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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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기분의 영도

 

기분stimmung. 기분.

 

 

기분은 무엇인가. 기분은 감정, 정서, 느낌과 어떻게 다른가. 개념들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물어볼 수 있다. 명확히 구분이 가능한지 물어볼 수도 있다. 그 명확한 구분이 폭력적이지 않은지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그런 기분이 있다. 그런 기분. 언어의 칼을 들이대면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아 '대명사'로 에둘러 설명할 요량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남근 중심- 팔루스 - 로고스 중심주의 뭐라고 불러도 좋다. 그런 느낌을 피하고 싶다는 것만 전달되면 된다.

 

이번엔 느낌. 느낌.

 

 

기분과 느낌은 어떻게 다른다.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을 시도하는 것보다 일상적 언어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면 좀 더 기분과 느낌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느낌이 든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그와 만나기 전, 이를 테면 약속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만나서 무엇을 할지 생각하기만 해도 바보 같은 웃음이 실실 흘러나온다.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웃음은 부서진 발음이라고 적었던 것 같다. 상투적인 언어의 질서를 뒤틀린 균열에서 웃음은 흘러나온다. 새어나온다. 논리의 그물을 포섭되지 않고 삐져나온 감정의 생동. 그런 웃음이 나온 순간 우리를 찾아오는 건 좋은 기분일까, 좋은 느낌일까.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런데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무게추가 좀 더 기우는 쪽은 기분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비가시적이고 비실체적이지만 느낌 쪽이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다면 기분은 희미하지만 넓게 퍼져 있는 안개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괴팍하게 나눠본다면 느낌은 액체이고, 기분은 기체이다. 느낌이 좀 더 직접적인 행동에 따른 반작용, 입력에 따른 출력으로 생성돼 농도가 짙다면 기분은 반대로 행동-사건에 대한 예감,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것 같은, 그래서 직접적 구체적 행동/사건에 대한 느낌이 아닌 주변 공기에 대한 느낌이라서 농도가 묽다. 

 

이 어설픈 정리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자명하지만 더 나은 실패를 위한 초석을 놓는 데 의의를 두고 이렇게 정리해보자.

너를 기다리는 동안, 만나러 가는 동안 드는 건 좋은 기분이다.

네가 입은 옷이 너와 정말 잘 어울렸을 때, 그래서 네가 이전의 모습을 모두 지워버릴 만큼 사랑스러울 때, 신기하리만치 얘기가 쉴 새 없이 이어질 때 드는 건 좋은 느낌이다.

 

기분이 부사라면, 느낌은 형용사? 

나는 내일 기분이 좋을 것이다.

느낌은 너와 나 사이 상냥한 무릎의 각도에서 나온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다 읊조리다 보면 좋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다.

너는 이미 일종의 기분이 되어버렸다. 너는 이미 날씨가 되어버렸다. 너는 내 마음의 지형을 주조한다. 너는 이 세상에 없는 기후이다. 등등.   

 

1 기분은 어떻게 오는가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시인 이성복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문제는 형식. 화살처럼 한 점을 뚫고 지나갈 기세로 강렬하게 꽂히는 느낌이 있는가 하면, 비에 젖은 봄의 저녁공기 같은, 가로등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빗방울에서 느껴지는 온기 같은, 어제 같이 바람이 매서운 날 어묵국물이 뿜어대는 팔팔한 연기 같은 느낌이 있다. 느낌적인 느낌. '~~'적인 것이란 표현이 유행처럼 많이 쓰이고 있는데 그만큼 언어라는 틀을 벗어남으로써, 그 틀에서 삐져나오면서 매순간 자신을 재정의하는 존재를 붙잡기 위한 시도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느낌적인 느낌은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기분적인 기분이란 표현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걸 보면 역시 기분은 좀 더 흐릿하고 희미하고 큰 단위여서 한 번에 전체를 포착하는데 어려움이 따르지 않나 생각된다.

