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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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쿤데라옹 메르시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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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아이가 물었다. 풀입이 뭐예요? 손안 가득 그것을 가져와 내밀면서.

 내가 그 애에게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인지 그 애가 알지 못하듯 나도 알지 못하는데.

 

 나는 그것이 내기분의 깃발, 희망찬 초록 뭉치들로 직조된 깃발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손수건이라고 생각한다,

 향기로운 선물이자 일부러 떨어뜨려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한구석 어디엔가 그 주인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어 그것을 본 우리가 누구 것이지? 하고 묻게 되는 그런 것.

 

 아니면 나는 풀잎은 그 자체로 아이라고... 식물로 만들어진 아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나는 그것이 불변의 상형 문자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것은, 넓은 곳에서든 좁은 곳에서든 똑같이 피어나며,

 흑인들 사이에서, 마치 백인들 사이에서처럼,

 프랑스계 캐나다인, 버지니아 사람, 하원 의원들, 아프리카 출신 미국인들 사이에서처럼 자라난다는 것, 내가 그들에게 똑같이 주고 똑같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 그것은 내게 깎이지 않은 아름다운 죽음의 머리칼로 보인다.

 나 너 둥근 풀잎을 부드러이 사용하겠다.

 아마도 너는 젊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그들을 알았다면 나는 그들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너는 나이 든 사람들과 여성들로부터, 그들 어머니들의 무릎에서 곧장 받은 후손들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이곳에서 어머니들의 무릎인 것이다.

 

 이 풀잎은 나이 든 어미들의 하얀 머리에서 비롯되어 무척 어둡다.

 늙은 남자들의 무채색 수염보다도,

 붉고 흐릿한 입천장 아래에서 비롯된 어두움이다.

 

-윌트 휘트먼, 나 자산의 노래

 

 난생처음 그는 자신을 지탱해온 감정의 정점에 올라서꼬, 그러자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관계들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이 우뚝 치솟은 증오의 산이 애당초 산이 아니라 사람들, 즉 자신이나 잰과 같은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희망과 예전에는 감당하지 못하리라 여겼던 깊은 절망이 그를 덮쳤다.

-리처드 라이트, 미국의 아들

 

 

1. 문학적 상상력

 

p27

즉, 소설(지금부터는 소설 작품들에 주목할 것이기에)은 고유한 형태와 스타일 그리고 독자와의 소통 방식을 통해 삶의 규범적 의미를 표현함으로써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는 형식을 띤다.

 

 

 

p32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문학과 예술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단순히 "일어난 일들"을 보여주는 반면, 문예 작품은 인간 삶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p46  그래서 나는 독자의 경험을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소설 읽기가 타당한 도덕 및 정치 이론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무비판적 근거로서가 아니라)을 하는 통찰들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소설 읽기가 도덕 및 정치 이론의 규범적 결론으로부터-그것이 얼마나 완벽하든 간에-시민들이 현실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도덕적 능력들을 발달시켜준다는 것이다(이것 없이는 현실 구성에 실패할 것이다). 서문에서 언급하였듯이, 소설 일긱가 사회정의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읽기는 정의의 미래와 그 전망의 사회적 입법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수는 있을 것이다.

 

 시적 정의를 한마디로 요약해본다면 공적 합리성의 향상을 위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길러주는 도구로서 탁월한 문학의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양철학의 원류인 소크라테스-플라톤은 감정에 휘둘리면 이성적인 판단에 방해되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에 있어 감정을 배제하고자 했다. 우리는 종종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 사람이 '물불' 가리지 못하고 소위 '날뛰는' 모습을 본 적이 있거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꼭두각시가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감성에는 즉흥성, 우발성, 맹목성 등 논리를 뛰어넘거나 배제하는 '반이성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감성은 이성의 영역에서 설 자리를 박탈당했다. 또, 소위 말하는 과학문명의 진보가 '이성의 신화'를 만들고 보존하는 데 일존하여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조장하는 데 한 몫 톡톡히 했다. 감성은 사적인 것, 개인적인 언어로 치부되고, 이성은 공적인 것, 사회적인 언어로 치부되었다. 감성에 휘둘리지 말 것, 내면의 비가시적 무질서가 아닌 눈에 보이는 명명백백한 사실들의 사실관계를 따져 정확하게 판단할 것.  

 

 하지만 마사 누스바움은 이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감정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아는 게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그 사람이 무슨 감정을 가졌는지 아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행동/실천의 차원에서 생각(이성)과 감정 중에 더 강력한 동인을 생각해본다면 감정의 위상이 명확해질 것이다. 모든 감정이 논리적 인과 관계에 따라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감정은 논리적 추론을 통해 상당 부분 설명될 수 있다. 특정 상황에서 특정 감정을 왜 느꼈는지 내용이 아닌 형식, 맥락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할수록 감정의 출처 또한 명확해질 수 있다. 바로 이 맥락의 구체적 형상화 과정에서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풍경이 드러나게 된다.

 

 마사 누스바움은 누군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왜 그가 그런 행동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행동의 이면에 있는 사회와 그 사회의 불평등, 부조리를 발견함으로써 표면적 사실만이 아닌 이면의 진실까지 포괄할 수 있는 정의로운 판단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범박하게 말해 문학이 그려내는 내면의 드라마, 문학적 진실에 눈이 밝을수록 사건,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가능해지고, 이 정확한 판단/행동을 통해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지켜져야 하는 것들을 지켜지게 만드는 인간들의 합의이다. 무엇이 지켜져야 하고, 지켜지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들의 합의를 통해 인간이 지향하고 지양해야 할 가치와 윤리의 체계를 세우고, 그 가치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 정의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건 아니잖아'가 없는 사회가 아니라 '이건 아니잖아'가 없어야 한다는, 재발하지 않아야 한다는 정신적 합의 아래 실천이 이뤄지고 있는 사회이다. 정의는 당위의 세계이다. 정의가 정의로울 때 이 당위는 존재자를 폭력적으로 억누르는 아버지의 법이 아니라 존재자의 본래적 존재함을 부추기고 앞당겨 실현시키는 신의 법에 가까워진다. 당위는 신의 언어이다.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법은 인간이 신에게 빌린 언어체계이다. 법은 개인의 판단을 판단하는 기준이란 점에서 개인을 초과한다. 이 초과는 오직 지배자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로 동원될 때의 순리가 아닌 지켜져야 하는 것이 지켜지는 보편성의 세계, 질서와 조화의 세계를 작동할 때의 순리가 이 세상에 던져진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공백에 육박해들어올 때에만 자신의 근거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정의는 언제나 정의로워야 한다.

