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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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스 먼로, 사실 이번 노벨문학상 발표로 인해 처음 접해본 작가였다. 여성이고 특히나 단편을 위주로 쓰는 작가라는 사실에 호기심이 생겨 다른 책들 사이에 끼워넣게 되었다. 우리나라 여성작가들의 밀도있는 서술과는 조금 다른 여백이 느껴지는 글이랄까. 이 여백이란 게 사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읽은 몇 편으로 봐서는 대체로 여성 화자가 많고 그것도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그려진 작품이 많은 것 같다.

  표제작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먼저 읽으보려다가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기도 하고 제목이 주는 느낌이 신선하고 뭔가 호기심이 생기기도 해서 일단 나중에 읽으려고 미뤄두기로 했다. 여기서도 내 성격이 좀 드러나는데 맛있는 것들이 있으면 맛있는 것 먼저 먹기보다는 아껴두었다는 나중에 먹는... 별로 좋지 못한 습관이라고 들었는데... 어쨌든 마지막에 아, 이거구나 하는 뭔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지금까지 읽은 작품이 대체로 좋기는 했지만  그렇게 몰입이 되지 않는 걸 보면 강한 훅을 날리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앨리스 먼로의 단편이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 같다. 소설을 맛이라고 한다면 자극적이고 입안이 얼얼할 만큼 매운 맛이 넘쳐나고 있는 요즘의 소설과 비교하자면 좀 심심한 맛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얼마전 라디오 스타에서 겨자나 식초를 치지 않은 심심한 물냉면의 맛을 아주 좋아한다던 존박의 말이 생각나는데 바로 앨리스 먼로의 단편이 그런 맛이 아닐까 싶다. 뭔가 심심한 듯 싶은 맛. 그러면서도 그 음식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맛. 그래서 자극적이지 않아서 질리지 않는 맛...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은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라는 단편인데 원제는 Walker Brothers Cowboy라고 한다. 이상하게 내겐 이 떠돌뱅이라는 번역이 마음에 썩 들지 않고 화자의 아빠가 외판원으로 일하는 회사의 이름이 워커브라더사인데 그냥 회사 이름 그대로 쓰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떠돌이와 장돌뱅이를 합친 듯한 번역이 어쩐지 조금 억지스럽다. 이 단편 외에도 지금 우리가 흔히 쓰지 않는 옛스런 단어들이 간혹 보이는데 번역자는 의도적으로 그런 낱말을 썼겠지만 우리나라의 삼사십년대가 배경이 아닌 캐나다의 삼사십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단편에 굳이 그런 단어를 쓸 필요가 있나 싶다. 뭔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랄까. 물론 독자에 따라서 이런 부분에 대해 더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겠지만...

  이 단편의 내용을 잠깐 소개하자면 여우 농장을 운영하다 실패하고 감기약, 철분 영양제, 티눈약, 부인병에 좋은 알약, 구강청결제, 삼푸, 로션, 연고, 음료농축액... 양념들, 쥐약 등등을 파는 떠돌이 외판원으로 변신한 아버지의 힘겹고 초라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딸인 화자의 눈을 통해 담담하게 보여주는, 결말이 퍽이나 쓸쓸하고 아련한 소설이다. 클라이맥스라면 소녀의 아버지가 방문했던 어느 집 앞에서 창문으로 쏟아지는 오줌을 가까스로 피하고(그 장면을 자동차 안에서 보고 있던 소녀는 아빠의 옷에 오줌 몇 방울 밖에는 튀지 않았을 거라 다행스러워하고 어린 남동생은 아빠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며 그냥 깔깔 웃어댄다.) 젊었을 때의 여자친구였는지 아니면 그냥 친구였는지 애매한 로라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아빠와 두 아이들과 함께 찾아간 그 집에서도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아마 소녀의 눈엔 뚱뚱한 아줌마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로라와 소녀가 춤을 추고 난 후의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소녀는 이렇게 표현한다. 로라 아줌마가 소녀에게 춤을 가르쳐주고 난 후에 아빠에게 춤을 청하는 장면이다.

