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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재작년 추석에 근 30년 만에 반딧불이를 보았다. 몇 년 전부터 부모님께서 우리 동네에 반딧불이가 보이기 시작했다며 전화 통화를 하는 도중에 종종 말씀해 주시곤 했다. 그런데 이 반딧불이들은 어찌나 예민한지 자식들이 오지 않는 주 중에는 우리 동네 할머니들이 여름밤마다 놀러 나오시는 정자 근처까지도 날아오곤 한다는데 우리가 가는 주말에는 도통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주말에는 우리를 비롯한 다른 집을 찾아오는 자식들의 차들까지 사람의 왕래가 많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재작년 추석에 이번에는 꼭 눈으로 확인하고 말겠다며 조카들과 언니들이랑 정자에 앉아 그 귀하신 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반딧불이가 진짜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거였다. 생전 처음보는 조카들은 신기해했고 나이 많은 우리들은 진짜 반딧불이가 있네. 어릴 때 보던 그 반딧불이가. 그런데 너무 잠깐이었다. 반딧불이는 겨우 얼굴만 빼꼼 보여주고 꼬리를 흔들며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다시 반딧불이를 보지 못했고 여름이면 꼭 봐야지 하면서도 올해도 여름도 가을도 훌쩍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다시 만난 반딧불이, 힘없이 가물거리던 노란색 반딧불이로 묘사되던 그 반딧불이를 읽으면서 재작년 겨우 눈도장만 찍어주고 떠난 그 반딧불이가 생각났다. 내가 본 반딧불이는 어린날의 추억과 다시 만나는 반딧불이였다면 하루키의 반딧불이는 죽은 친구의 연인이자 자신의 연인이기도 한 여자를 상징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꺼질듯 약한 빛을 발하며 멀어지는 반딧불이를 보내며 그 여자를 떠나보내는 장면이 참으로 쓸쓸했다.
하루키의 소설의 인상은 젊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감성이 아주 잘 살아있다는 것. 이런 감성이 하루키만의 것인지, 혹은 일본 젊은이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젊은 감성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에서도 두루 통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세계 모든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공감할 만한 대중문화와 여러 문화 코드들이 잘 접목되어 있는 것이 그의 장점이면서 혹은 단점이 아닐까. 대체로 그의 작품은 그런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므로. 때로는 지나치게 가벼운 것 같다가도 깊은 사유의 영역을 만나게도 되고 그게 하루키 소설의 매력이기도 하고.
새로운 단편을 읽고 싶었는데 '반딧불이' 외에 전에 읽었던 단편집이랑 거의 같아서 많이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하루키의 단편은 다시 읽어도 그 산뜻한 맛은 여전하기 때문에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래, 한마디로 하루키의 단편은 산뜻하다. 감정의 질척임 같은게 보이지 않는 산뜻함과 순수함이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