 

 한 가지 남는 의문은 사회적 계급/계층의 하층, 말단부에 위치한 이들을 공감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들이 공감의 주체로 서고자 할 때 감정을 말살해버리는 살인적 노동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희망을 말하기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구체적인 경험이 있었는데 인문학 캠프로 인연을 맺은 인문학 협동조합에서 메일을 받고 간 강의에서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정확한 인용이 불가능해 그냥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재구성된 버전으로 쓴다. 얼핏 보기에 쉬워 보이는 약자들 간의 연대가 어려운 이유는 이들 간에도 복잡미묘한 수직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광주는 국가유공자 처리가 되었지만 비슷한 비극을 겪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은 광주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세월호에서도 같은 전략이 쓰였는데 가장 비참한 자리에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대학 특례입학 같은 말을 퍼뜨려 그들에게 '유가족충' '시체장사꾼' 같은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슬픔과 애도의 공동체가 자가분열되도록 조장한 것이다. 보상. 인간은 유기체의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사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때도 나의 고통에 비추어 바라보고, 이 비교/계산 속에서 오만가지 정념들이 소용돌이친다. 이야기된 고통과 이야기되지 않은 고통. 이야기되지 않은 고통들을 일순간에 괴물로 만드는 감정정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건 물론 냉정한 이성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선물. 벤야민이 말한 문자의 사슬을 끊고 나온 해방된 산문이란 문자-형식의 지배, 인간을 지배하는 교환논리를 뚫고 나오는 '부서진 이름(들)'이 아닐까. 온전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그 온전함의 온전하지 못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이후의 언어는 권력에 기생하는 검열에 의해 조각났으나 우리 가슴에 더 생생하게 전달된 <소년이 온다>의 희곡/대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선물. 더 큰 사랑의 길. 이것이 <시적 정의>가 내게 남긴 화두다.   

 

 

    

시적정의,마사누스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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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신촌아트레온 3시 영화지만 광고 10분 후 3시 10분에 인터스텔라를 봤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개인적으로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습니다. 영화비평가나 객관적이고 균형적인 시선으로 따지면 순위가 밀릴 것 같긴 하지만 한 명의 관객으로서 굉장한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베스트로 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작년에 명동cgv에서 본 <그래비티>도 굉장히 좋았는데(그래비티는 3d로 봤고, <인터스텔라>는 일반 2D로 봤습니다) 스페이스 휴먼드라마 장르가 제게 잘 맞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책은 조금 읽었으나 인생에 대한 경험치는 빈약한 관계로 감성코드는 가족이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닭살 돋게 나이브하지만 순수한 코드에 맞지만 항상 이성이 최대한으로 활성화된 가운데 감성이 겨우 눈을 떴던 것 같습니다. <변호인>도 법폭력이란 텍스트 없이 온정주의만 강조했다면 비등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비판과 냉소의 대상이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레건트 유니버스>를 읽고 나서부터 4차원도 잘 모르지만 그 이상의 차원을 상상해보고, 뭔가 지구 바깥, 태양계 바깥에 대해 상상해보려고 했었는데 <인터스텔라>가 지적 충족도와 호기심을 동시에 채워줬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소통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부녀 관계, 딸을 버리고 우주로 떠난 아버지의 설정은 저 자신에게 대입시키려 해도 잘 되지 않아 뭔가 크게 어긋난 타인(예전에 소통이 있었기 때문에 '타자'는 아닌)의 관계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5차원에서 이뤄진 쿠퍼와 머피의 지성적-영적 대화는 제겐 죽은 저자들과의 대화/독서의 행위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지성으로 감당이 안 되는 믿음의 영역, 하지만 지성 없는 믿음으로는 정확히 짚어낼 수 없는 암호해독은 지성과 믿음이 동반돼야 하는 신비주의 사상과도 매우 닮아 있었습니다. 올 가을에 수강한 성해영 교수님의 <마음과 마음 너머> 신비주의 입문 편 강좌와 보르헤스 독서세미나가 빛을 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부녀, 타인에 대한 믿음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블랙홀을 통과해 쿠퍼가 들어간 5차원 공간이 어쩌면 트랜스 상태 혹은 깨달음에 이른 이의 뇌의 풍경과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해봤습니다. 그 정신의 방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인류 무의식의 원형에 각인된 풍경이겠죠. 반복되는 역사, 반복되는 실패를 극복할 실마리를 거기서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12월 3일 상수동에 있는 이리 카페에서 서경식 선생님의 <나의 조선미술 순례> 북콘서트를 듣고 합정역을 찾아 걷다 길을 헤맸는데 운 좋게 빨간책방 카페를 발견해서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3층에 있는 스튜디오를 구경했고, 사무실에서 작업하고 계시는 이동진 평론가를 1초 동안 살펴보기도 했고요 ^^ 이동진 평론가가 직접 골랐다고 하는 음악들이 좋아서 서성거리다가 캠퍼스씨네21을 무료배포하길래 그 자리에서 읽었습니다. 때마침 인터스텔라에 대한 짤막한 대화가 있어서 집중해서 읽었는데 메멘토나 다크나이트, 인셉션에서 보여주는 놀란 표 딱딱 맞아들어가는 큐브, 퍼즐 같은 서사의 정교함이 부족해 실망했다는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영화 보는 동안에는 감동에 휩싸여 대충 넘겼지만 나중에 머릿속에서 장면을 되새기고 의미를 곱씹으면서 조금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해 코스모스 다큐멘터리의 호스트로 나온 닐 디그래스 타이슨처럼 과학적 오류를 지적할 역량은 안 되지만 서사적 흐름을 방해했던 부분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 만 박사(맷 데이먼)의 죽음에 부처 