 

2014.6.7 시민행성에서 세월호 집담회에 참여했다. 철학자, 시인, 평론가 등과 일반 시민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얘기해보는 시간이었다. 거기서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도무지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래도 이런 자리에 참석해 조금씩 기분이 생기는 것 같다.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온갖 문자매체에서 세월호 관련된 글을 읽었지만 기분은 오지 않았다.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세월호 사건의 서사적 과정 파악의 부재와 나 자신에 함몰되어 있었다는 점. 한 마디로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구조과정 속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나쁜 놈/년'인지, 누가 아이들을 죽였는지 알 수 없었다. 선장? 배에 탄 승무원들? 유병언 회장? 무능한 해경? 대대적인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고 허위보도한 언론? 언론에게 그렇게 보도하라고 입김을 넣은 검은 입? 위기상황 속에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7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대통령? 모르겠다. 몰라서 슬픔도 모호하다. 어정쩡한 슬픔. 슬픈 일인 줄 알겠는데 왜 슬퍼야 되는지 스스로에게 설명이 안 되는 슬픔. 멜랑콜리적인 것. 슬픈 느낌이 아니라 슬퍼야 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슬퍼하지 못하는. 잘 안 슬픈. 잘 안 슬퍼서 잘 지내는 것 같은.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잘 지내지 못해서 슬픈, 슬픈데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게 슬픈, 물음표 같은 슬픔.

 

느낌은 

즉각적으로

우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오고

가버리곤 했다.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김소연, 그래서_수학자의 아침)

 

9월 24일 북촌창우 극장. 이 두 마디면 됐다. 시의 힘, 낭독의 힘, 슬픔의 힘. 그 말과 소리와 느낌엔 마술적, 주술적, 기적적 힘이 있었다. 그러니까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기분은.

 

1월 31일 대학로 이음 책방에서 책을 읽다 304 낭독회 낭독문이 배달된 걸 보고 시간 맞춰 낭독회로 자리를 옮겼다.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시민행성에서 강의를 들었던 시인 선생님이 내게 글을 써서 낭독에 참여해보라고 권유하셨다. 선생님이 애용하는 '마음을 뒤척여보라는' 말과 함께. 뒤척여보는 척하다 보면 뒤척여지기도 한다. 얻어걸리는 것이다. 그렇게 느낌으로 써낸 글을 낭독하고 내 안의 부채감, 죄의식이 씻겨질까 두려워 그 자리에서 답변을 드리지 못했다. 무감하고 무정하고 무기력한 내 모습을 감추려 한껏 과장된 포즈를 문인들이 득실거리는 낭독회에서 처참히 들키고 발가벗겨 질까봐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기분을 모으고 있다고 말해두고 싶다. 느낌들이 모여 하나의 기분을 이루길, 또 그 기분들이 모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 기분을 증폭시킬 수 있길, 그 슬픔과 애도가 하나의 정치학으로 발명될 수 있길 기다리고 있다. 다가가고 있다. 한겨레에 연재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편지를 읽는 시간, 물과 차가움, 기다림과 배신에 세월호적 감각을 대입해보는 것, 이미 흘러가버린 어둠의 시간을 불러내기 위한 몸부림, 뒤척임을 피하지 않는 것, 아니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것. 한겨레에 편지보다 더 자세하게 서술된 고통과 그리움과 슬픔과 사랑으로 점철된 <금요일에 돌아오렴>을 읽고 있다. 기분을 내고 싶어서 읽고 있다. 그렇게 불러낸 기분이 모이고 모여 빠져들 수 있을 만큼, 젖어들 수 있을 만큼의 강을 이루면 크게 한 번 쉼호흡하고 잠겨보리라. 작년 2월 타국의 수영장에서 발버둥처럼 필사적으로 쓸 순 없겠지만(필사적이고 절박한 글쓰기는 카프카에게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일 것이다) 필사적으로 기분 속으로 잠겨보기 위한 시도는 해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애도의 기분을 내는 글이 아닌 기분에 젖어든 글, 읽는 사람의 기분까지 젖어들 수 있을 글이 나오면 그때 그 자리에 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애도의 유효기간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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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멜랑콜리 Trauer und melancholie

 

 이번 시간에 프로이트의 저명한 애도와 우울증 논의를 바탕으로 강의가 이뤄졌습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힐링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뗐습니다. 힐링을 '하는' 주체는 무의지적, 무의도적으로 우월, 예외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상처받은 영혼에 다가서려 해도 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 아이러니가 힐링의 딜레마라고 했습니다.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사랑을 뜸뿍 받으며 자란 아이가 풍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도도 높고, 받은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높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 고통에 무감각해질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결정적'으로 받게 된 세월호 유가족들. 

