분과는 걸맞지 않은 상인의 딸과 결혼을 했지만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는 그 도시에서 벌어지는 온갖 행사에 어울리는 그런 기품과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였기에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선택할 만큼 현실적이다. 아니 낭만적인가. 모르겠다. 그의 아내가 자신의 삶이 남편의 악세사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현실적인 남자가 되는 것이고, 만약 꿈같은 삶을 살았다고 느낀다면 그의 행동은 낭만적 사랑이지 않을까. 어쨌든 그는 아내를 사랑했다. 그가 새장을 탈출한 앵무새를 잡기 위해 망고나무에서 떨어져 죽기 전까지는. 단 한번의 외도를 빼고는...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의 죽음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기다려온 것이었다. 바로 그날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그의 미망인에게 그녀의 곁에는 평생 자신이 있었노라고 당당히 고백한다. 이미 서로는 주름투성이의 걸음마저 불편한 그런 노인이 되고 말았지만. 그녀가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얼마 후 그들은 함께 선박여행을 하게 되고 늙고 비참해진 서로의 몸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이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아메리카 비쿠냐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되고 그들이 탄 배는 입항을 거절당한다. 그리고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다시 출항할 것을 명령하고 그들의 사랑이 끝날 때까지 여행을 계속할 거라고 말한다.
마지막 장면은 느닷없으면서도 놀라운 장면이었다. 대체로 이야기들은 결말이 드러나 보이는데 이 소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야기가 끝나는 느낌이었다. 뒤에 남겨진 수많은 문제들을 팽개친 채 전혀 현실감이라고는 없는 결말을 맺고 있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그들은 다시 그들이 사는 도시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사랑이 환상 혹은 환멸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스스로 배를 돌린 것은 아니었을까. 50년 전 페르미나 다사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 플로렌티노 아리사를 다시 만난 순간 그에 대한 사랑이 막연한 환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처럼,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생각했던 것처럼 선박여행이 아름답지 만은 않았던 것처럼. 강에는 시체들이 떠다니고 있었고, 한때 무성했던 나무는 베어지고, 동물들마저 사라진 그런 황폐한 곳으로 변해버렸듯이...
의문 하나,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페르미나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만났던 수많은 여자들은 결코 사랑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그녀들은 오로지 페르미나의 대용품일 뿐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