  "아버지 앞에 서서 앞으로 뻗어 살짝 늘어뜨린 아줌마의 두 팔은 덩싯거리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함과 풍만함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했던 젖가슴은 헐거운 꽃무늬 드레스 안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나에게 춤을 가르치면서 달아오른 흥분이 책 가시지 않은 얼굴은 새로운 기쁨까지 더하여 환히 빛난다."  

  환하게 빛나는 로라의 모습을 아빠라고 보지 못했을리 없다. 그렇지만 아빠는 그녀의 춤을 거절한다. 그 집을 나오면서 소녀는 생각한다. 저 여자는 헛다리를 짚은 거라고... 소녀는 왠지 오늘 로라 아줌마네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는 비밀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란 단편도 꽤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아버지의 여우농장을 배경으로 여자아이는 여자아이로 사내아이는 사내아이로 자라나게 되는, 서글프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는 소녀의 이야기이다. 여성으로 혹은 남성으로서의 정체성? 혹은 고정관념?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프면서도 쓸쓸하게 그려진다. 소녀는 어머니와 하는 집안일보다는 여우를 키우는 아버지의 일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남동생보다 그 일을 잘하고 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다 여우 먹이로 사온 늙은 말을 총으로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후부터 남동생과 소녀의 역할 바뀌게 된다. 어쩌면 원래의 역할을 찾아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총에 맞아 죽어가는 말과 말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총을 겨누는 아버지, 심지어 발버둥치며 죽어가는 말을 보며 웃기조차 하는 일하는 아저씨를 보고 충격을 받은 소녀는 남동생이 큰 충격을 받지나 않았나 후회한다. 소녀가 먼저 그 총살 장면을 몰래 지켜보자고 했으므로. 

  그리고 얼마 후 여우 먹이로 사온 또 한 마리의 말을 풀밭으로 데려가려다가, 물론 총살을 시키기 위해서, 말이 마구간에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녀는 달아나는 말을 막기 위해 울타리 문을 닫아라는 아버지의 말에 문을 향해 달려가지만 달려오는 말을 보고는 문을 더 활짝 열고 만다. 소녀는 안다. 자신의 이런 행동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오히려 말을 쫓는 아버지를 고생만 시킬 거고, 그 말은 곧 잡혀서 여우 먹이로 사용될 것이고 소녀의 가족은 여우를 키워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동생이 아버지와 함께 트럭을 타고 말을 잡기 위해 나섰다는 것이다. 어쩌면 소녀가 걱정한 것처럼 남동생은 말이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았을 수도 있고 오히려 그 장면은 남동생에게 어린아이의 세계에서 남자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소녀는 아버지와 함께 말을 잡아 집에 돌아온 동생이 자신이 울타리문을 일부러 닫지 않았다는 것을 아버지에 일러바쳤을 때 아버지가 조금 화를 내긴했지만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보고 "계집애일 뿐이니까"라는 말을 듣고 당연하지만 서운함을 느낀다. 소녀는 이제 아버지의 세계에서 완전히 추방된 존재일 뿐이니까.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그리 낯설지 않은 작품이다. 역시 충격적인 반전이랄까 그런 건 없다. 이 단편집(앨리스 먼로의 첫번째 단편집이라고 한다.)에 실린 엘리스 먼로의 작품은 대체로 낯설지 않다. 영미문학의 역사에서 크게 돋보이거나 이질적이라거나 하지 않고 영미문학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느낌이랄까. 이 단편의 주인공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여인이다. 작은 소도시, 혹은 마을의 주류에서 약간 벗어나 있고 그러면서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주변인들에게 흥미거리가 되거나, 혹은 동정의 대상이 되거나 경원하는 대상이 되거나...