 

 선생님은 자식의 죽음에 대해 가슴에 '묻는다'는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너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 또 너를 만져보고 싶다. 한겨레 신문에 유가족들의 편지가 실리는데 저도 거기서 너를 한 번이라도 만져볼 수 있으면 좋겠어, 라는 표현을 본 기억이 났습니다. 삶도 죽음도 아닌 비식별역에서 묻혀 있는 9명의 실종자들, 이제는 만져볼 수 없는 아이들에 대한 접촉욕구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감각성과 접촉성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자문했습니다. 접촉이 단절된 채 오직 시각으로만 향유하는 온라인의 세계에 빠져 살고 있고,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포르노그래피의 문제도 양성화되지 않았을 뿐 음지에서 많은 문제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중, 고등학생들 중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의 야동중독에 빠진 아이들이 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납니다). 서구의 역사는 시각의 역사라 해도 될 만큼 명료하게 사물/자연을 파악해 자연을 인간화, 도구화해 통제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는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오히려 눈을 찌르는(부정하는) 결말을 통해 눈의 이성이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았음을 승인하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는 관점을 보여줬습니다.

 

 본격적으로 프로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는데요. 프로이트의 말하기-글쓰기에서 두드러지는 아이러니를 활용하는 방식에 유념할 것을 지적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임상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결론을 도출해내긴 했지만 자신이 진찰한 집단 내에서 도출된 결론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고 스스로를 부정해나가는 방식의 외교적 글쓰기에 능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환자 한 명만으로도 자신의 결론이 무너질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프로이트의 글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둘을 연결하는 접속사 'und'(영어의 and)에 주목했습니다. 이 등위접속사는 양가성을 띠는데 1 애도와 멜랑콜리를 대치적으로(versus의 관계) 보고자 함을 드러내고, 2 둘의 동일한 영역이 존재함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온 부분이 재밌었는데요. 환자는 거짓말을 하고, 의사는 탐정 같이 환자의 거짓말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작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환자는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돌려말하거나 거짓말을 하는데, 거짓에 거짓을 계속 쌓아가다 보면 말실수가 발생하게 되고 의사는 말실수를 통해 우회적으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애도와 멜랑콜리에 대해선 저번 글에서 이현우 선생님이 쓴 <애도와 우울증>을 인용하면서 개념 정리를 하고 넘어갔는데요. 이번 시간의 설명이 간명하게 직관적인 느낌을 전달해줘서 부연합니다. 애도는 세상이 텅 비어 있는 것이지만 멜랑콜리는 내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애도는 주체가 있지만 멜랑콜리는 주체가 없다. 멜랑콜리가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리비도나 내면의 에너지가 외부를 향해 있어야 하는데 내부에 갇혀 있게 되면서 주체가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이론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는데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미분리 상태에서 분리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분리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최초의 상처, '열린 상처'라고 했습니다.


 애도에는 주체 '나Ich'도 있고, 대상도 확실하기 때문에 애도 작업(Trauer Arbeit)이 이뤄질 수 있지만, 멜랑콜리는 대상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사랑의 에너지가 슬픔 자체로 가게 된다. '나는 내 슬픔을 사랑한다' 내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내가 사랑했다고 믿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애착 관계의 견고성, 확실성이 제대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작업Arbeit' - 난제를 이성적으로 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애도는 상실한 대상1에서 새로운 대상2로 넘어가면서 삶의 다음 단계로 진보progress하지만('새로운 사랑') 멜랑콜리는 퇴행Regression한다. 이 퇴행이 향하는 곳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멜랑콜리커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자기에게로 도피한다. 대상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길/방향을 잃은 사랑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스스로에 침잠하게 되는 것이다. 원초적 나르시시즘,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의 구강기(구순기)라고 할 수 있다. 


'남자는 뱉어낸다, 여자는 삼킨다' 


여기서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이 존재하는데 내가 죽은 자를 먹었으나 결국 죽은 자에게 먹히는 격이 된다.  


 이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은 원초적 나르시시즘 -구강 단계-카니발리즘에 대한 설명으로 보충될 수 있다. 구강단계에서는 타자를 자기화하려 한다. '상상적 자아를 먹고, 상상적 자아에게 먹힘' 자/타의 미분리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애니미즘 역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나와 만나는 모든 사물/자연에 투사하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일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을 먹고, 자연에 먹힌 사람'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은 앞서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분리 상태로의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입/통과한 것을 반대로 보면 그 원초적 세계(어머니의 자궁/탯줄)에서의 추방으로 볼 수 있다. 상징계, 기호 세계로의 진입은 분리의 고통을 수반한다. 오정희는 자신의 작품에서 바깥 세상으로 나오기 직전의 아기의 입을 빌어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세계로 나가지 않으려 했으나 엄마가 밀어냈다. 그물에 걸려 들었다. 더불어 카프카의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도 호출되었다. 이 분리고통은 의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육체에 직접적으로 새겨진다. 인간은 누구나 통과제의를 고통 없이 완벽하게 통과해낼 수 없기 때문에 '열린 상처'를 갖게 된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 <태어나기의 망설임> 우리는 태어나기를 망설인다. 우리를 옭아맬 그물에 걸려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텨보지만 태어난 이상, 세상에 '던져진' 이상 그 세계의 코드-시스템-언어를 습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이런 운명을 진정 사랑할 수 있을까?) 