 


2시간 30분 동안 중간중간 조금씩 딴 짓도 해가면서 쓴 글이 날아가버렸다. 로그아웃된 줄 모르고 저장을 눌렀다 임시저장이 안 된 상태로 페이지가 바뀌는 바람에 2시간 30분 전에 임시저장된 분량만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글과 나의 시간은 휘발되었다. 아... 몇 번의 경험이 있지만 결코 적응하지 않는 이 허무...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는데 반대로 잠들기 힘든 기나긴 새벽이 될 것 같다...    

 

 

...

 

글을 쓴 다음날 컴퓨터는 부팅이 되지 않았다. 검색결과 베드섹터에 의한 하드 디스크 파괴로 추정된다. 이 글은 안전모드 네트워킹 사용으로 접속해 쓰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많은 것을 깨닫고, 생각해볼 수 있었다. D드라이브 500G를 거의 꽉 채우고 있는 데이터는 거의 죽은 데이터들이었다. 저장만 해놨을 뿐 다시 보거나 읽거나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영화나 음악의 경우에도 이름만 듣고 다운받아 놓고 실행해보지 않은 파일들이 태반이었다. 앞으로만 질주하는 삶, 걸어본 길을 돌아볼 여유를 잃어버린 삶이란 자각은 예전부터 했지만 그에 따른 실천이 뒤따르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맹수에게 뒤쫓기는 것 같은 긴박함이 아니라(점점 '무한경쟁'의 의미가 다가온다. 실체가 없는 불안, 그래서 스스로를 통제해야 하는 내 안의 빅브라더) 시간과 눈에 보이는 성과에 전전긍긍하는 조급함이 이 시대의 근본기분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낙오. 뒤처지면, 죽는다. 은유적 표현이 아닌 사회임을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보여주고 있다. 창비 팟캐스트에 나온 한홍구 선생님은 이런 일화를 소개해주셨다. 유치원 선생님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러 간 자리에서 한 선생님이 이런 말을 들려줬다고 한다. 장래희망을 적는 란에 두 어린이가 정규직이라 적었다고.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란이 공무원으로 도배되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유치원까지 잠식됐을 줄이야... 주변에 가끔씩 길가다 마주치는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을 보면 그래도 이 사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볼 수 있어서 미소 짓곤 했는데 얼마 전부터 뉴스에 자주 나오고 있는 영어 유치원, 명문 유치원을 보면 상황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외장하드를 사야겠다는 결심이 섰지만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할 여건이 안 돼 7.42GB 짜리 USB로 열심히 퍼다 나르고 있다. 인터넷 공인 인증서, 인터넷 쇼핑몰, 인터넷... 인터넷 없이 못하는 것들을 하나 둘 열거해보았다. PC방에서 하기 힘들거나 불가능한 personal computer의 영역, 인간 신체에만 보험을 들어놓을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보험을 들어놔야 한다는 걸 알았다. A/S보증 기간에 받은 A/S를 제외하고 만 5년 만의 완전한 고장. 나의 잘못인지 5년 정도 쓰면 고장나게끔 만들어진 건지 알 길이 묘연하지만 몇 번 떨어트린 바람에 특정 각도에서만 충전기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2G 폰 사용자로서 기계의 수명에 대해 또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글이 소실되면서 글쓰기에 대한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쓰는 과정에서도 잘 써지고, 결과물도 만족스러웠던 글은 대부분 쓰기 전 예열의 과정을 충실히 거친 글이었음을 새삼스레 발견했다. 짧은 글이라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형식적 고민의 유무에 따라 글의 질이 현격하게 차이가 났다. 글의 흐름도 흐름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배열하고 나열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글쓰는 과정을 통해 내가 알고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탐색하고 그 너머를 더듬으려면 퇴고 작업보다 사전 작업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청년출가학교에서 만난 조성택 선생님의 글 쓰는 방법과 세월호 시민 집담회에서 만난 진태원 선생님의 글 쓰는 방법이 새삼 떠올랐다. 핵심 개념을 담고 있는 문장을 돌다리처럼 배치하고 그 사이를 채우는 방식이라 하면 적당한 설명일까? 비문학적 글을 쓸 때 항상 내용에 대해서만 신경 썼지 형식에 대해선 서론-본론-결론 수준의 얼개만 짠 그 동안의 습관에 대해 반성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인터스텔라 리뷰를 분석해보았다.

 

 글쓸 땐 몰랐던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점에 대한 포착과 더불어 잘 쓴 글이라 생각되는 글과 형식적인 면에서의 비교를 통해 내 글의 군더더기나 전체적인 밸런스의 문제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을 위해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전달에 용이한 형식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에 있어 소통 지상주의는 작품 고유의 미학적, 형식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아 폭력이 될 수 있지만 비문학(적 글)에 있어 소통을 저해하는 요소를 수정/제거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문득 그러면 문학과 비문학을 나누는 경계/기준은 무엇인가 질문이 생기지만 여기에 대한 논의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자.      

 

...

 

소실된 부분에 대한 복원 작업.

 

1. 만 박사(맷 데이먼)의 죽음에 부처 - 이름이 '만mann'인 건 <마의 산>, <파우스트 박사>의 작가 토마스 만을 염두에 둔 것일까?

