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나남창작선 118
이병주 지음 / 나남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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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소설도 좋아하지 않고 역사드라마도 거의 보지 않는데 이 책은 재미있었다. 평소 이름만 알고 있는 작가였는데 역시 괜히 이름이 알려지는 건 아닌가 보다. 문장도 스토리도 탄탄하다. 게다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깊이까지 다이나믹하게 읽히는 책이었다.

 

  정몽주에 대해 그동안 내가 너무 무지했었구나 싶었다. 내가 아는 건 이름과 단심가 정도. 글쎄 특별히 역사에 관심이 있지 않은 보통 사람들도 나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정몽주의 마지막이 너무 극적이어서 다른 것들은 거의 묻히다시피 한 건 아닌가 싶을 만큼 소설 속에 그려진 정몽주의 삶은 고려라는 죽어가는 나무에 집착하는 기존의 이미지하고는 너무나 달랐다. 물론 이건 내가 생각하는 정몽주는 그랬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신흥세력에 속하기는 했지만 '충'이라는 논리에 너무 집착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승리한 나라인 조선의 건국의 정당성을 교육받고 자란 탓일 수도 있고. 우리는 위화도 회군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곤 하니까.

 

  정몽주는 우왕, 창왕 같은 부도덕한 임금을 섬겨야하는 지식인이었다. '충'에 대한 그의 해석(아마도 작가의 정몽주에 대한 해석이겠지만)에서 유학자로서의 고민이 엿보인다. 정몽주는 비록 어질지 못한 임금일지라도 옆에서 간언을 하면서 올바로 이끄는 것이 진정한 '충'이라고 했다. 정몽주는 스스로 내린 '충'의 정의에 따라 행동했고 그 결과 죽음을 맞이했다.

 

  정몽주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은 그 혼자만은 아니었다. 비록 군사권은 이성계의 손에 모두 있었지만 정몽주는 최고권력자로서 정도전 일파를 조정에서 몰아내는 등 대반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이 군사권이 이성계에게 있는 한 그건 한순간에 뒤집힐 수 있는 불안한 시도였다.

 

  극적인 죽음을 맞기 전 정몽주의 삶은 드라마틱했다. 정몽주가 세운 전략으로 최영 장군 등과 함께 북쪽 두만강 주변의 여진족(?기억이 정확하지가 않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도 했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혼자만 살아남아서 표류하다 무인도를 발견하게 되고 지나가는 해적의 배를 만나 겨우 살아나기도 했다. 이때 정몽주는 바로 고려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의 강남에서 6개월(?)인가를 지내다 겨우 명의 허락을 받고 고려로 돌아오게 된다. 또한 경상도, 전라도 등지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들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서 그곳에서 1년 여를 지내다 오기도 한다.

 

   책상물림 유학자의 모습이 아니라 실천가로서의 모습에 더 가깝다. 이런 모습에서 정몽주의 고려에 대한 '충'이 맹목적인 충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정몽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산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역사의 주인으로 산 사람이다.  정몽주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던 아들이 조정의 일에서 물러나 학문을 가르치고 농사를 짓고 살자는  말에 조정에 남아서 끝까지 자신의 할 바를 하겠다는 말은 시대와 맞서 당당히 살아간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가 엿보인다. 이렇게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한 정치가 아나라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정치인을 요즘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몽주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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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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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복 선생의 글은 흔들림없고 단단하며, 철저한 사색에서 오는 깊이가 느껴진다. 처음 읽었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받은 인상도 그랬다. 수필류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어쨌든 자신을 고백하는 산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런 내 생각이 참 부끄러운 편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이었다. 이번에 이 책 '담론'을 읽으면서 그 글들이 어떻게 쓰여지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 이후 그의 글에 대한 믿음이 한 층 더 커졌다. 엽서 한 장에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옮기기 위해서 머리와 가슴으로 수많은 글자들을 다시 쓰고 지우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뭉클해진다. 수많은 책들이(나는 솔직히 상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쏟아져 나오는 오늘과 같은 환경에서 그의 글은 상품이 아닌 글로써, 책으로써 그 본연의 역할을 오롯이 하고 있는 드문 책이다.  