 1,2강에서 멜랑콜리의 대기권에 있다는 표현이 3강에서는 오늘날 우리는 모두는 나르시시트가 되었다로 변주되었다. 공동체가 붕괴되고 타자와의 만남이 어려워진 시대에 길 잃은 사랑이 가엾는 나 자신의 '빈 집'에 스스로 갇히게 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빈 집에서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혹은 이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읽어보면 어떨까. 내 사랑이 갇혀 있는데 그 집은 여전히 비어 있다는 것. 이런 빈 집의 사랑을 내가 텅 비어 있다는 멜랑콜리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길 잃은 가엾은 사랑이 빈 집을 만들어냈고, 그 빈 집에 사랑이 갇혀 영영 갇혀버린 꼴이라 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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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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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작가, 그러니까 아직도 젊은 작가, 혹은 언제까지나 젊은 작가일 것 같은 '소설 쓰는' 김연수가 쓴 에세이. 도서관에서 2명씩 예약이 꽉 차 있는 바람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던 <소설가의 일>을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한 번에 쭉 읽을 수 있었다.

 

 

1. 도너츠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된 글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연재 당시까지만 해도 김연수 작가에 대한 애정이 지금과는 영 딴판이어서 연재글을 챙겨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너츠 서사론'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이때 당시 아직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청춘의 문장들>을 읽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김연수와 빵이 얼마나 각별한 사이인지[뉴욕제과점] 미처 생각지 못했다). 도너츠 서사론이 뭐냐 하면 소설의 문장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직접 말해서는 안 되며, 말하고자 하는 것을 중심에 구멍으로 비워두고 그 주변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의 문장은 모두 보여주기를 위한 묘사의 문장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며, 직접 말하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설명의 문장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요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혹은 다르게 말함으로써 일상의 어법과 다른 어법, 소통을 꿰하는 것이 문학의 언어라는 점이다.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해 미적 효과를 노리는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 기법과도 비슷한 맥락이 있다. 도너츠의 가운데 텅 빈 공간은 독자에 의해 채워져야 하는 창조적 독서의 장일 것이다. 낯익은 언어로는 독자의 의식에 어떤 변화나 균열을 만들어낼 수 없다. 낯선 언어는 우리가 평소에 잘 안 쓰는 고어古語나 전문용어, 은어의 사용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낯선 매칭 속에서 만들어진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2. 토고( 나라 이름 말고) 

 

 여기 소설가 지망생 K가 있다. 아마추어 소설가라 불러도 좋다. 그가 쓰고 싶은 글은 소설이다. 그가 그 동안 읽어온 소설 같은 글을 그는 쓰고 싶어 한다. 읽은 이의 가슴을 뛰게 하고, 상투적 인식의 패턴을 뒤흔들리고, 한마디로 '끝내 주는' 소설을 쓸 마음으로 흰 종이를 채우지만 그는 글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글이 읽으면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토고'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말한다. 누구나 토고를 쓴다. 중요한 건 계속 실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토고를 넘어 좋은 소설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왜 토고는 토고인가 짚어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소설을 쓴다고 앉아 있지만 우리의 몸은 아직 소설을 쓸 몸이 되지 않아서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의식은 깊은 철학적 통찰과 생생한 감각으로 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철학과 감각이 몸 밖으로, 그러니까 글로 흘러나오기까지 일상적 의식의 관성에 물들어 있는 의식을 탈색할 시간이 필요하다. 뜸 들이기. 이 작업은 쓰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빨간책방에서 김중혁 소설가가 잠깐 말해준 정영문 소설가는 침대에서 머리로 다 쓰고 나서 글로 옮긴다고 하지만 그건 그가 '프로' 소설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추어 소설가는 황석영 소설가의 말처럼 엉덩이로 쓰는 시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엉덩이로 소설적 문장을 쓸 수 있는 몸에 이르는 시간이 단축됐을 때 프로 소설가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3. 어휘 사전

 