 

 1년 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에 신형철 평론가는 이런 제목의 글을 남겼다. '태어나라 의미 없이'.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 박사는 아이와 사별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일과 운전이 무한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다 우주에 왔고 사고를 당해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상황에서 지구/삶으로 복귀하기 위해 필사적 투쟁을 하게 된 라이언 스톤의 내적 동기에 답하기 위해 생존에 대한 본능적 의지, 생명에 대한 맹목적 긍정이 아닌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이 질문은 내가 품고 있는 질문의 두 뿌리 중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을 나누는 경계는 무엇인가, '살아보니 그렇더라' 사후적으로 재구성되는 삶의 의미가 아닌 선택/결단으로서 삶을 살게 하는 삶의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가.

 <다크나이트>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올 법한 윤리적 딜레마를 히어로 서사에 안착시킨 놀란 형제답게 <인터스텔라>에서 만 박사에게 지구에서 우리가 삶의 의미라 믿어온 혹은 합의된 대의를 무참히 찢어발기는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존-기계'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단독자로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삶의 의미(자유나 평등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는 사실상 없음을, 벌거벗은 인간에게 남은 건 오로지 피와 살, 유전자를 통한 자기기만적 불멸의 길임을 보여준다. 생명이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에 도착해 기약 없는 동면에 든 만 박사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실은 순교가 아닌 개죽음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만 박사는 자신이 믿어온 의미 체계가 실은 문화와 교육에 의해 구성된 상상적인 것일 뿐 실재적인 것은 피와 살, 종족 번식이란 동물적 본능임을 깨닫고 모반을 일으키지만 다소 허무한(교훈적인?) 방식으로 최후를 맞는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만 박사와 달리 쿠퍼에겐 사랑하는 딸 머피가 있다. 그를 지구 밖으로 나오게 만든 힘은 호기심이나 도전의식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혹은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했을 지도). 그랬기 때문에 쿠퍼에게 이 여행은 어디까지나 'trans-stella'가 아니라 'inter-stella'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은하계와 은하계 사이. 우주에 위치한 두 점 사이. 만약 쿠퍼가 만 박사와의 대결이나 기타 우주선 비행상의 사고로 인해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가정해보자. 쿠퍼에게 머피가 없는 사람이 된다면 이 영화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거나 어쩌면 완성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머피는 쿠퍼의 딸이고, 쿠퍼의 유전자가 그녀의 몸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소중한 존재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그녀를 위해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내고 살아야겠다는 의지, 사랑은 발생하지 않았을 테니까. 예전에 어디선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주체가 존재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우리(we) 없이 나밖에 없다면 의미는 의미 없는 것일 것이다. 이때 의미는 한낱 화학적 자극에 불과할 테니 그 속에 쾌락이 있을지언정 의미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의미는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발생한다.

 

 타자의 존재와 주체와 타자가 관계 맺는 양상, 방식에 따라 삶이라 명명하는 '존재와 시간'의 이중주 속에서 의미가 발생할 것이다. 좋음/나쁨, 옳음/그름, 의미의 좌표평면과 여기서(0,0 혹은 0,0,0, ...) 발생하는 차이/변화, 단순히 점의 이동이 아닌 좌표평면 자체를 변화시키는 사건...

 

5차원 공간에서 쿠퍼와 머피의 소통 장면은 개인적으로 감동적이었는데 다르게 느낀 관객들도 많은 것 같다. 과학적으로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시공을 뛰어넘은 소통/교감을 책읽기와 신비주의적 교감?의 메타포로 읽었다(보고 싶은 대로 본 거지...). <인터스텔라> 보고 난 다음 들었던 김수환 선생님의 <책에 따라 살기> 강연이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리고 생각나는 구절이 있었다. 구원의 이미지가 구약성서에서 세상의 끝난 다음에 오는 종말론적 이미지라면(그래서 구원이 오기를 넋놓고 기다리기만 한다면) 신약성서에서는 현실을 세상의 끝으로 살면서 현실 안에 이미 메시아가 도래해 있는 임재의 이미지로 그려진다고 한다.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살고 싶어한 내일이라는 구절, 수험생들 사이에서 자기통제와 착취를 독려하는 슬로건으로 쓰여 싫어하게 됐지만 사실 그렇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열렬히 욕하는 사회는 과거 누군가가 열렬히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실현된 세상이기도 하다(창비 팟캐스트에 나온 한홍구 선생님은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는 분명히 진보하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지금 여기는 과거의 누군가의 꿈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미래에 누군가가 살게 될 사회로 이어질 꿈들이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이 꿈을 기억하기 위해선 읽고, 듣고, 봐야 한다. 또한 쓰고, 말하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사회에서 살게 되었는지,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탐구하게 하지 않는 인문교육은 참교육이 아닐 것이다. 비단 인문학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신비주의에 생각의 촉수가 뻗친 건 5차원 공간이 블랙홀을 통과해 도달한 곳이라 표상되어 있지만 물리적으로 다른 은하계에 있는 그 어딘가가 인간의 정신 속에 이미 내재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신 속에 과거-현재-미래가 다 들어 있고, 그것에 접속해 대극적 합일을 이루면 세상의 이치/원리/도/법을 깨닫게 된다는 신비주의의 이야기를 내 멋대로 해석해 상상하면서 그렸던 이미지가 물론 인터스텔라의 그것과 달랐지만 무한히 반복되는 보르헤스적 이미지와 겹치면서 엉뚱한 만남이 성사된 게 아닌가 싶다.(5차원 공간이 실의 이미지로 그려진 건 초끈이론의 영향이라 보면 될까?)    

 

 별 일 없는 한 지구를 떠나보지 못하고 죽을 예정인 나로선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방식으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1. 별 것 아닌 것 같은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 구하기.

 

 노자식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무위도식. 밥 한 숫갈에 감동하기. 

 

2. 실존적 의미 탐색하기.

 

 비록 내가 생각하는 의미가 내가 몸 담고 있는 사회의 역사, 문화적 맥락과 내가 받은 교육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단순히 수동적으로 주입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사유를 통해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 찾기.

 

3. 관계적 의미 생산하기.