 

  책을 읽은 지 몇 주가 지나서 많은 내용들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통일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다. 통일은 통일(統一)이 아니라 통일(通一)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의 일방적인 통일 주장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당장의 통일(統一)이 아니라 통일(通一)의 상태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단계를 거친 다음에 통일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당장의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쪽박이라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작년에 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실제로 독일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통일이 찾아온다면 통일은 분명히 대박이 아니라 쪽박일 것이다. 각종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정부의 행태를 보면 갑자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돌발상황이 생기면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대처할 능력도 없으면서 통일대박이니 어쩌니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이고 섣부른 판단이다. 흡수통일을 염두에 둔 그런 발언보다는 단계적인 통일준비를 하는 게 우선 해야 할 일이다.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일방적인 베풂이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다. 우월한 입장에서 베푸는 관용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 베풂이라는 것도 잘못 행하면 우월의식의 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 잘 해주려고 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을 지배하려는, 혹은 내가 그 사람보다 낫다는 만족감을 위해서가 아닌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보다 자신이 도움을 준 사람을 더 좋게 기억한다는 것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많이 다른 사고여서 좀 놀랐고 내 안에도 분명히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섣부른 도움이나 선물 같은 건 잘 안 하게 된 것 같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작가가 인간을,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이 낯선 듯 낯설지 않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을 현대의 '호모 사케르(고대에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는 의미이다. )'라고 한 것이 그렇다. 그들 유대인은 분명히 나치의 전체주의에 의해 제물로 바쳐졌다. 그것으로 끝인가 하면 인간이 제물로 바쳐지는 상황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갈수록 더 벼랑으로 내몰리는 사회는 여전히 사람이 제물로 바쳐지는 사회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작가가 20년 동안의 감옥생활이 자신에게는 대학시절이었다고 말한 것처럼. 작가에게 감옥은 사회학 교실이었고, 역사학 교실이었고, 인간학 교실이었다. 어쩌면 인간학 교실에서 배운 것이 가장 큰 것이었지 않았을까. 20년의 감옥생활은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이었지 싶다. 좁은 감방에서 돌아눕기도 힘든 칼잠을 자면서 여름에는 옆에 누운 사람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증오하다가 겨울에는 그렇게 증오했던 바로 그 옆사람의 체온이 냉기뿐인 감방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비록 작가는 감옥에 있었지만  말그대로 온몸으로 인간과 부딪치며 산 것이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작가가 있는 감방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일본 야쿠자들이, 한쪽은 노인들이 있는 감방인데 싸움이 일어날 때의 상황이 전혀 딴 판이다. 노인들이 있는 감방에서는 끝날 것 같지도 않은 말싸움만 계속 되는 반면 야쿠자들이 있는 감방에서는 뭔가 투다닥하는 소리가 났다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감방 사람들은 야쿠자들의 싸움이 더 격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노인들의 말싸움은 논리가 있는 군자의 싸움이라고 한다. 야쿠자의 싸움은 논리 이전에 잔인한 폭력이 먼저 라는 것이다.

 

  이와 거의 비슷한 글을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본 적이 있어서 신기해 했다. 두 사람의 시각이 참 닮았구나 싶었다.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로 보이는데...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에게 햇볕은 사람을 죽이게 했지만 겨울 독방에서의 햇볕은 작가를 살 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 문장을 읽을 때도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그 햇볕이 내 몸에 닿은 듯 따뜻했다. 사람은 그런 것으로 사는 것 같다. 뭔가 거창하고 큰 것이 아니라 바로 겨울 감방 바닥에 잠깐 비추다 사라지는 햇볕 같은 온기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때에야 삶이 비로소 소중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나는 그런 사소한 것들의 의미를 잊고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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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의 대통령
미셀 팽송 & 모니크 팽송-샤를로 지음, 장행훈 옮김 / 프리뷰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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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라니 싶다가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정치인은 뭐가 다를까 싶다. 어차피 세상은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돌아가고 가난한 사람은 겨우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칭송해마지 않는 프랑스 혁명도 서민들의 피와 목숨으로 이룬 것이지만 실제로 서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없었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었고 또다른 권력자인 나폴레옹의 승리를 위해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야 했다. 프랑스혁명의 승리를 독점한 사람은 결국 자본가들이었다. 토지를 바탕으로 한 귀족계급의 권력이 자본을 가진 부르주아에게로 넘어왔을 따름이다. 이후로 이 질서에는 변함이 없고 자본을 독점한 부르주아의 권력이 점점 강대해져 가고 있을 뿐이다.

 

  프랑스의 사르코지나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같은 부도덕한 정치인을 보면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 저런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뽑히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생각을 해보면 절대 이상할 것 없는 현상이다. 사르코지나 베르루스코니 같은 권력자들은 대놓고 나는 자본가의 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다른 권력자들은 말그대로 서민을 위한 정치인척 정치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자본은 기업의 운명, 혹은 한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미국이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G1으로서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세계금융시장을 완벽히 장악할 수 있는 달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공룡과도 같은 투자기업들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금융과두권력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은행을 국유화하라.