  마살레스 선생님은 마을의 피아노 선생님이다. 독신에 늙은 이제 몇 되지 않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나마 몇 남은 아이들도 인정 때문에 예전의 제자가 자신의 아이들을 보내는 정도이다. 이 늙고 고집스럽고 상냥하기조차 한 선생님은 6월마다 제자들의 연주회를 연다. 부모들은 우스꽝스럽고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자신들을 맞이하는 이 선생님의 파티에 마지못해 참석하고 그나마 연주할 아이들이 몇 되지 않으므로 빨리 이 좁아터지고 덥고 파티에 내놓은 음식은 상해가고 있는 이 집에서 벗어나기만을 고대하고 있는데, 낯선 한 무리의 아이들이 느닷없이 등장한다. 그 아이들 중의 한 명이 연주한 곡이 바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들을 집중시킬 만큼 아름답게 연주되는 곡. 바로 이 곡을 연주한 아이는 그린힐 학교라는 지적장애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여자아이다. 연주는 아름답웠고 경이로웠지만 그뿐이다. 오히려 화자는 그 순간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낀다. 이 아이들의 등장, 이 연주는 마살레스 선생님을 예전보다 더 독특한 세계로 보내 버린다.

  통속소설에서는 혹은 우리의 일상에서는 지적장애아가 연주한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들은 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내면이 바뀌는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을까. 마지못해 앉아 있는, 지적 장애아들의 서툰 연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하는,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 사람들의 내면에 잔잔한 감동의 울림 같은 것들이 전해지면서 작품이 마무리 될 것이라고... 그러나 기대는 어긋난다. 감동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지적장애아의 연주는 의미없이 끝나고 마살레스 선생님은 혼자만의 세계에 여전히 빠져 있고 주변 사람들은 그 덥고 좁아터지고 미리 만들어놓은 파티 음식이 상해가고 있는 그 집을 빠져 나오면서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지금까지 읽은 앨리스 먼로의 단편은 캐나다의 작은 마을, 평범한 가정, 평범한 인물 대체로 여성이나 여자아이를 통해서 우리네 삶의 그 씁쓸하면서도 쓸쓸하고 고되고 아픈 현실을 그다지 아프지 않게 그린다. 아마도 그 인물들의 내면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묘사하기보다는 서사, 이야기로 풀어가기 때문인 것 같다. 하나하나의 단편마다 서사가 뚜렷하다. 자칫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서사 혹은 플롯을 찾아내고( 사실 억지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원래 있던 이야기를 찾아낸 듯이 자연스럽다.)마지막에서는 가슴 한구석을 툭 건드리는 문장이나 결말로 사건을 일단락 짓는게 그녀의 방식인 것 같다. 그녀의 단편은 자칫 평범해보이지만 혹은 단편 속에 그려진 인물들의 삶들도 특별할 것 하나 없어보이지만 우리네 삶이 어긋나는 혹은 특별해지는 어느 한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해내는 것 같다. 그래서 평범한 이야기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고 평범한 인물들은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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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은 없다 - 투명인간, 순간이동, 우주횡단, 시간여행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미치오 가쿠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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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의 이전 책인 평행우주보다는 재미가 좀 덜 하다. 미래의 과학이나 기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끝까지 호기심을 놓치지 않고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은 다른 대중과학서와는 달리 평행우주만큼이나 잘 읽힌다는 장점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이런 류의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제법 두꺼운 분량의 책이라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대중 물리학책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래도 좀 읽을 만한 책이라 느낄 것이다. 이 책은 사람들의 흥미를 충분히 자극할 만한 소재를 가지고 있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 이 책의 제목이 잘못됐다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그건 책을 꼼꼼하게 읽지 못한 결과이다. 제3부류의 불가능이 지금으로서는 물리학의 법칙에 위배되지만 먼훗날에는  이런 것들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물리학의 법칙이 고정불변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아래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을 그래도 옮겨보면...

  이 책에서는 '불가능한 정도'를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보기로 한다.