 

 2번의 실존적 삶의 과정 속에서 타인/타자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선행의 지점이 발생한다면 거기서 행복-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꼭 대의적인 차원에서 보탬이 아니더라도 타인을 기쁘게 해주고, 슬플 때 위로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이 영화를 통해 깨달은 몇 가지 사실.

 

1. 나는 우주의 이미지에 어느 정도 페티시가 있는 듯하다

 

2. 내 감성코드는 신파. 그러나 머리를 최대한 굴려야 작동한다는 전제가 있음. 주지주의적 서정.

 

3. 한스 짐머 아저씨가 쿵쾅쿵쾅하는 음악만 작곡하는 건 아니였어...!

 

p.s 브랜든 박사(마이클 케인)은 왜 이렇게 시에 집착하는 걸까? 그는 원래 과학자가 아닌 시인이 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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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9일 토요일 3시 30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박경근 감독의 <철의 꿈>을 보았습니다.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이 열린 한 갤러리에서 <철의 꿈> 사진을 본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영상이었는데 재생은 안 해놓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커다란 배의 모습. 이 이미지에게 저는 말을 걸 수 없었습니다. 4.16 사건의 여파는 아니고 제가 유추해볼 수 있는 철의 꿈, 인간이 철에 투사한 꿈은 세계적 갑부가 철강왕이란 별명을 얻었다는 이야기와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넘어가면서 국가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철이 굉장히 소중한 재료로 취급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정도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꿈꾸(고 있)는 철을 이 땅에서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영화는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자전적 이야기인지 픽션인지 모르겠으나 전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내레이터의 여자친구는 돌연 신의 품으로 가 남자를 버립니다. 남자는 여자친구가 말하는 신보다 더 구체적인 신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으로 자신의 신을 찾아나섭니다. 스님과 비구니 스님들을 비추던 카메라는 돌연 울산의 암각화로 시선을 옮깁니다. 울산의 암각화에는 고래가 그려져 있습니다. 고래. 아, 참 고래의 꿈이란 노래도 있었죠. 암각화를 그린 선조들에게 고래잡이는 19세기~20세기에 대대적으로 이뤄진 '학살' 수준의 포경'산업'과는 차원이 다른 종교적 차원의 의식에 가까웠을 겁니다. Spiritual영적인 사람들은 고래와 인간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소통하고자 노력했을 겁니다.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 인간의 능력과 의지를 벗어난 초월적 영역, 그러니까 신에 대한 외경심에 대해 얘기했던 게 생각납니다. 존재자는 자신을 초과한 거대한 존재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어떻게 보면 생명은 이 광대무변의 우주에서 잉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인간의 삶은 단순한 유기체적 생명의 소멸과정이 아니라 예정된 죽음 속에서, 살아 있는 현재와 도래할 죽음의 미래 사이 긴장 속에서 어떤 빛이 커튼 사이로 살며시 들어오듯 현현하기도 하는 신성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알랭 바디우가 <사도 바울>에서 말한 육체에 대한 정신의 승리, 정신의 영원성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고래보다 수십 배, 수백 배 큰 배를 직접 만들어냈습니다. 두려움이 없으니 외경심도 자연히 사라졌습니다. 70년대 사람들은 새로운 신을 숭배하게 됐다고 감독은 말합니다. 철 - 자본. 잃은 나라를 되찾자마자 강대국에 의해 양쪽으로 찢어지고 전쟁으로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비운의 민족, 무엇보다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은 (우리도) '잘 살아보세'를 가슴에 품고 죽어라 일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이 실제로 죽었습니다. '잘' 살아보고자 한 몸 바쳐 일했는데 돌아온 것은 '살' 조건의 박탈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고공 크레인 위에 올라가 시위를 했고, 이 고공시위는 한국 노동운동 역사상 아주 중요한 시위로 기록되었고, 이후로도 중요한 시위에서 고공시위가 행해졌다고 감독은 설명했습니다(용산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울산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예전보다 돈은 많이 벌지만 작업환경이 굉장히 삭막해졌다고. 회식을 제외하곤 거의 교류가 없을 만큼 개인주의가 심해졌다고. 조금 부족하고 배고팠지만 마음은 따듯했던 옛날과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내면적으로 빈곤한 지금을 비교해 현재를 비판할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단, '숨'이 없는 기계들에 둘러싸여 노동하는 삶에 대해 상상해보게 됐습니다. 내 안의 작은 뭔가가 더 이상 숨쉬지 못해 죽어갈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어떤 인터뷰 중에서 감성의 결핍, 부재를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민주화가 이뤄지긴 했으나 백낙청 선생님의 지적대로 정치적으로 근대화가 완전히 이뤄졌다고 보기 힘든데 반해 산업화는 완성돼 이성, 합리로 대표되는 기계 속에서 감성이 박멸(?)당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사무실에 있던 난 같은 식물들의 입사귀를 만 원짜리의 이미지로 읽었다면 너무 심한 비약일까요? 어쨌든 제겐 그 식물들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대기업에서 가져다 쓰는 인문정신 없는 인문학, 자기계발식 인문학처럼.

