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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눈먼 자들의 도시' 이후 두번째로 읽은 작가의 작품이다. 워낙에 첫 작품에 대한 충격이 컸던 탓일까. 이 작품은 눈먼 자들의 도시만큼 흡인력있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다.
백색실명이 있었던 4년 후, 선거일. 제14투표소에는 투표를 하러 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그 빗속을 뚫고 투표를 하러 올리 만무하다. 우익정당의 참관인도, 중도정당의 참관인도, 좌익정당의 참관인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다. 오후 드디어 비가 그친다. 그러나 투표를 하러 오는 사람들은 가물에 콩나는 정도로 띄엄띄엄하다. 대규모의 기권 상태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간은 오후 4시에 다다른다. 그 순간 갑자기 수많은 인파가 투표소로 모이기 시작하고, 대규모 기권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초조감에 시달리던 정부는 환영의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투표함이 열리고 밝혀진 진실은 모든 정당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익정당이 13퍼센트, 중도정당이 9퍼센트, 좌익정당이 2.5퍼센트의 표만을 확보했을 뿐 나머지 70퍼센트 이상이 백지투표 다는 것. 혼란과 망연자실 속에 두번째 선거가 치러지지만 결과는 더 참담하다. 전체 유권자의 83퍼센트가 백지투표를 던진 것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태는 민주주의에 대한, 정부에 대한 도전행위였다. 이 도시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는 당국에 이 도시의 83퍼센트가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내어놓는데 결국 도시에는 계엄이 선포되고 도시 전체는 군대에 의해 둘러싸이게 된다. 그래도 무례한 도시의 시민들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에 기차역 폭파 같은 조작극(어느 나라의 권력이든지 간에 우매한 정권이 쓰기를 좋아하는 그런 뻔한 조작극말이다.)으로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백지투표를 던진 사람과 정당한 선거권을 행사한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를 기대해서 벌인 사건이지만 정부가 예상한 그러한 사태는 끝내 발생하지 않았다. 정부는 두번째 특단의 조치를 내어놓는데 지방자치기구와 소방공무원을 제외한 모든 정부 기구와 경찰력을 도시 밖으로 소개시켜버리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도시를 무정부, 무질서의 상태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무질서라고 부를 만한 상황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한장의 편지가 정부관계자에게로 날아드는데 이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4년 전 백색실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 편지를 보낸 인물은 4년전 가장 먼저 눈이 먼 남자였고 그는 이 사건의 배후로 그 때 눈이 멀지 않은 유일한 여자를 지목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사실 난 여기서부터 이야기의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가는 처음부터 '눈먼자들의 도시' 후편이라는 생각을 갖고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겠지만 항상 새롭고 신선한 것을 원하는 독자로서는 특별히 새롭게 전개될 이야기가 없어서 이 부분을 끌어들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갑자기 '눈먼자들의 도시'편으로 돌아가버린 것 같달까. 백지투표라는 행위 뒤에 가려진 이야기를 찾기보다는 백지투표라는 행위에 대처하는 정부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라서 그런지 백지투표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의 표면만 건드리고 넘어갔다는 느낌이다. 백지투표를 던진 사람들의 속마음도 듣고 싶었는데 정작 이 도시 사람들은 배경이나 원경이 머무른 느낌이다.
이게 작가의 의도인가. 정부의 입장에서 이 도시 사람들은 어느 집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남편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친구이기도 하고, 직장에서의 부하이거나 상사이기도하고, 매일 가는 단골 식당의 손님이기도 한 살아 있는 실체가 아니라 한 명의 투표용지, 하나의 투표 용지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시민의 목소리는 백지투표로, 한밤중 정부와 경찰당국의 철수가 시작될 때의 창가에 반짝이는 불빛으로 대신하고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 가 카메라를 아주 근접시켜서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표착해낸 방식이라면 이 작품은 카메라 도시 공중에 띄워놓고 도시 전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먼 각도에서 조망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 도시의 운명은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개개인에 의해 결정되는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몇몇 인물들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어 진다. 그러면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누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들의 나라에(혹은 민주국가를 표방한 모든 나라에) 민주주의 란게 존재하는 것일까, 정부란 진정으로 국민의 편일까 의심해 보게 된다. 이 도시의 사람들처럼 현실 속의 우리들도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정당성을 강화시켜주는 하나의 표일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한 개인으로서 고작할 수 있는 게 백지투표를 던지는 것일 뿐이라는 현실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 하나, 나의 눈은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인가. 이 세상엔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진작에 인정해버리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