 세계를 바꿔야 한다. 소설에서 이것은 좋은 문장이 아닐 가능성이 좋은 문장이 가능성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 문장이 관념적이기 때문이고, 관념적인 문장이 소설의 문장으로서 나쁜 이유는 아까 말한 대로 상투적 인식에 균열을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철학(로쟈 이현우의 표현에 따르면 철학적 로고스에 치중된 철학)이나 사회과학의 논리적 문장과 다르게 소설의 문장만이 가질 수 있는 구체적 감각성, 감각의 물질성/직접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물어보자. 세계를 바꿔야 한다는 문장에서 세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속해 있는 국가? 지구? 내가 속해 있는 국가라고 했을 때 국가를 바꾼다는 건, 요즘 정부에서 자주 쓰는 표현에 따르면 국가를 '개조'한다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담뱃값과 자동체를 인상하는 것? 이 변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고, 흡연자들이 금연하도록 만들었기(강제했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만 담뱃값을 인상하자 라는 문장으로 충분한 것을 굳이 세계를 바뀌자는 식으로 포장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세계를 바꿔야 한다는 문장의 결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이런 문장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황현산 평론가의 문장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잘 표현된 불행>의 서문?). 어차피 정확하게 옮겨내지 못할 거 내 식대로 윤색을 감행하기로 한다(그러면 출처는 왜 밝힌 거지?).문학의 문장은 정치가의 연설문처럼 '뽀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희망찬 미래를 약속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고통스럽게 만드는 불편한 구석이 있다. 이를 테면 아버지와의 갈등이 있었던 사람이 카프카의 <변신>, <선고(판결)>이나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시편을 읽는다는 것은 묻어두었던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거나 진배 없는 자학적 행위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통스런 대면이 이뤄지고 나면 내면의 힘이 조금 붙은 느낌을 어렴풋이 받기도 한다. 치유라고 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상대방/타자를 조금이나마 '납득'하게 되면서 자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유령 같은 어둠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자신이 쓸 수 있는 어휘 사전에 뒤쪽에 있는 단어와 문장을 구사할 것. 이 대목을 읽으면서 문학은 정확한 말하기/글쓰기의 욕망이라고 말한 신형철 평론가가 생각났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해설을 쓰기도 했고, 문학동네 팟캐스트 초반에 게스트로 '소설 쓰는' 김연수를 초대했으며, 아트앤스터디에서 진행한 서사윤리학 수업에서 김연수 작가를 다루는 등 공통분모가 심심찮게 보이는 한 쌍의 정확한 남자들. 

 또 하나 소설을 소설의 인물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개고생하는 이야기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신형철 평론가의 몰락의 에티카 서문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문학은 실패한/몰락한 자들의 이야기이며, 몰락 이후의 첫 번째 표정에 대한 이야기이다(이것도 읽은 지 꽤 돼서 정확성도 크게 떨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ㅜ). 전부인 하나를 위해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자의 이야기. 이 문장에서 영감을 받아 국카스텐은 <깃털>이란 곡을 만들었고(EBS스페이스 공감 곡 설명 참조), 최근에 발매된 2집에 깃털이 포함되어 있다. 

 대가끼리는 통하는 것일까? 아마 김연수 소설가, 신형철 평론가 모두 자신을 대가로 칭한다면 혀를 내두르며 당치도 않다는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정확함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열쇠일 것이다. 

 

 소설가의 일. 소설 쓰는 김연수의 소설창작론 강의. 이 강의를 듣고 많은 아마추어 소설가들을 더 많은 토고를 쏟아내기를, 그렇게 한 문장에서 다른 한 문장으로, 거듭 쓰며 신인작가로 발돋움하기를 응원해본다.

 

출판사 서평

“매일 글을 쓴다. 그리고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 문장에 가슴이 뛰다면 당신은 충분히 소설을 쓸 자질이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 쓰는 사람이 소설가라는 간단하면서도 간단하지 않은 사실을 알려준 '젊은 작가'가 더 많은 술을 마시며 더 많은 글을 남기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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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담론화가 진행되었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고대 - 중세 - 르네상스 - 바로크 - 계뮹주의 - 근대



고대엔 과학적, 물질적으로 멜랑콜리를 해명하고자 한 히포크라테스와 정신적으로 해명하고자 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습니다.