 

  어느 장례식장의 연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업 회장이나 간부급으로 보이는 노인이 정주영 회장으로 추정되는 고인을 회고하면서 '우리는 숱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국가발전과 산업진흥을 위해 바친 자신과 회장의 청춘과 영웅적 성취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애틋하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일본어식 표현을 하자면 우리는 연민적 존재니까요. 위로받을 수, 위로'당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 고독과 상처를 안고 있는 인간들은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자기연민에 빠졌을 때 추해보이고, 때로 추악해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고독과 고통에 대한 댓가이자 결과라고 생각되는 사회적 성취가 대단한 만큼 자신의 고독과 고통을 남들의 것보다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는 오만한 태도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에 대한 연민(나르시시즘의 다른 얼굴)에 빠져 타인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자기기만적 무지도 한몫 할 겁니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불가능은 사실 처음부터 불가능이 아니었다고. 한강의 기적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이 불가능과 기적이 본래적 의미에서 성립이 되려면 노동자, 약자들의 죽음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고 이뤄졌어야 할 겁니다. 이건 정말로 불가능하고, 그래서 이뤄지면 기적인 거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걸 기적이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죽어나가지 않는 한 이뤄낼 수 없는 성과를 죽음 없이 이뤄냈을 때 온당한 의미에서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도정일 선생님이 낸 산문집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쓰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자는 내용의 글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는 자기가 쓴 자서전보다 타인이 쓰는 평전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히려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사회니까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신의 세계, 신화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김연아 신화 이후 많은 소녀들이 제2의 김연아를 꿈꾸고 피겨 스케이트를 신었고, 손연재 이후 많은 소녀들이 제2의 손연재를 꿈꾸며 리듬체조복을 입고 있으며, 입을 겁니다. 많은 엄마들이 자식들에게 입히고, 입힐 겁니다. 이 욕망의 촉발이 불가항력적이란 점에서 인간은 여전히 자연에 외경심을 가져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인간을 몰락으로 이끌지도 모르는 욕망이 사방에도 회오리치는 스마트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사업 1위 국가의 위용은 있었습니다. 거대한 선박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배는 그 자체로 스펙터클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포스코에 견학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공장이 굉장히 거대했다는 인상은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회에선 경제성장이 하나의 거대서사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트리클 다운 효과처럼 자연히 민생이 안정될 거라는 소문. 이 거대서사가 허구임을 4.16 세월호 사건을 통해 '실재'가 폭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지적 시점의 권력자들은 서사를 조작해 서사의 개연성, 그러니까 이것이 국가라는 것, 심지어 민주주의 공화국이란 문자상의 진실을 지켜냈습니다. 예술이 이 개연성의 허구를 폭로하고, 완고한 현실의 균열을 일으키는 걸 넘어 역사적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이런 사고방식 역시 아직 거대서사의 신화에서 깨지 못한 잠꼬대일까요?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만남. 진은영 시인의 <시의 아토포스>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해야 겠습니다.


'철'의 의미는 생각보다 다양했습니다. 물론 영화의 철은 iron입니다만, 철에는 제철할 때 사용되는 계절을 나타내는 철, 철 좀 들어라 할 때 사용되는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이란 뜻의 철, 여러 장의 문서 따위를 한데 모아 꿰매다 할 때 어근인 철(하다),  ‘(신의 가죽 창이나 말굽ㆍ쇠굽 따위에 박는, 대가리가 크고 넓으며 길이가 짧은 쇠못)’의 방언(함경)인 철이 있었습니다. 저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곡선의 철의 이미지를 떠올려 봤습니다. 자기 신념/신조를 지키되 시대의 흐름에 조응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춘 철이 철철 넘치는 철. 철철철. 


돌고래의 영법에 가장 가까운 건 역시 접영butterfly일까요? 이 사랑스러운 바다나비를 철창 없는 감옥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힘쓴 최재천 교수님과 시민들에 대한 감사의 말로 이 글로 마무리합니다. 물론 좋은 영화 만들어주신 박경근 감독님께도~ 


p.s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박경근 감독의 청계천 메들리와 철의 꿈을 상영하고 있으니 일시 잘 확인하고 가셔서 영화 보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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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읽었다. 예전에 오마이뉴스 특강 동영상을 본 적이 있었지만 마지막에 사르트르와 지젝과 레닌의 공부(공부일까? 학습일까?)에 대한 이야기 말곤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아 기분 좋은 낯섦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실은 격주로 일요일마다 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다뤄서 러시아문학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부분도 있었고,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모스필름 90주년 특집으로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씨네토크 자리에서 이현우 선생님을 직접 뵙고, 질문도 드리면서 내 나름대로 인연을 본격적으로 튼 기념으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꺼내든 것이었다(어느 누가 적은대로 그는 눈이 깊은 미남이었다). 


 니진스키로 시작해서 에밀 시오랑으로 끝난다고 말할 수도 있는 이 책은 문학, 영화, 미술, 인문학 전반을 넘나들며 사유의 고공비행보다 섹시한 저공비행을 보여줬다. 지젝도 지젝이었지만 데리다의 <법의 힘>에 대한 독후감이 압권이었다. 아감벤을 읽으면서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와 데리다의 법의 힘을 독서리스트에 올려놨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좀 더 읽고 읽은 다음에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판단이 들어 묵혀 두었는데 로쟈의 친절한 패러프레이징 덕분에 읽었던 부분 또 읽는 버퍼링을 겪었지만 나름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 노트에 적은 구절을 나누고자 한다.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 법과 정의 사이. <법의 힘>

1부 <법에서 정의로> (정의의 권리에 대하여) 


 계산 가능한 것 : 법 - 계산 불가능한 것 : 정의 


정의는 법/권리를 넘어선다. 계산 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다만 요구/요청일 따름이다. 


해체/와/정의/의/가능성 : 각각에 대해서는 기꺼이/충분히 말해볼 수 있지만 합쳐진 어구에 대해 말하는 건 곤란. 