  첫 번째는 <제1부류 불가능>으로서,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물리학의 법칙에 위배되지는 않는 것들이다. 이런 종류의 불가능은 21~22세기 안에 어떻게든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 공간이동이나 반물질 엔진, 텔레파시, 염력, 투명한 물질(투명인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제2부류 불가능>은 물리법칙의 위배 여부가 아직 분명치 않은 것들로서, 만일 위배되지 않는다면 수천, 또는 수백만 년 후에나 실현될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시간여행, 초공간 여행, 웜홀 타임머신 등이 여기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제3부류 불가능>은 현재 알려진 물리학 법칙에 위배되는 것들인데, 놀랍게도 여기 속하는 항목은 많지 않다. 먼 훗날 이들이 가능한 것으로 판명된다면, 물리학의 근본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세 번째 불가능에 속하는 것들로 영구기관과 예지력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영구기관은 지금으로서는 열역학법칙에 위배되며 예지력은 인과율에 위배된다고 한다. 과학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책을 통해서 과학의 미래, 우리의 미래가 가 닿는 곳이 어디쯤일지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면 이 책을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읽을 수 있게 개정해서 나오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주제는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좋은 소재들이니까. 예전에 비해 요즘 아이들이 과학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걱정만 하지 말고 이런 좋은 책들을 쉽게 접하게 해주는 것도 과학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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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렙 보르헤스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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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헤스를 처음 읽었을 때, 주눅이 들었다. 내가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이렇게 쓰는 사람도 있었구나. 그의 짧은 단편 곳곳에서 보여지는 엄청난 독서의 파편들... 보르헤스만큼 책을 읽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는 건가 하는 자괴감... 그리고 놀라움... 자유로운 글쓰기의 놀라움. 보르헤스의 세계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지하실에서부터 그의 독서가 가 닿은 세계 전부가 되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또한 보르헤스의 세계는 명확하지 않다. 줄거리 또한 분명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그것이 단점이면서도 장점인 것이 그래서 다시 읽어도 새롭다는 것이다. 보르헤스 소설의 또다른 장점은 그의 단편들을 읽고 있으면 그의 책속에 언급된 작품들, 인물들에 대해 알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또다른 독서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좋은 작품이 쉼없이 의문을 불러 일으키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란 가정이 가능하다면 보르헤스의 작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작품은 대체로 짧으면서도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SF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하고, 신화적이기도 하고, 시적이기도 하고, 종교적이기도 하고, 역사의 한 대목을 읽는 것도 같고... 중남미 아르헨티나의 색채가 진하게 담겨 있으면서도 동서양을 아우르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글쓰기의 세계를 보여 준다. 그래서 어렵다. 짧은 단편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주석이 너무 많다 보니 이야기의 흐름이 자꾸만 끊어지고 줄거리 파악도 쉽지가 않다. 처음엔 주석을 읽어내기도 벅차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작가의 어마어마한 독서편력에 압도당한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글쓰기 방식에 적응되고 나면 그의 무한한 상상력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글쓰기에 뭔가 자유로움 같은 게 느껴진다.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글로 뭔가를 표현할 때 느끼는 한계를 무너뜨린 느낌이랄까. 줄거리를 꼭 파악하고 말리라. 주제를 파헤치고 말리라. 꼭 다짐하며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보르헤스의 생각처럼 작품은 고정불변한 대상이 아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독자의 수만큼의 작품이 생겨나게 마련이므로 자신이 가진 만큼만 알고 이해하고 넘어가면 된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그의 작품이 재미있어 지고 이해할 것도 같고 그러다 그의 작품도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는 순간이 찾아오게 되고 그를 넘어서 기발하고 특별하지는 않지만 글의 내공이 탄탄해보이는 다른 작품들로도 시선을 옮기게 된다. 한때 뭔가 새로운 것을 많이 찾았던 것 같다. 그래서 보르헤스를 접하게 된 것이고. 하지만 새로운 것, 참신한 것에만 맛을 들여서는 지속적인 독서를 하기가 힘들어진다. 보르헤스도 작품을 통해 수없이 말하지 않았는가. 이 세상에 더 이상은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3권에 실린 단편들은 대체로 짧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 실린 "죽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단편에 비해 조금 긴 편이다. 보르헤스의 친구인 실제 인물이 영국의 수필가이자 시인인 포프가 번역한 '일리아드'를 구입했는데 바로 그 책에서 2세기 로마제국의 병사가 기록한 글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로마의 병사는 아프리카의 여러 곳을 오래 방황한 끝에 죽지 않는 사람인 회색인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들은 자신이 만든 도시를 버리고 퇴화한 인간의 모습을 한 채 혈거인으로 살고 있다. 어쩐지 이 대목을 읽었을 때 '타임머신'에 나오는 지하인간인 몰록족이 떠올랐는데 보르헤스도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 싶기도하고... 이 병사는 그 혈거인들 중 한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일리아드'를 쓴 호머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후 이 로마제국의 병사도 불사의 인간이 되어 세계 여러 나라를 방황하다 현재에 이르러 자신 또한 호머이며 동시에 모든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또한 죽을 운명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 단편 속에서 보르헤스는 말한다. "아무도 아닌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단 한 사람의 죽지 않는 인간은 모든 죽지 않는 인간들이다." 호머가 일리아드를 쓴 이래로 매 시대마다 그 작품을 읽어 온 수많은 사람들이 호머이지 않을까? 그래서 혈거인인 호머가 바로 그 로마제국의 병사일 수도 있는 것이고  또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은 죽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앞의 보르헤스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보면 어떨까. 한 사람은 동시에 모든 인류이다. 