멜랑콜리는 '은혜로운 광기'로 설명되었습니다. 위대한 학자/예술가는 멜랑콜리에 걸릴 수밖에 없고, 그 멜랑콜리에 의해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멜랑콜리는 상류층의 특권적 질병이었고, 노예-여자는 감히 멜랑콜리에 걸릴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멜랑콜리는 굉장히 정치적이면서 계급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세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주지주의적 성향이 더 짙어졌습니다. 별의 움직임을 통해 우주의 운행을 읽어내고자 했던 점성술과 주로 남성 수도자들이 걸리는 영혼의 문제로 설명하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점성술은 별의 움직임을 통해 우주의 운행을 읽어내고자 했고, 멜랑콜리는 토성Saturn과 연결지어 설명했습니다. 수전 손택은 토성의 네 가지 특성 (제일 멀다, 느리가, 차갑다, 무겁다)을 바탕으로 발터 베냐민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제일 멀다 : 메시아니즘/ 느리다 : 산책자/ 차갑다 : 놀라운 사유력/ 무겁다 : 하강 판타지(서 있는 것을 쓰러진 폐허로 봄).

남성 수도사들이 멜랑콜리에 걸리면 죄악시했는데, 신앙이 부족해서 사탄에 홀렸다는 식으로 멜랑콜리에 걸린 원인을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 향해 있어야 할 정신이 다른 지상적인 것에 한눈 팔고 있으니 허영이 많아지고, 나태해지고, 무기력해진다는 식의 설명으로 고대에서 신화화된 멜랑콜리는 중세에 와 저주화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르네상스엔 다시 멜랑콜리에 대한 찬양론으로 상황이 급변합니다. 모든 천재는 멜랑콜리의 아들들이란 식으로 말이죠(여전히 딸들은 멜랑콜리에 걸릴 수 없다고 본 것 같습니다).



바로크 시대는 어떨까요? 바로크는 시기적으로 15~16세기에 해당하는데 이때 전쟁이 많이 발발하기도 했고,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궁정에서 상연된 비애극-애도극Trauerspiels은 비극tragedy란 장르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비극은 대단원에 이르러 승화가 이뤄지지만, 비애극은 승화가 일어나지 않고 난장판으로 마무리됩니다. 바로크는 멜랑콜리의 컬트화가 이뤄진 시기였다고 합니다. 발터 베냐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란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집필한 저서에서 문학적으로 저평가받았던 비애극에 주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니 좀 더 이해가 됐습니다. 또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인물들을 모두 멜랑콜리커로 설명하는 부분이 재밌어 햄릿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작년 말에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진행한 세월호 포럼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이동연 교수님도 햄릿을 읽자는 얘기를 해주셔서 이날 셰익스피어의 이름이 좀 더 깊게 울렸던 것 같습니다)



파스칼의 팡세에 대한 설명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저 우주의 진공이 나를 전율케 한다' 아무 것도 없는, 가공할 정도의 절망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희망/신을 찾고자 함. 끊임없이 신을 갈구하지만 대답 없는 신.





바로크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멜랑콜리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의사 리처드 버튼은 Anatomy of melancholy란 저서를 출간하며 히포크라테스 이후 끊긴 멜랑콜리에 대한 유물론적, 병리학적 탐구의 부활시킵니다.



계몽주의 시대부터 멜랑콜리에 대한 병리화 작업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애도와 우울증 모두 대상의 상실에서 촉발되는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애도는 사랑을 대상을 찾기 위한 건강한 앓음이라면 우울은 자기 자신 속에 매몰돼 있는 부정적 질병으로 대조적으로 설명됩니다. 여기에 대해 이현우 교수의 저서 <애도와 우울증>에 내용을 덧붙입니다.



애도와 우울중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애도의 경우에는 일단, 현실성 검사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난다. 하지만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상실로 전환된다. 그리고 대상과 자아 사이의 갈등은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와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변모되고, 이것은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으면서 급격한 자기애의 상실, 곧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이러한 애도와 우울증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애도는 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무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된다. 둘째, 애도는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나르시시즘, 즉 자아 형성과 관련된다. 섯째, 애도와 달리 우울증에서는 애증의 양가감정이 자아 내부로 투사되면서 사랑의 대상을 자아로 바꾸고, 자신의 자아는 초자아의 역할을 하면서 사디즘을 발현시킨다.