  둘째, 신용평가기관을 국유화하라.

  셋째, 증권시장을 폐쇄하라.

  넷째, 부자들의 세금을 더 거둬라.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처방전들은 자본주의의 근본을 뒤흔드는 처방이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코웃음칠 헛소리로 들릴 것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자는 것이나 다름없는 주장으로 들린다. 70년대 후반 이래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자본의 권력은 공룡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존재가 된 지 오래다. 그 공룡을 과연 없앨 수 있을까?

 

  이 책을 보고 있으면 그들만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그 세계는 갈수록 더 단단해지고 있구나 하는 자괴감 같은 것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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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지음 / 문학사상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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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처음에는 좀 화가 났다. 꾀죄죄한 몰골의 부부가 흙먼지가 이는 시골길에서 옆으로 차를 비키는 법을 몰라서 두 손을 잡고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작가 이어령의 모습에서 식민지시절 조선인의 어리석음을 비웃던 일본인의 시선이 느껴지고, 식민사관에 젖어 있는 한국청년, 그것도 지식인 청년의 씁쓸한 시선이 느껴져서. 그 시선은 자기비하와 연민, 동정이 얽힌 그런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이런 글을 쓴 동기가 된 것도 같고.

 

  하지만 이 수필의 배경이 60년대 초반이라 생각하자 그 당시 우리나라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몰골이 얼마나 형편없었나 떠올리게 되고 , 청년 이어령도 그 답답함을 그대로 표현하자니 지금 우리가 보기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이나 문장들이 꽤 있게 된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만큼 우리가 많이 발전했구나(?) 이 표현이 정확하지 않다면 많이 달라졌구나 하고 느끼게 됐다. 생활방식도 달라졌고 사고방식도 달라졌고.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활이나 사고방식이 60년대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들은 여전히 이어령 선생처럼 자비비하, 자기멸시, 혹은 자기연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이어령선생이 글 속에 담은 모습들이 우리 조부모, 부모세대의 모습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일부는 담겨있다는 것을.

 

  그래도 우리꽃 이름에 대한 생각만은 인정할 수 없다. 우리말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니. 한자가 들어온 삼국시대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마을이름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들이 한자어로 바뀌는 동안에도 우리꽃 이름만은 우리말 그대로 살아남아서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후대에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며느리밑씻개, 개불알꽃 ,애기똥풀, 닭의장풀 얼마나 서민적인가. 심지어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지식인청년의 눈에는 이런 것들까지도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한 조선인의 모습으로 비쳐졌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그의 생각일 뿐이다. 그의 생각을 우리가 칼로 재단할 수는 없다. 조선의, 한국의 어떤 것들이 그의 눈에는 하찮아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한국인의 정신이라고 할 만큼 멋스러워 보이기도 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스타일'과 '멋'을 비교한 글에서는 참 정확한 판단이다 싶을 만큼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스타일'은 형식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멋'은 형식과 질서를 깨는 것이라는 인식은 참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달맞이꽃'을 '도둑놈꽃'이라 불렀던 것에서 밤에 노랗게 홀로 피어 은은한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달맞이꽃을 감상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던 서민의 삶을 끌어낸 것도 충분히 공감 되었다. 홀로 밤에 피어 있는 꽃은 밤에만 몰래 다니는 도둑놈을 연상시키게 할 만큼 서민들의 삶이 팍팍하고 고달팠다는 것.

 

