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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1 순수한 독서, 오염된 독서
나는 <살롱 안드로메다>의 애청자이다. 황호덕 교수님이 게스트로 출연하신 에피소드를 페이스북에 공유해주신 덕분에 알게 된 이 팟캐스트는 영문학, 서양사학(프랑스 역사), 노어노문학을 전공한 깨인, 트인, 파인 선생님 세 분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문학적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깨인 선생님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다룬 에피소드 서두에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안티고네’ 하면 여기에 대해 말한 담론들이 먼저 떠오르고, 중요한 사상가들이 다들 한마디씩 거들어서 우리는 진짜 순수한 안티고네를 볼 수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한’ 안티고네라는 표현이 문제적이긴 하지만 이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 즉 선해석에 기대어 텍스트를 특정하게 고정된 의미로 치환, 환원시키지 않고 문학텍스트를 직접 읽어 감각하고 느끼는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는 바이다. 문학에는 말로 쓰여 있지만 말로 설명되기를 끝끝내 거부하는 부분이 있고, 언어를 초과하는 잉여적인 부분이 ‘부분보다 큰 전체’로서 문학적 진실을 담고 있는 핵심인 경우가 많다. 이 잉여적인 부분은 이미지나 리듬 등 다양한 양태를 보이는데 텍스트를 직접 읽지 않으면 이미지나 리듬은 체험되지 않는다. 결국 직접적인 감각의 체험이 예술의 독자적인 영역이라 했을 때 문학작품을 읽지 않은 채 비평만 보는 건 어딘지 공허할 것 같은 불완전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종종 소설텍스트보다 비평이 더 뛰어난 경우가 존재한다. 문학작품의 영역과 비평의 영역이 서로 달라 우열의 관점으로 둘을 비교하는 게 적절한지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비평은 단순히 문학텍스트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주석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비판적 해석 작업이기에 비평가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의미들이 문학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의미보다 더 뛰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문학텍스트와 비평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안티고네를, 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페이퍼를 지난 학기에 썼는데 이번 학기에 <82년생 김지영>은 다시금 이 주제를 환기시켰다. 깨인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수한’ <82년생 김지영>을 읽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책을 읽고, 기존의 비평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나만의 시각을 제시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2016년 민음사에서 주관한 ‘페미데이’ 행사에서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의 작품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왜 소설의 제목이 ‘82년생 김지영’인지, 소설에 통계나 신문자료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의도는 무엇인지 설명해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소설이 이렇게 화제가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어 대중적인 공감대를 넓게 형성할 수 있겠으나 남녀성비의 차이가 가장 심했던 시기에 태어나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 자신을 맘충이라 부르는 사회와 직면하게 된다는 서사는 뻔하고 일차원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신문기사나 인터뷰, 페미니즘 서적 등 다른 글들을 통해 독서를 대체할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예상했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지, 소설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과 회의가 들어 소설만이 제공할 수 있는 특별한 뭔가의 존재 여부를 중시했고, 이런 (자)의식의 과잉이 결과적으로 책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 설사 소설의 일부 내용과 신문기사나 인터뷰의 내용이 거의 겹친다 하더라도 이를 경장편 분량의 한 권의 책이라는 포맷을 통해 읽었을 때 형성되는 리듬이나 정서적 상태, 의식의 지향성이 있기 때문에 다르게 읽힐 수 있는데 그걸 잊고 있었다.
