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신촌아트레온 3시 영화지만 광고 10분 후 3시 10분에 인터스텔라를 봤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개인적으로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습니다. 영화비평가나 객관적이고 균형적인 시선으로 따지면 순위가 밀릴 것 같긴 하지만 한 명의 관객으로서 굉장한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베스트로 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작년에 명동cgv에서 본 <그래비티>도 굉장히 좋았는데(그래비티는 3d로 봤고, <인터스텔라>는 일반 2D로 봤습니다) 스페이스 휴먼드라마 장르가 제게 잘 맞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책은 조금 읽었으나 인생에 대한 경험치는 빈약한 관계로 감성코드는 가족이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닭살 돋게 나이브하지만 순수한 코드에 맞지만 항상 이성이 최대한으로 활성화된 가운데 감성이 겨우 눈을 떴던 것 같습니다. <변호인>도 법폭력이란 텍스트 없이 온정주의만 강조했다면 비등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비판과 냉소의 대상이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레건트 유니버스>를 읽고 나서부터 4차원도 잘 모르지만 그 이상의 차원을 상상해보고, 뭔가 지구 바깥, 태양계 바깥에 대해 상상해보려고 했었는데 <인터스텔라>가 지적 충족도와 호기심을 동시에 채워줬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소통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부녀 관계, 딸을 버리고 우주로 떠난 아버지의 설정은 저 자신에게 대입시키려 해도 잘 되지 않아 뭔가 크게 어긋난 타인(예전에 소통이 있었기 때문에 '타자'는 아닌)의 관계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5차원에서 이뤄진 쿠퍼와 머피의 지성적-영적 대화는 제겐 죽은 저자들과의 대화/독서의 행위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지성으로 감당이 안 되는 믿음의 영역, 하지만 지성 없는 믿음으로는 정확히 짚어낼 수 없는 암호해독은 지성과 믿음이 동반돼야 하는 신비주의 사상과도 매우 닮아 있었습니다. 올 가을에 수강한 성해영 교수님의 <마음과 마음 너머> 신비주의 입문 편 강좌와 보르헤스 독서세미나가 빛을 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부녀, 타인에 대한 믿음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블랙홀을 통과해 쿠퍼가 들어간 5차원 공간이 어쩌면 트랜스 상태 혹은 깨달음에 이른 이의 뇌의 풍경과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해봤습니다. 그 정신의 방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인류 무의식의 원형에 각인된 풍경이겠죠. 반복되는 역사, 반복되는 실패를 극복할 실마리를 거기서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12월 3일 상수동에 있는 이리 카페에서 서경식 선생님의 <나의 조선미술 순례> 북콘서트를 듣고 합정역을 찾아 걷다 길을 헤맸는데 운 좋게 빨간책방 카페를 발견해서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3층에 있는 스튜디오를 구경했고, 사무실에서 작업하고 계시는 이동진 평론가를 1초 동안 살펴보기도 했고요 ^^ 이동진 평론가가 직접 골랐다고 하는 음악들이 좋아서 서성거리다가 캠퍼스씨네21을 무료배포하길래 그 자리에서 읽었습니다. 때마침 인터스텔라에 대한 짤막한 대화가 있어서 집중해서 읽었는데 메멘토나 다크나이트, 인셉션에서 보여주는 놀란 표 딱딱 맞아들어가는 큐브, 퍼즐 같은 서사의 정교함이 부족해 실망했다는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영화 보는 동안에는 감동에 휩싸여 대충 넘겼지만 나중에 머릿속에서 장면을 되새기고 의미를 곱씹으면서 조금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해 코스모스 다큐멘터리의 호스트로 나온 닐 디그래스 타이슨처럼 과학적 오류를 지적할 역량은 안 되지만 서사적 흐름을 방해했던 부분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 만 박사(맷 데이먼)의 죽음에 부처
