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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평점 :
신영복 선생의 글은 흔들림없고 단단하며, 철저한 사색에서 오는 깊이가 느껴진다. 처음 읽었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받은 인상도 그랬다. 수필류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어쨌든 자신을 고백하는 산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런 내 생각이 참 부끄러운 편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이었다. 이번에 이 책 '담론'을 읽으면서 그 글들이 어떻게 쓰여지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 이후 그의 글에 대한 믿음이 한 층 더 커졌다. 엽서 한 장에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옮기기 위해서 머리와 가슴으로 수많은 글자들을 다시 쓰고 지우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뭉클해진다. 수많은 책들이(나는 솔직히 상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쏟아져 나오는 오늘과 같은 환경에서 그의 글은 상품이 아닌 글로써, 책으로써 그 본연의 역할을 오롯이 하고 있는 드문 책이다.
책을 읽은 지 몇 주가 지나서 많은 내용들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통일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다. 통일은 통일(統一)이 아니라 통일(通一)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의 일방적인 통일 주장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당장의 통일(統一)이 아니라 통일(通一)의 상태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단계를 거친 다음에 통일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당장의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쪽박이라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작년에 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실제로 독일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통일이 찾아온다면 통일은 분명히 대박이 아니라 쪽박일 것이다. 각종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정부의 행태를 보면 갑자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돌발상황이 생기면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대처할 능력도 없으면서 통일대박이니 어쩌니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이고 섣부른 판단이다. 흡수통일을 염두에 둔 그런 발언보다는 단계적인 통일준비를 하는 게 우선 해야 할 일이다.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일방적인 베풂이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다. 우월한 입장에서 베푸는 관용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 베풂이라는 것도 잘못 행하면 우월의식의 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 잘 해주려고 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을 지배하려는, 혹은 내가 그 사람보다 낫다는 만족감을 위해서가 아닌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보다 자신이 도움을 준 사람을 더 좋게 기억한다는 것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많이 다른 사고여서 좀 놀랐고 내 안에도 분명히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섣부른 도움이나 선물 같은 건 잘 안 하게 된 것 같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작가가 인간을,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이 낯선 듯 낯설지 않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을 현대의 '호모 사케르(고대에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는 의미이다. )'라고 한 것이 그렇다. 그들 유대인은 분명히 나치의 전체주의에 의해 제물로 바쳐졌다. 그것으로 끝인가 하면 인간이 제물로 바쳐지는 상황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갈수록 더 벼랑으로 내몰리는 사회는 여전히 사람이 제물로 바쳐지는 사회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작가가 20년 동안의 감옥생활이 자신에게는 대학시절이었다고 말한 것처럼. 작가에게 감옥은 사회학 교실이었고, 역사학 교실이었고, 인간학 교실이었다. 어쩌면 인간학 교실에서 배운 것이 가장 큰 것이었지 않았을까. 20년의 감옥생활은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이었지 싶다. 좁은 감방에서 돌아눕기도 힘든 칼잠을 자면서 여름에는 옆에 누운 사람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증오하다가 겨울에는 그렇게 증오했던 바로 그 옆사람의 체온이 냉기뿐인 감방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비록 작가는 감옥에 있었지만 말그대로 온몸으로 인간과 부딪치며 산 것이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작가가 있는 감방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일본 야쿠자들이, 한쪽은 노인들이 있는 감방인데 싸움이 일어날 때의 상황이 전혀 딴 판이다. 노인들이 있는 감방에서는 끝날 것 같지도 않은 말싸움만 계속 되는 반면 야쿠자들이 있는 감방에서는 뭔가 투다닥하는 소리가 났다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감방 사람들은 야쿠자들의 싸움이 더 격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노인들의 말싸움은 논리가 있는 군자의 싸움이라고 한다. 야쿠자의 싸움은 논리 이전에 잔인한 폭력이 먼저 라는 것이다.
이와 거의 비슷한 글을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본 적이 있어서 신기해 했다. 두 사람의 시각이 참 닮았구나 싶었다.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로 보이는데...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에게 햇볕은 사람을 죽이게 했지만 겨울 독방에서의 햇볕은 작가를 살 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 문장을 읽을 때도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그 햇볕이 내 몸에 닿은 듯 따뜻했다. 사람은 그런 것으로 사는 것 같다. 뭔가 거창하고 큰 것이 아니라 바로 겨울 감방 바닥에 잠깐 비추다 사라지는 햇볕 같은 온기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때에야 삶이 비로소 소중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나는 그런 사소한 것들의 의미를 잊고 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