'판단을 허락해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잠깐 나의 생각. 이 구절을 읽으면서 보르헤스를 읽으면서 어렴풋이 가졌던 질문이 다시 부상했다. 추상적으로 표현해보자면 언어와 정신의 미묘한 관계랄까. 인간들이 생각이라는 걸 하고, 거듭하고, 심지어 사유를 하고,(어머나) 사상 수준의 정신작용을 해버리는 바람에 생각을 판단하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 생각해놓고 자신도 알 듯 모를 듯한 헷갈려서 문자로 정리해 기록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에 대한 생각이 기록으로 남겨지고[성문법], 사람들은 생각에 대한 생각을 수용하기도 하고 대결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사고관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불문법과 성문법. 책과 문자가 빈곤하던 시절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성장했을까? 어휘는 언제 어떻게 폭발적으로 증가했을까? 문명이 건설되면서부터였을까? 밥 먹고, 사냥하고, 채집-수렵에 쓰는 일상적 대화만 했다면 고차원적 생각을 하기 힘들었을까? 그러면 누가 언제 어떻게 왜 고차원적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또 고차원적 생각은 무엇인가? 개별적 현상이 아닌 보편적 원리를 구하는 생각? 형이상학적인 생각? 죽음과 신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은 고차원적이라 분류해도 적당한가? 눈을 감고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몸이 차갑게 굳은 가시적, 경험적 생각에서 몸은 차갑게 굳고 몸 안에 있던 정신-영혼이 다른 어딘가로,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한 신의 품으로 갈 거란 생각은 고차원적인가? 그냥 단순한 헛소리일지도 모르는데도? 그 고차원적 생각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정신과 삶이 한층 고양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단순히 기계의 고장처럼 받아들여졌다면 죽음의 프리즘으로 삶의 의미를 반추하고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자신을 삶과 죽음의 중간에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은 어떤 경계를 넘어갔을 것이다. 니체가 인간을 짐승과 신의 교량이라 표현한 것처럼 짐승의 경계를 넘어갔으나 신에 다다르지 못한, 그래서 항상 '긴장'이란 상태 속에서 실존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생각에 대한 생각 혹은 고차원적 생각들 중에 몇몇은 후세에 남겨졌을 것이다. 그 생존의 기준이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권력자의 머리에서 나와서 그랬는지 몰라도 어떤 생각은 후세에 전해지고, 어떤 생각은 사라졌을 것이다. 좀 더 큰 범위에서 생각해본다면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나오는 에피소드처럼 힘 있는 문명이 다른 문명의 정신적 뿌리를 완전히 박멸하고 말살해 사상, 민족의 정신이 사라지기도 했을 것이다(일제강점기가 더 길어졌다면 혹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지구가 멸망한다면 성경도, 호머의 일리아드, 오뒷세이아도, 코란도, 불경도, 일반상대성이론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멸망하기 전에 다른 곳에 저장해두거나 다른 지적 생명체에게 지식을 전수한다면 인간의 정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반대로 지금의 제도권 교육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물어보자. 고등학교 수학에서는 미적분을 가르치고, 한국 국어교육에서는 윤동주와 이상, 김수영을 읽고, 제1외국어로 영어를 배운다. 현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살고 있다고 답안지에 써도 오답은 아닐 테고, 미성년자를 성폭행해도 10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없다. 4대 의무라고 해서 납세를 하면 4대강에 쏟아붓고, 국방의 의무라고 군대를 가면 집단적으로 폭행당하는데 군은 이 사실을 알아도 입을 다물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살면서 공부를 하지 않는 여동생 때문에 골머리가 앓는다.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다른 걸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떼웠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여동생을 중독시킨 스마트폰의 최초 발명자라고 알려진 스티브 잡스에게 욕을 퍼붓는다. 그러다 잡스처럼 자식에게 스마트폰을 쓰지 못하도록 막지 못한 부모님의 탓으로 돌린다. 자식들을 위해 힘쓰지만 고등교육까지 받게 못 받은 부모님의 성실한 무지에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인류 역사 이후로 한 번도 노동자 혹은 노예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나쁜 피'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본다.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땅이 뒤집히고, 천지개벽 속에서도 한 번도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성실한 영혼에 대해.(부모님의 경우 내가 열심히 해서 나중에 효도하면 되는데, 아무리 대화를 시도해도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동생의 경우 답답하다) 


 다시 <법의 힘>으로 돌아오자. 


"분명 적용되지 않는 법들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적용가능성[집행]이 없이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힘이 없이는 어떠한 법의 적용가능성이나 '강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 (강제적인) '집행'이 없다면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법의 힘과 폭력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이렇듯 힘이 법에 내재적이며 본질적이라면, (정당한) '법의 힘'과 (부당한) '폭력'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폭력 Gewalt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Zur kritik der Gewalt] 

적법한 권력/권위와 공적인 힘을 의미하기도 함. 


데리다는 영어에서 '법=힘', 독일어에서 '힘=폭력' 등식을 끌어온다. 고로 법=폭력?! 

force

gewalt macht


해체야말로 법과 정의의 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 

"해체적인 질문하기는 노모스와 퓌지스, 테시스와 퓌지스의 대립, 곧 한편으로 법, 관습, 제도와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대립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조건 짓는 모든 대립, 예컨대 실정법과 자연법의 대립을 동요시키면서 복잡하게 만들면서 출발하며 "이러한 해체적 질문하기는 전적으로 법과 정의에 대한 질문하기, 법과 도덕, 정치의 토대들에 대한 질문하기"이기 때문이다. 


정의의 문제야말로 해체의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다! 


[팡세] 정의, 힘 - 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어떤 이는 정의의 본질은 입법가의 권위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주권자의 편의라고 말하며, 또 다른 이는 현재의 관습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말이 가장 사실에 가깝다. (...) 관습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권위의 신비한 토대다. 귄위를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 


개념이 '닳아빠진 은유'인 것처럼 성문법이란 '닳아빠진 관습법'에 다름 아니다.        

 

몽네뉴=파스칼에 따르면, 법적 권위의 토대는 관습이며, 법이 법인 한에서 그것은 정의와 무관하다. 


정의와 법의 돌발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은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를 함축하고 있다. (...) 법을 정초하고 창설하고 정당화하는 작용, 법을 만드는 작용은 어떤 힘의 발동, 곧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으로, 이전에 정초되어 있는 어떤 선행하는 정의, 어떤 법, 미리 존재하는 어떤 토대도 정의상 보증하거나 반역할 수 없는 또는 취소할 수 없는,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석적인 폭력. 어떤 법의 최초 정초의 순간. 그 법의 적법성/불법성은 판정 불가능하다. 그 법의 적법성/정당성을 보증해줄 수 있는 메타언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떠한 토대도 갖지 않으며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폭력gewalt'이다. '정초적 폭력'(르네 지라르) 법의 정초 혹은 정립은 그러한 정초적 폭력에 근거한다. 요컨대,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적 권위)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이것이 데리다가 기술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한) '법의 구조'다. 