2시간 30분 동안 중간중간 조금씩 딴 짓도 해가면서 쓴 글이 날아가버렸다. 로그아웃된 줄 모르고 저장을 눌렀다 임시저장이 안 된 상태로 페이지가 바뀌는 바람에 2시간 30분 전에 임시저장된 분량만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글과 나의 시간은 휘발되었다. 아... 몇 번의 경험이 있지만 결코 적응하지 않는 이 허무...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는데 반대로 잠들기 힘든 기나긴 새벽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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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다음날 컴퓨터는 부팅이 되지 않았다. 검색결과 베드섹터에 의한 하드 디스크 파괴로 추정된다. 이 글은 안전모드 네트워킹 사용으로 접속해 쓰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많은 것을 깨닫고, 생각해볼 수 있었다. D드라이브 500G를 거의 꽉 채우고 있는 데이터는 거의 죽은 데이터들이었다. 저장만 해놨을 뿐 다시 보거나 읽거나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영화나 음악의 경우에도 이름만 듣고 다운받아 놓고 실행해보지 않은 파일들이 태반이었다. 앞으로만 질주하는 삶, 걸어본 길을 돌아볼 여유를 잃어버린 삶이란 자각은 예전부터 했지만 그에 따른 실천이 뒤따르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맹수에게 뒤쫓기는 것 같은 긴박함이 아니라(점점 '무한경쟁'의 의미가 다가온다. 실체가 없는 불안, 그래서 스스로를 통제해야 하는 내 안의 빅브라더) 시간과 눈에 보이는 성과에 전전긍긍하는 조급함이 이 시대의 근본기분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낙오. 뒤처지면, 죽는다. 은유적 표현이 아닌 사회임을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보여주고 있다. 창비 팟캐스트에 나온 한홍구 선생님은 이런 일화를 소개해주셨다. 유치원 선생님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러 간 자리에서 한 선생님이 이런 말을 들려줬다고 한다. 장래희망을 적는 란에 두 어린이가 정규직이라 적었다고.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란이 공무원으로 도배되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유치원까지 잠식됐을 줄이야... 주변에 가끔씩 길가다 마주치는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을 보면 그래도 이 사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볼 수 있어서 미소 짓곤 했는데 얼마 전부터 뉴스에 자주 나오고 있는 영어 유치원, 명문 유치원을 보면 상황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외장하드를 사야겠다는 결심이 섰지만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할 여건이 안 돼 7.42GB 짜리 USB로 열심히 퍼다 나르고 있다. 인터넷 공인 인증서, 인터넷 쇼핑몰, 인터넷... 인터넷 없이 못하는 것들을 하나 둘 열거해보았다. PC방에서 하기 힘들거나 불가능한 personal computer의 영역, 인간 신체에만 보험을 들어놓을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보험을 들어놔야 한다는 걸 알았다. A/S보증 기간에 받은 A/S를 제외하고 만 5년 만의 완전한 고장. 나의 잘못인지 5년 정도 쓰면 고장나게끔 만들어진 건지 알 길이 묘연하지만 몇 번 떨어트린 바람에 특정 각도에서만 충전기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2G 폰 사용자로서 기계의 수명에 대해 또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글이 소실되면서 글쓰기에 대한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쓰는 과정에서도 잘 써지고, 결과물도 만족스러웠던 글은 대부분 쓰기 전 예열의 과정을 충실히 거친 글이었음을 새삼스레 발견했다. 짧은 글이라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형식적 고민의 유무에 따라 글의 질이 현격하게 차이가 났다. 글의 흐름도 흐름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배열하고 나열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글쓰는 과정을 통해 내가 알고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탐색하고 그 너머를 더듬으려면 퇴고 작업보다 사전 작업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청년출가학교에서 만난 조성택 선생님의 글 쓰는 방법과 세월호 시민 집담회에서 만난 진태원 선생님의 글 쓰는 방법이 새삼 떠올랐다. 핵심 개념을 담고 있는 문장을 돌다리처럼 배치하고 그 사이를 채우는 방식이라 하면 적당한 설명일까? 비문학적 글을 쓸 때 항상 내용에 대해서만 신경 썼지 형식에 대해선 서론-본론-결론 수준의 얼개만 짠 그 동안의 습관에 대해 반성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인터스텔라 리뷰를 분석해보았다.