  모든 단편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처음 읽었을 때부터 두번 세번 반복해서 읽어도 여운이 남는 몇몇 작품들을 더 소개하자면 "신의 글"도 무척 인상적인 단편이었다. 처음 이 단편을 읽었을 때 보르헤스는 과연 신의 글을 어떤 문장으로 표현할까 몹시 궁금했는데 결국에는 비밀의 글을 숨김으로써 끝을 냈을 때는 꽤 아쉽기도 했었다. 신은 세상의 마지막 날 많은 재난과 화근들이 일어날 것임을 예견하고 <창조>의 첫날에 그러한 불행들을 피하기위해 필요한 마술적인 문장 하나를 지었다. 바로 그 마술적인 문장을 마야의 제사장이 원형의 감옥에서 발견하게 된다. 또다른 감옥에 갇혀 있는 재규어의 무늬 속에서... 이 단편은 짧으면서도 강렬한 인상이 오래 가는 작품이었다. 대체로 보르헤스의 단편은 읽고 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이야기들이 잊혀지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처음 읽은 날부터 지금까지 내 기억에 붙들려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또하나 강렬하면서도 재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는 "엠마 순스"를 들 수 있다. 간결하면서도 아주 잘 짜여진 단편인 것만은 분명하다. 보르헤스의 다른 단편처럼 애매모호하거나 복잡하거나 어렵지가 않다. 그저 전형적인 단편의 매력, 혹은 추리 소설의 매력처럼 마지막에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면서 묘한 쾌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그 단순한 줄거리를 매력있게 만드는 것은 문장 하나하나가 지닌 특별한 힘 때문일 것이다. 보르헤스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의미 없이 넣어진 문장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엠마 순스가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하기까지의 문장 하나하나 명징하게 그 길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3권의 표제인 "알렙"도 보르헤스 아닌 다른 작가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독창적인 작품이다. 사실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고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처음 읽었을 때부터 머리 속에 각인된 장면은 지하실에서 발견한 그 한 지점, 세계의 모든 곳 모든 것이 동시에 담겨 있고, 우주의 모든 것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지점이다. 글이 아닌 영화의 스크린을 보듯 그 신비롭고 경이로운 장면에 멍하니 빠져든 기분이었다. 얼마 전에 읽은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에서 "알렙"을 언급한 부분을 읽었었는데 하나의 평면에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본 모습을 동시에 드러내는 입체파의 방식을 설명하면서 "알렙"을 예로 들었었다. 하나의 지점에 무한한 지점이 동시에 있는 "알렙"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그런 방식이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피카소의 그림이 무한한 공간이 한 지점에 들어 있는 "알렙"을 온전히 담을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기도 했다. 또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작은 지하실에서 온 세계를 조감하고 있는 보르헤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무한한 우주에 대해서도...