'해체는 정의의 해체 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을 분리시키는 간극에서 발생한다. 


address 무엇인가를 목적지/대상에 '정확하게' 전달하다

편지/문자 letter는 목적지에 전달하지 않는다 - 해체주의의 표어 

'길-없음'이란 의미에서 아포리아는 '도단'을 뜻하는 바, 해체의 지배적 관점은 언어(로고스)의 궁지, '언어도단'에 대한 관심이며, 이에 대한 관심은 해체의 장기이자 책임이고 윤리이기도 하다. 

"하나의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하고 특유한 반면, 법으로서의 정의는 항상 어떤 규칙이나 규범 또는 보편적 명령의 일반성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합법성과 정당성은 상호배제적이지 않은가? 


"타자에게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전달하는 것은 모든 가능한 정의의 조건처럼 보인다"

"서양에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에 대한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중심적 공리계 전체를 재고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우리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 하나 이상의 언어에서 물려받은 거소가 관련하여 역사적이고 해석적인 기억의 과제는 해체의 중심에 놓여 있다. (...) 해체는 무한한 정의의 요구에 이미 서약하고 있으며, 그에 참여하고 있다. 

(2) "기억 앞에서의 이러한 책임은 우리의 행동 및 이론적이고 실천적이며 윤리/정치적인 우리의 결정들의 정의와 정확성을 규제하는 책임의 개념 자체 앞에서의 책임이다. (...) 결국 해체는 규정된 맥락에서의 정의, 정의의 가능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기존의 규정들을 넘어서 있는, 항상 충족되지 않는 이러한 호소에서만 자신의 힘과 운동, 자신의 동기를 발견"한다. 


 만약 정의와 법의 이러한 구분이 진정한 구분, (-)이라면, 문제는 아주 간단할 것이다. 하지만 법은 정의의 이름으로 실행된다고 주장하고, 정의는 작동되어야(구성되고 적용되어야, 곧 힘에 의해 '강제되어야')하는 법 안에 자기 자신을 설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해체는 항상 이 양자 사이에 놓여 있으며, 이 사이에서 자신을 전위시킨다. 


 (1) "어떤 결정이 정당하고 책임감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에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하기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중지적이어야 한다." [규칙의 판단중지]

(2) "딱 잘라 판단을 내리는 단절의 결정 없이는 어떤 정의도 실행될 수 없고, 어떤 정의도 발휘되지 못하며, 어떤 정의도 실현되지 못할 뿐더러 법의 형태로 규정될 수도 없다." [결정 불가능한 것의 유령] 

"결정 불가능한 것은 적어도 하나의 유령, 하지만 본질적인 유령으로서, 모든 결정, 모든 결정의 사건에 포함되고 깃들어 있다. 이것이 유령성을 결정의 정당성, 모든 확실성, 모든 현전의 안정성 또는 모든 공언된 척도 체계를 내부로부터 해체한다. 


(3) 현전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정의는 기다리지 앟는다. 오히려 "하나의 정당한 결정은 항상 직접적으로 당장 가능한 한 최대한 빠르게 요구된다. [지식의 지평을 차단하는 긴급성] 


"결정의 순간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듯 하나의 광기다. 시간을 잘라내야 하고 변증법들에 저항해야 하는 정당한 결정의 순간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과잉 능동적이면서 수동적, 마치 결정자는 자신의 결정에 의해 자기 자신이 변형되도록 내맡김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 자신의 결정이 타자로부터 그에게 도래하는 것처럼 이러한 결정은 수동적인 어떤 것을 보존하고 있다." 


1. 결정/판결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불가능성]

2. 하지만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내려야 한다[불가피성]

3. 그러한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그것도 최대한 빨리 내려야만 한다[긴급성]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으로서의 정의는 현전 불가능하지만, 이는 사건의 기회이며 역사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릴케의 <비가>에 대한 로쟈의 애정, 자작시, 레오 까락스의 <나쁜 피>, 에밀 쿠스트리차의 <인생은 기적처럼>, '아줌마 철학'이라 재치 있게 명명한 니체에 대한 글, 김기덕의 <빈 집>과 <사마리아>에 대한 비평, 문학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에 대한 글이 흥미로웠다. 아, 김훈은 에세이스트지 소설을 쓴 적이 없다는 평도 김훈 소설을 읽어본 적 없는 내게도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말한 걸 반대로 말해도 말이 되는 걸 아는 허무주의자.(21세기문학 가을호에 실린 이소연 비평가의 글에서 본 김훈 소설가의 글이 좋아서 빨리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되길 기다리고 있다. 강산무진 읽어봐야지...) 


마지막으로 독서모임에서 '앙코르' 반응까지 이끌어낸 에밀 시오랑의 글로 채워진 에필로그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대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책에 따라 살기> 북콘서트에서 만난 김수환 선생님도 '도스토예스프키" 얘기를 많이 해주셨다. 이번 겨울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 Cogito ergo Boom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근대 철학의 개시를 선언한 것이었다면, 시오랑이 미덥잖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코기토의 불철저성이다. "철학의 잘못은 너무 참을만하다는 것이다"(독설의 팡세- 고뇌의 삼단논법) 사유를 철저하게 극단에까지 밀어붙인다면, 그것은 자연스레 '존재'를 통과하여 의당 '폭발'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시오랑의 아포리즘들은 어떤 사유의 응집으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폭발의 잔재로서 읽혀야 한다. 


'눈물의 일반이론' : "나는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눈물들은 생각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들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쓰라지지 않을까?" 


"나는 철학이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은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은 인간을 각자의 운명 속으로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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