  지금의 시선으로 판단하기보다는 60년대를 살았던 청년의 모습, 우리들 과거의 모습을 보자고 말하고 싶다. 식민지시절과  전쟁의 상처를 아직도 온몸에 새기고 살았던 60년의 우리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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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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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최근에 알게 된 작가이다. 지인이 한 달 내내 이 작가의 책만 읽었다고 해서 어떤 소설일까 궁금해서 읽게 된 책이다. 처음 한두 편을 읽었을 때는 지인의 말대로 아주 좋았고 그 다음에는 너무 평범하게 느껴졌고 마지막에는 조금 지루했던 것 같다. 이 번에 두번 째로 읽었다. 난 읽고 나면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인데 첫 페이지를 읽어보니 대부분의 단편이 기억이 났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 작가의 단편이 그만큼 군더더기 없이 선명하다는 뜻일까. 얼핏 생각하면 건조한 것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 여성작가들의 어딘지 습하고 밀도 높은 유연한 문장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그의 작품에서는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었을 때 오히려 작가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 같다. 사소한 일상에 담긴 삶의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해낸 느낌이랄까. 단편소설의 진면목이 아주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었다. 감정이 절제된 문장의 이면을 조금은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 표제인 '대성당'보다 '깃털들'이다. 대성당은 주제가 너무 분명히 드러나기도 하고 소설의 전개가 조금 평범한 반면 '깃털들'은 한 번 읽어서는 금방 이해하기 힘들 만큼 암시가 많은 작품이다. 이야기 전개는 다른 단편들과 비슷하지만 소재의 상징성나 독특한 인물들이 기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내가 초대받아간 회사 동료의 집에서 나와 아내는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공작, 비뚤비뚤 괴상하게 생긴 이빨 모형, 눈이 툭 튀어나오고 뚱뚱하며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아기를 본다. 나와 아내는 익숙하지 않은 광경에 당황하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한다. 그 집을 떠날 때까지 나와 아내는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감지한다.

 

  이 단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책 뒤에 보면 간단한 해설이 실려 있기는 하지만. 나와 아내의 눈에는 기괴하게 보이는 그들의 집이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천국이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으니까.

 

  '열'도 아주 만족스런 단편이었다. 고등학교 미술교사인 칼라일은 두 아이와 함께 버려지듯 남겨졌다. 아내가 칼라일이 근무하는 학교의 동료교사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린 것이다. 자신이 꿈꾸는 삶을 찾아서. 아내는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칼라일은 아내가 떠나버린 뒤로 엉망이 된 자신의 삶 때문에 혼란스럽다. 뚱뚱한 베이비시터는 남자친구들을 불러서 집안에서 놀고 있고 아이들은 엄청나게 큰 개와 마당에 내팽개쳐져 있다. 입은 옷은 지저분하고 얼굴도 엉망인 채로. 하지만 칼라일은 아직도 아내가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아내는 이런 상황을 알고나 있다는 듯이 전화를 걸어 함께 도망간 남자친구의 어머니댁에서 일하던 웹스터부인을 소개해준다. 웹스터부인이 집에 온 몇 주간 칼라일은 아내가 떠난 이후 처음으로 안정된 생활을 꾸려가고 동료교사와 가끔 데이트도 한다.

 

  그러다 어느날 아침 지독한 감기에 걸렸는지 열이 나기 시작한다. 몇 시간 동안 침대에서 열에 시달리던 칼라일이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아직 약하게 열이 남아 있는 상태다. 웹스터씨도 그곳에 있다. 오늘 아침에 칼라일을 직접 만나서 할 말이 있어서 집안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웹스터 부인은  더 이상 아이들을 돌봐줄 수 없다는 말을 꺼낸다. 남편의 아들이 목장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자신들의 노후를 위해서 남편의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칼라일은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그러다 웹스터부인 덕분에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동안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웹스터부인은 아직도 열이 나고 있는 그를 보살펴주며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준다. 마침내 칼라일의 이야기가 끝나고 웹스터씨와 부인은 차를 타고 떠난다.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칼라일은 이제 모든 게 끝났고 진심으로 아내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기차'은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기차를 기다리며 대합실에 앉아 있는 인물들의 배경은 전혀 알 수가 없다. 미스 덴트는 초저녁에 한 남자에게 총을 겨누었고 핸드백 안에는 권총이 있다. 미스 덴트의 맞은편에 앉은 노인과 여인은 어떤 모임에 갔다 왔다. 여인과 노인은 전혀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의미없는 말들을 주고 받고 시간이 지날수록 여인은 미스 덴트에게 이유없는 적개심을 보인다. 드디어 기차가 도착하고 이제는 객차 속 누군가의 시선으로 기차에 오르는 이들을 묘사한다. 그리곤 모두들 각자의 생각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그들의 배경을 모르고 그들도 우리의 배경을 모른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이들일 뿐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속의 일상들은 참 미국적이다.그의 단편들은 구체적인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잡힐 듯 선명하다. 그리고 너무 평범하다. '깃털들'에 나오는 인물들과 상황들은 좀 독특하긴 하지만 나머지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평범해서 주인공으로 삼기에는 부족할 정도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인물들이 삶에서 마주치는 미묘한 균열이나 비틀림, 깨달음 같은 것들을 독자가 알아차리게 만드는 것이 레이먼드 카버의 매력인 것 같다. 극적이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어쩌면 심심할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이, 삶이 대체로 심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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