   보르헤스를 읽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보르헤스와 함께 사고의 지평이 넓어지는 느낌이랄까. 하나의 지점에 모든 지점이 담겨 있는 "알렙"처럼 내 안에 있는 무한한 세계를 한순간 경험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마도 보르헤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어느 순간 다시 보르헤스의 책을 손에 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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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4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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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란 한 천재적인 인물과 이렇게 생생히 대면하기는 처음인 것 같다. 그저 줄리어스 시저란 이름으로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인물의 생애를 제대로 알 수 있었던 기회였다. 저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이렇게 표현했다. 폼페이우스는 야망보다 허영이 더 우세한 인물이었다면 카이사르는 야망과 허영 모두 컸던 인물이라고. 카이사르가 주변의 호위병들을 모두 물리친 것도 일종의 허영이 아니었을까?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카이사르가 그렇게 어이없는 암살을 당한 것은 지나친 자만과 허영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편을 읽는 내내 왜 카이사르가 공화정 대신 제정으로의 변화를 시도해야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기에 제정보다는 공화정이 훨씬 더 민주적인 방식이 아닌가? 저자는 당시의 로마는 도시 국가에서  제국이란 형태로 너무 커져버려서 공화정으로 이끌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카이사르를 옹호하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가는 게 역사의 필연인 것처럼 말하는 부분도 왠지 독재자를 옹호하는 듯한 느낌도 들고... 민주주의란 게 완벽한 통치방식은 아니지만 인류가 만들어온 통치방식 가운데 아직까지는 민주주의를 대체할 만한 방식은 없지 않은가? 공화정이 그래도 민주주의에 가까운 통치방식이 아닐까?

  이후의 로마의 역사를 보면 차라리 그들이 멸시하는 왕조체제가 더 안정적이고 질서 있는 통치체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로마의 황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반란과 죽음이 있었고 황제의 자리가 자식, 손자대에 까지 세습된 경우도 많았고 황제를 죽인 군인들에 의해 또 다른 황제가 옹립되고 그럴 때마다 원로원들은 허수아비처럼 거수기 역할만 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곤 했다. 카이사르가 자신과 대립한 인물들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다고 해서 그가 독재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또한 로마인에 대해 베풀었던 관용에 비해 로마에 대항하는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철저한 파괴를 자행하기도 했다. 갈리아 전쟁 때 카이사르와 싸워서 패배한 성안의 주민들을 철저히 몰살시킨 경우도 있었고...

  1권부터 이 책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은 저자는 철저히 로마인의 입장에서 이 책을 썼구나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역사서라 하기 힘들 정도의 저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너무 많이 개입되어 있어서 독서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 물론 역사를 완전히 객관적으로 쓴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안다. 하나의 장소에서 벌어진 단 하나의 사건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수많은 사건들로 갈라질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데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저자의 개입이 심해지면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저자의 시각에 따라가게 마련이다. 독자는 로마에 대해, 로마인에 대해 알고 싶은 거지 저자가 로마에 대해, 로마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알고 싶은 건 아니다.

