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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봄
심상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심상대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작품은 굉장히 미학적이라는 느낌이었다. 소설에 대한 미학적 완성도에 집착하는 작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도 그런 것 같다. 몇 달 전에 읽어서 정확한 줄거리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굉장히 독특한 소설이라는 인상이었다. 배경은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옛스러운 분위기지만 주제는 시대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이 소설은 이상향 혹은 디스토피아에 관한 소설일 수도 있고, 언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는 소설일 수도 있고, 예술 혹은 소설에 관한 소설일 수도 있는 다양한 층위를 지닌 소설이다.
또한 이 소설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을 떠올리게도 하고, 올더스 헉슬리의 '멋신 신세계'와 겹쳐지기도 했다. 한국인이 쓴 유토피아는 아마도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우리 마을의 기원은 550년 전 병자사화의 참살로부터 멸문을 피해 첩첩산중으로 숨어든 어느 사육신의 집안의 어린 오누이와 늙은 종복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외부와 단절된 채 그들만의 세계를 이루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6·25 전쟁 때 우연히 군인이 흘러 들어오기도 했다. 우리 마을은 이름이 없다. 금잠의 의문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을에도 이름이 있지 않을까.
우리 마을은 아들, 아버지 등 혈연에 대한 말이 없으며 일 년에 한 번씩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살 수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정씻기 술이라는 것을 마시고 예전의 기억을 씻고 다른 사람과 다시 일년을 시작한다. 또 정월 큰보름날에는 광인으로 지목된 젊은이를 화형시키는 화형식이 벌어진다. 성과 재산의 공동 소유라는 마을의 질서를 깨뜨리고 야만으로 회귀하려는 사람들의 습성을 막기 위한 의식이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과 그의 젊은 부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관이 기록하는 책의 한 페이지가 찢겨 나가 있는 것이 발견된다. 죽은 사관을 대신하여 15세의 젊은 금잠이 사관을 맡는다. 올 봄은 광인이 유독 많이 출몰한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광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사람을 닮은 소금기둥을 만드는 광인이 나타난다.
500년 전 우리 마을 사람들은 옻나무와 뱀을 섬멸한 것을 기념하여 가운데마을 한가운데에 설중매 나무를 심었는데 120년 전 어떤 광인이 자신의 아이와 아내와 헤어질 수없다는 생각에 빠져 설중매 나무에 불을 질러 함께 분신했다. 그때 다시 심은 설중매 나무가 마을 한가운데서 꽃을 피웠다. 화담끝은 설중매 꽃더미를 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에 황홀했고 자신도 훨훨 불타고 싶다는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화담끝이 마침내 도끼로 설중매나무를 쓰러뜨리자 땅속에서 뱀이 쏟아져나왔다.
광기의 절정이다. 뱀은 곧 억눌려왔던 욕망의 분출이다. 마을 여기저기서 뱀이 출몰한다. 화담끝이 광기에 사로잡혀 뱀의 무리 한가운데서 춤을 추는 장면이 이 소설의 절정이다. 유려한 언어구사와 묘사에 능숙한 작가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장면이다.
이 소설은 사관과 그 젊은 부인을 누가 살해했는지, 무엇 때문에 살해했는지가 사건을 이끌어가는 핵심이지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책을 덮고 나면 혼란스런 꿈에서 겨우 깬 것 같은데 그 꿈이 기억날 듯 말듯 아득해진다.
이 사건의 결말은 묻어 두고 싶다. 처음에 예상했던 것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결말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인지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광인으로 지목되어 정월 큰보름날 열리는 화형장의 불꽃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추측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