독서를 시작하기 전 최대한 분석하려 들지 말고 텍스트를 소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자 했다. ‘역시 예상대로 흘러가는구나, 별 거 없네.’라는 경솔한 생각이 들 때마다 에포케를 견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다가 일단은 책장을 덮어 시간적 거리를 확보하는 게 조금이라도 필요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독서를 하기 전 들었던 팟캐스트 방송이 화근이었다. <살롱 안드로메다> 세대론 에피소드 후반부에서 ex libris로 <할배의 탄생>과 <82년생 김지영>을 함께 다뤘는데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혹독한 비판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얘기할 때 이런 소설이 대표작으로 얘기가 된다는 게 한국 페미니즘 (비평)의 비루한 현실을 보여주는 척도다, 차라리 <마담 보바리>를 읽는 게 페미니즘적으로 좀 더 진취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페미니즘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소설을 페미니즘적으로 전유한 건 남성 비평가들이지 않았나, 이 소설에 나오는 내용들은 어디서 다 한 번쯤 듣거나 본 적이 있는 얘기여서 새로운 게 하나도 없다, 특히 ‘김지영’이라는 인물은 너무 평면적이고 욕망이 보이지 않아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 미흡하다고 생각된다,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인물을 내세우려 했다는 전략은 알겠으나 대학 나오고 결혼해서 아기 낳고 살고 있는 김지영 씨가 한국사회 여성의 전형이라 볼 수 있는가 등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방송을 다 듣고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지식인(?)들답게 ‘문학성’을 중시한다는 점과 페미니즘 담론에 있어서도 책이 지닌 대중적인 파급‘효과’보다 텍스트에 내재되어 있는 논리적 정합성을 주목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들이 취하고 있는 비평적 관점이 조강석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82년생 김지영>은 ‘정치적 문학’인데 기존의 리얼리즘적 관점으로 봐도 새로운 미학적 성취를 거두고 있다고 판단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는 어찌 되었든 ‘고급문학’ 내지는 ‘문학성’이라는 보루를 지키려고 하는 지식인-비평가의 입장에서 충분히 합당한 견해라고 생각되었다.
나 또한 이들과 입장을 공유했다. 건질 만한 문장이 하나 없고, 통계자료를 제시하는 전략이 일베의 ‘팩트주의’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고 생각되었다. 문학성이 앞에서 얘기했듯 언어를 초과하는 잉여적인 부분, 말로 구성된 사실들을 초과하는 진실을 담아낼 수 있는 문학의 고유성이라 했을 때 특수하고 고유한 인간의 내면에 천착하는 일련의 소설과 달리 전형적인 사실들의 집합으로 구성한 일반성generality으로 보편성universality을 구현(김고연주)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이 떨어져 보였다. 물론 팩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사실 또한 구성된다는 니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사실이 무엇인지 묻는 것보다 무엇이 사실이 되는지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구조적 불평등과 억압을 ‘사실’로써 제시하기 위해 통계라는 수단을 이용했다. 굉장히 미학적으로 게으르고, 일차원적인 발상(아마 문창과 수업에서 이런 식으로 써왔으면 교수가 욕했을 것 같다)이란 생각이 들었다.
통계 이야기로 변죽을 올렸지만 이 소설의 핵심적 약점은 김지영이란 인물을 통해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및 일상 전반에 깔려 있는 여성혐오를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작가가 ‘아직’ 모르고 있는 독자들에게 부조리를 ‘폭로’하는 구도를 취하다 보니 사회적 약자‧피해자인 여성의 고통에 대한 공감 및 동일시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및 여성혐오 사회에 대한 분노를 자아내는 것 이상의 구조적인 성찰이나 새로운 전망으로 이어지지 못한 거라고 생각되었다. 여성혐오에 대한 고발과 문제제기는 SNS와 저널리즘 공론장을 통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그 서사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이 소설이 하고 있는지 회의적으로 보였다. 미디어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문학은 더 이상 ‘잠수함의 토끼’ 같은 전위의 역할이 아니라 ‘잠수함의 캥거루’(이장욱)와 같이 누구보다 오래 머물고 길게 생각하여 시간을 견딜 수 있는 말을 지어내야 한다는 주장에 깊이 공감한 바 있었기 때문에 더 더욱 그랬다.