  사실 역사를 안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역사는 2000년 전 일어났던 사건(이 사건이라는 것도 어느 편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사건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을 바탕으로 누군가의 시각으로 기록된 것이고(갈리아 전쟁기는 순전히 카이사르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인 반면 갈리아인의 입장에서 쓴 갈리아 전쟁기는 읽을 수가 없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또다른 누군가가 해석을 덧붙인 것이며 이책도 수많은 기록들을 바탕으로 저자의 해석이 덧붙여진 기록일 따름이다. 어쩌면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에 관한 패러디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좀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돌아가면 우리는 다른 건 다 몰라도 부르투스 나마저... 이 말은 한 번쯤 들어보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이 대사가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술라의 대대적인 숙청에서 운좋게 살아남고, 갈리아를 평정하고 이후 루비콘강을 건너 내전을 일으키고 그 내전을 평정하기까지를 생각해보면 원로원 회의가 시작되는 오전 10시에 일어난 그 사건은 너무 쉽게 너무도 허망하게 이루어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변화된 것이 없었다. 카이사르의 계획대로 제정으로의 진행은 막을 수 없었다. 키케로의 말대로 차라리 카이사르가 있을 때가 더 나았다고 할 정도로... 최소한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푸는 좋은 황제가 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역사에서 가정이란 것이 무의미한 것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카이사르 같은 황제는 역사에 자주 등장할 수가 없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독점되는 방식은 그 권력을 가진 사람이 올바른 성품을 가진 사람일 때만 좋은 방식인 것이다.  암살자들은 키케로의 말대로 공화정을 다시 선포하던가 뭔가를 했어야 했지만 그저 세계사에 빛나는 인물 하나를 무의미하게 죽였을 따름이다.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공화정파를 완전히 제압한 이후에 어떤 정치를 펼칠지 흥미진진한 시점에서 갑자가 주인공이 퇴장해버린 기분이랄까? 카이사르가 죽은 순간 무언가 맥빠진 연극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 이후 로마의 세계는 카이사르가 계획한 대로 제정을 바탕으로 더욱 강대한 제국을 만들어 가게 된다. 카이사르가 선택한 제정이 올바른 길이었는지는 의문스럽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미 2000년 전에 루비콘 강을 건넜고 로마제국이 서양에 미친 엄청난 힘을 우린 알고 있다. 역사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인물 뒤에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무의미한 죽음이 있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들... 또한 정말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것일까하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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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세트 - 전3권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미학이 뭔지 궁금해서 이 책을 읽은 건지 그냥 이 책의 그렇게나 유명한 이름을 한 번은 접해봐야지 싶어서 읽은 건지 잘 모르겠다. 2권까지 읽었는데 미학이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고대부터 지금까지 예술을 어떻게 정의해 왔는지를 설명하는 것 같긴 한데. 제대로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작가가 쓴 내용 중에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긴 하다. 자신도 이 책속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림들을 직접 본 적은 없고 미학에 관해 쓴 책들을 참고해서 이 책을 썼으니 이 책은 미학에 관한 책에 아니라 미학에 관해 설명한 책에 관한 책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왠지 그 말을 들으니 작가가 참 솔직한 사람이구나 싶기도 하고 이 책의 정체성이 확 드러나면서 예술의 속성이 그런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선 1권은 원시 시대의 동굴 벽화부터 접근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대로 예술이 당시에는 주술적 성격이었다는 것, 오히려 1만년 전 구석기 시대의 동물 그림이 훨씬 더 대상에 가깝게 그려졌는데 그 그림을 통해서 동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냥법을 익히기 위해서 라는 것. 그래서 원시시대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면 이후의 그림은 사물을 인간이 보는 대로 그렸다는 것. 그 후 보다 추상화되고 기하학적인 그림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상적인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고대의 미술부터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초월적 진리를 표현하는 중세예술, 보다 이성적인 예술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 양식과 감정의 예술이라 일컫는 바로크 양식을 포함하는 근대 예술의 특징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다.

  2권은 세잔 이후의 현대 예술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빛의 예술, 인상파 화가부터. 저자는 말한다. 현대 예술은 그림 밖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현대 예술은 재현을 포기했으므로 주제(의미 정보)가 있을 수 없고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 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즉 미적 정보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현대 예술을 보고 '저게 무얼 그린 거냐'고 묻는 건 실례라고... 이 대목에서 현대 예술이 왜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난해하기만 한 것인지 이해가 된다.

  3권에서 저자는 하나의 코드로 수많은 복제들을 찍어내는 자본주의 생산의 특징에 대해 말하면서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 현대 예술은 일부러 그 공통의 코드를 깨고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자기만의 코드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예술은 평균적인 대중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 예술은 자신만의 코드를 통해 차이를 표현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는 뒤샹과 워홀 이후에 등장하는 작가들은 하나도 새로울 게 없다고 말한다. 뒤샹과 워홀은 차이를 생산한 마지막 작가이며 오늘날의 작가들은 무한히 증식하는 스미스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미술관에서는 변기를 두개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현대 예술의 고민이 무엇인지 느껴진다. 미술 뿐만 아니라 문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현대 예술이 무한히 증식하는 스미스에 불과하다면 도대체 예술이 필요하기는 한 걸까? 여기에서 초미학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평범한 것과 미적인 것, 둘 사이의 구별이 지워지는 현상. 미적인 것이 극점에 달하면 그것은 사라진다. 모든 게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예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은 죽는 것이다. 이런 걸 예술의 종언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게 예술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건가? 예술의 포화상태에 놓인 건가? 이포화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기가 얼마나 힘겨울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아무리 새로운 것을 탄생시킨다(혹은 그린다)하더라도 이 시대의 작품들은 무한히 증식하는 스미스일 뿐이다. 예술의 한계, 창작의 한계가 느껴진다고 할까?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그 말이 이미 낡은 것이 되었듯이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현실에서 예술가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걸까? 진정 수많은 스미스밖에는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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