(p28~29)



루터와 칼뱅주의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루터는 청교도적 자세로 신과의 소통을 중시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도덕-윤리가 판치는 사회에서 신에 대한 은총을 추구하기 위해 경건주의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에 따라 현실에 대한 도외시가 이뤄졌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의 신에 대한 믿음 속에서'만' 찾으려고 하니 먹고 사는 문제마저도 제쳐두고 신앙생활에 몰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칼뱅주의는 예정론이란 프레임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인간을 구원할지 안 할지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또한 직업-노동도 신앙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계몽주의 시대에 멜랑콜리에 대한 병리화 작업은 왜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계몽주의가 이성의 추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사유할 수 있다는 믿음. 하지만 사유의 끝/종착지는 불가능(성)이기 때문에 이성이 주도한 멜랑콜리의 담론화 작업에서 배제되고 억압되고 담론화되지 못하고 추방된 어둠의 자식들, 입이 없는 것들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것의 회귀the return of the repressed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최근에 읽은 이성복 시인의 대담집 <끝나지 않는 대화>에서 이성복 시인의 필생의 문제로 '불가능'을 상정해 천착하는 걸 읽고 멜랑콜리와 불가능의 관계를 좀 더 파고들어가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설명해주신 부르주아 부분은 개인적으로 정말 무릎을 치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이론을 통한 현실문제에 대한 분석이 탁월하게 느껴졌습니다. 초창기에는 부르주아 시민들이 건강했다고 합니다. 경제적, 정치적 의미로 건강했던 부르주아들은 건강한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사유재산-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이 있었다고 합니다(사회로 환원하는 식의). 하지만 자본주의가 진행됨에 따라 개인의 도덕은 지속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쁘띠 부르주아는 오직 부를 축적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고, 정치에 대해 무관심해지면서 탈정치화됩니다. 부의 축적을 통해 행복이란 이념-이상향에 도달하려 하지만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만족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소시민들은 권태에 빠지고 불행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재벌은 왜 골목상권까지 침투-침략하는가에 대해 그것이 시장 자본주의의 메커니즘, 생리 자체라는 설명, 그렇게 끊임없이 더 많이 추구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소위 말하는 '무한경쟁'이라는 걸 깨닫고 성장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호출하고 있는 현 정부에 대해, 아니 자본주의의 대기권 안에 있는 우리 세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 바깥-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단절된 채 내면에 스스로 만들어낸 행복 이념을 골몰하는 사람들. 이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이 곪아 끝내 악성종기로 터져버리는 양태 중 하나라 히스테리라고 했습니다(조현아 부사장은 왜 이렇게 히스테리컬한가 라는 저번 시간의 말씀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네요). 프루스트의 소설 살롱 여인들과 프로이트가 진찰한 여성 환자들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는데요. 사회진출이 금지된 여성들에게 좀 더 첨예하게 나타난 겁니다. 이렇게 내면으로의 도피 말고 자연으로의 회귀도 있었는데 이 역시도 현실에 대한 외면이라는 점에서 결함이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청년 세대에 짙게 깔린 무기력도 이런 맥락에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업(생존)을 위해 학력과 스펙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한 극단에는 잉여들이 양산되고, 한 극단에는 경쟁을 통한 차별은 정당하다고 말하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 나오는 경쟁시스템에 과잉으로 적응한 괴물들도 만들어지는 극단적 양상. 강의 마지막에 세월호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개인적으로 속칭 일베, 일간베스트에 대한 이야기도 멜랑콜리의 차원에서 다뤄주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명한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가 세워졌는데 이 자유의 불가능성과 존재의 무의미성이 엘리트 계급에 국한돼 있던 멜랑콜리의 일반화를 야기했다고 합니다. 쁘띠 부르주아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냉소적 우월성'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냉소적 우월성은 보통 일반인보다 더 많이 자유를 추구하는 지식인, 교양인, 예술가들에게 나타나는데, 그들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난 멜랑콜리해' 자기승인을 하고, 발버둥치고 저항하는 이들을 밑에서 내려다봄으로써 심리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점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환멸하고, 의미 운운하고 진보 운운하는 이들을 냉소합니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야, 생은 무의미하고 자유는 불가능해.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고고하게 자신을 지키는 냉소적 우월주의자로 김영하 소설가를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함돈균 평론가의 평론집 <예외들>에서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 투영된 작가의 정치의식, 냉소적 포즈를 비판하는 대목이 기억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청년 운동, 문화 운동을 일으킨 대표적 사례로 수전 손택을 거론했는데 그녀 역시 현실도피적 행위라는 비판을 피하진 못했습니다.