2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의 문학
동기와의 대화는 이 책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달리 할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기에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물었을 때 ‘여성 문제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추천할 만 한 것 같’지만 ‘문학적으로 가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해서 나는 문학성의 규범적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적이고 논쟁적이라고 답변하며 ‘문학적이지 않다는 말이 기성의 문학 개념에 기댄 쉬운 비판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굉장히 모순적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82년생 김지영>에게 가하기 가장 쉬운 비판은 문학성의 부재인데 그 문학성의 부재를 타인이 지적하는 모습을 보니까 비평적으로 굉장히 불성실한 태도라 여겨졌다. 이후 수업시간에 조강석의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접하면서 지금까지 내 비판이 ‘비판을 위한 비판’은 아니었는지, 생산적인 논의를 위한 페미니즘 비평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선우은실의 리뷰는 압축적으로 중요한 지적들을 제시한 사례로 기억되었다. 그녀는 “『82년생 김지영』을 그 어떤 소설보다 감정이입을 하며 읽었음에도 좋은 소설인가 하는 질문에 물음표를 칠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의 호불호를 논하기에 앞서 ‘약자 여성’이라는 사실의 확인을 넘어 무엇을 향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맞닿기 때문이다. (…)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분명 문학이라는 장르에서 아주 중요하고 또 소중하게 소용되는 것이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하고 싶다.”고 비판적인 논평을 남긴다. 하지만 미학적인 관점에 서서 이 소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소설에 반발하는 배타적 시각에서의 독해가 아니라 이 소설에 공감하고 그 가치를 끌어내고자 하는 독자로서 비판적 독해를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공감소설’에 대하여 비판적 독해를 통해 소설에 결여된 부분들을 끌어안아 생산적인 담론을 구성해냈을 때 비평의 제 소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단점에 대해 준엄하게 심판하는 일은 비평의 몫이 아니다. “소설이 제기하는 객관 현실의 문제와 소설적 공감의 차원을 뛰어넘어, 그 너머의 무엇을 상상해야 하는지로 생각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것, 현실과 텍스트 사이 가장 긴장이 첨예한 지점을 진지 삼아 가장 정치적인 것과 가장 미학적인 것의 조우를 꿈꾸는 것이 비평가의 업무이다.
이를테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의 요청에 소설이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 아래 이 소설을 바라본다면 강조점이 다른 쪽에 찍힐 수 있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사회가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 문학 또한 세월호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쓰일 수 없다는 선언이 제기되었다. ‘세월호 이후의 문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대정신은 직간접적으로 세월호 사건을 다루는 작품들의 출현뿐만 아니라 애도의 문제, 폭력의 문제, 공동체적 윤리의 문제의식들이 품은 작품들로 표출되었다. 포스트 세월호 문학과 같이 한국 페미니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포스트 강남역 문학이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에서 <82년생 김지영>이 여혐의 실재성을 문학적으로 실증한 사례로서 당대 사회적 요청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한 문학의 사례였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이 느끼는 일상적인 차별과 공포를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연인에게 깊은 실망을 느껴 헤어진 연인이 있다고 할 정도로 소통불가능성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가장 절실한 화두 중 하나였을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최소한의 공통 지평, 공통 감각common sense에 대한 희구가 높았다. 이런 맥락에서 <82년생 김지영>이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페미니즘에 대해 잘 모르지만 관심 있는 친구에게 ‘입문’용으로 이 책을 선물해준다거나 여성들의 현실을 잘 알아주길 바란다는 마음에서 노회찬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 책을 선물해준 대목이 상징적이었다. 여성들의 입장과 비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듣지 않는, 들으려 노력하지 않는, 듣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공부하지 않(으려)는’ 남성들의 질문에 지친 여성들이 말하고 싶은 거의 모든 것들을 대신 ‘말해주고’ 있는 작품이 <82년생 김지영>이 갖는 폭발적인 파급효과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이 시기에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가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던 맥락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혐오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여성혐오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82년생 김지영’ 씨를 통해 수 십 년 동안 지영 씨가 겪은 여성혐오를 성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연대기적으로 여성혐오의 삽화들을 열거하고 있기에 기존의 소설이 하듯 한 사건을 깊게 파고들어가지 않는다. 특수성과 주관성이 아닌 일반성과 객관성이 이 소설이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소설이 특수한 개인의 내면을 그려내는 데 천착하여 개인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면, 이 소설은 ‘여성’을 보여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지영’은 문제적 개인이 아니라 전형적 여성이다. 이 전형성에 있어 시각차가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김지영이 문제성이 아닌 전형성에 기대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지영의 생애에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여성혐오의 삽화들을 모아 소설은 ‘여성혐오’의 단일한 이미지를 구성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공을 거둔다. 이로써 우리는 이 시대 여성혐오를 증언하는 가장 명징한 목소리들 중 하나를 얻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