애도불가능의 사회. 선생님은 세월호에서 침몰한 아이들이 마지막에 본 것은 무엇일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구해줄 거라 굳게 믿었고, 탈출하기 위해 창문을 절박하게 두드리고 있는 아이들을 버려두고 빈손으로 돌아간 해경을 보면서 그들이 무엇을 알게 되었을지에 대해.

http://na-dle.hani.co.kr/arti/issue/7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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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와 철학. 이 조합에서 처음 연상되는 건 발터 벤야민/베냐민(베르그손처럼 베냐민으로 표기가 정착될까요?)이었습니다. 김진영 선생님이 이 수업을 듣게 된 동기를 물으셨을 때 저는 발터 베냐민에 관심 있다고 대답했지만 아트앤스터디 팟캐스트를 통해 조금이나마 들어본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강의를 굉장히 좋았고, '풀버전'으로 맛본 이번 강의 역시 기대를 뛰어넘어 굉장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어떤 분이 김진영 선생님과 이번 강의 주제가 딱 들어맞는다는 논평을 해주셨는데 수업을 듣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어떤 강의였는지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학기에 진행되는 멜랑콜리와 철학, 다음 학기에 진행될 예정인 멜랑콜리와 예술에 대한 전반적인 스케치를 하셨습니다. 전자는 멜랑콜리란 주제를 철학에서 어떻게 다뤄왔는지 해석사를 살펴 보고, 후자는 뒤러의 그림, 김광석의 목소리, 이은주의 얼굴, 현대클래식 음악 등 예술작품에서 멜랑콜리가 어떻게 표현됐는지 살펴 보는 시간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강의에서 다루고자 하는 멜랑콜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먼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멜랑콜리가 담론화되어 있기 때문에 논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멜랑콜리와 멜랑콜리적인 것의 구분을 강조하셨습니다. 멜랑콜리가 담론화되고 교양화된 (죽어 있는) 개념에 가깝다면, 멜랑콜리적인 것은 실제로 감각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느낌, 상태에 가까운 것입니다.

 

독일어로 우울을 뜻하는 schwermut의 풀이로 멜랑콜리를 이해하는 데 한 걸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우울schwermut는 무거운 마음이다(schwer(무거운)와 mut(마음)). 아무리 기뻐도 남아 있는 무거운 마음, 이것이 우울이다. 이 무거운 마음을 벗어날 때 우리는 주이상스(향유)나 황홀경을 경험했다고 하지만 그런 초월적 경험은 일상에서 잘 발생하지 않는다.

 

 1. 왜 멜랑콜리인가

 

오늘날의 사회를 양극화 사회라고 하는데 선생님은 양극화라도 있으면 다행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좋은/나쁜, 부/빈, 이렇게 명확하게 대치하고 있는 안티테제가 있으면 전복의 가능성이 있을 텐데 오늘날은 멜랑콜리 안에서 통합된 것에 가까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있는 자들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지셨고, 이 질문에 동의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멜랑콜리의 대기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일매일' 멜랑콜리는 마시고 있다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는데 왜 노력할수록 나아지는 게 아니라 나빠지는가. 이 자기배반의 상황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멜랑콜리의 대기권에 갇혀 있는가. 그러면서 한국문학이나 영화가 상류사회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렇다면 상류사회의 멜랑콜리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어떤 작품을 꼽을 수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최근에 나온 영화로 보면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정도? 김진영 선생님이 다른 강의에서 다룬 적 있으신 필립 로스의 텍스트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로사회, 투명사회, 단속사회 등등 ~~사회란 제목으로 사회를 진단하는 책들이 일종의 트렌드를 형성했고, 그 중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가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는데 과연 피로사회가 한국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개념인가 하는 반문을 하시면서 들뢰즈가 말했던 소진사회와 피로사회를 비교하셨습니다. 피로는 힘을 많이 써버린 상태이고, 힘을 회복해 다른 상황을 희구해볼 수 있는 변화의 잠재적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태이지만, 소진은 힘이 '고갈된' 상태라서 잠재적 가능성이 부재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소진된 사회의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로 사무엘 베케트를 꼽았습니다. 베케트의 대표작인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해주시면서 무대장치를 최소화한 무대, 잎이 다 떨어진 나무 한 그루만 있는 배경,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고도를 기다린다고(고도가 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없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육체뿐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피로사회/인간과 소진사회/인간의 구원 양상이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 강의를 통해 묻게 될 질문이 될 거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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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앤스터디 2015-02-02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윤스리 님! 안녕하세요, 아트앤스터디입니다. :) 소중한 강의 노트 감사합니다. 윤스리님의 글들은 하나하나 정성이 가득하네요. ㅎㅎ 다음 수업때도 좋은 모습으로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