글쓸 땐 몰랐던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점에 대한 포착과 더불어 잘 쓴 글이라 생각되는 글과 형식적인 면에서의 비교를 통해 내 글의 군더더기나 전체적인 밸런스의 문제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을 위해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전달에 용이한 형식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에 있어 소통 지상주의는 작품 고유의 미학적, 형식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아 폭력이 될 수 있지만 비문학(적 글)에 있어 소통을 저해하는 요소를 수정/제거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문득 그러면 문학과 비문학을 나누는 경계/기준은 무엇인가 질문이 생기지만 여기에 대한 논의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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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된 부분에 대한 복원 작업.
1. 만 박사(맷 데이먼)의 죽음에 부처 - 이름이 '만mann'인 건 <마의 산>, <파우스트 박사>의 작가 토마스 만을 염두에 둔 것일까?
1년 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에 신형철 평론가는 이런 제목의 글을 남겼다. '태어나라 의미 없이'.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 박사는 아이와 사별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일과 운전이 무한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다 우주에 왔고 사고를 당해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상황에서 지구/삶으로 복귀하기 위해 필사적 투쟁을 하게 된 라이언 스톤의 내적 동기에 답하기 위해 생존에 대한 본능적 의지, 생명에 대한 맹목적 긍정이 아닌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이 질문은 내가 품고 있는 질문의 두 뿌리 중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을 나누는 경계는 무엇인가, '살아보니 그렇더라' 사후적으로 재구성되는 삶의 의미가 아닌 선택/결단으로서 삶을 살게 하는 삶의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가.
<다크나이트>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올 법한 윤리적 딜레마를 히어로 서사에 안착시킨 놀란 형제답게 <인터스텔라>에서 만 박사에게 지구에서 우리가 삶의 의미라 믿어온 혹은 합의된 대의를 무참히 찢어발기는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존-기계'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단독자로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삶의 의미(자유나 평등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는 사실상 없음을, 벌거벗은 인간에게 남은 건 오로지 피와 살, 유전자를 통한 자기기만적 불멸의 길임을 보여준다. 생명이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에 도착해 기약 없는 동면에 든 만 박사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실은 순교가 아닌 개죽음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만 박사는 자신이 믿어온 의미 체계가 실은 문화와 교육에 의해 구성된 상상적인 것일 뿐 실재적인 것은 피와 살, 종족 번식이란 동물적 본능임을 깨닫고 모반을 일으키지만 다소 허무한(교훈적인?) 방식으로 최후를 맞는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만 박사와 달리 쿠퍼에겐 사랑하는 딸 머피가 있다. 그를 지구 밖으로 나오게 만든 힘은 호기심이나 도전의식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혹은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했을 지도). 그랬기 때문에 쿠퍼에게 이 여행은 어디까지나 'trans-stella'가 아니라 'inter-stella'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은하계와 은하계 사이. 우주에 위치한 두 점 사이. 만약 쿠퍼가 만 박사와의 대결이나 기타 우주선 비행상의 사고로 인해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가정해보자. 쿠퍼에게 머피가 없는 사람이 된다면 이 영화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거나 어쩌면 완성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머피는 쿠퍼의 딸이고, 쿠퍼의 유전자가 그녀의 몸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소중한 존재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그녀를 위해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내고 살아야겠다는 의지, 사랑은 발생하지 않았을 테니까. 예전에 어디선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주체가 존재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우리(we) 없이 나밖에 없다면 의미는 의미 없는 것일 것이다. 이때 의미는 한낱 화학적 자극에 불과할 테니 그 속에 쾌락이 있을지언정 의미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의미는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발생한다.
타자의 존재와 주체와 타자가 관계 맺는 양상, 방식에 따라 삶이라 명명하는 '존재와 시간'의 이중주 속에서 의미가 발생할 것이다. 좋음/나쁨, 옳음/그름, 의미의 좌표평면과 여기서(0,0 혹은 0,0,0, ...) 발생하는 차이/변화, 단순히 점의 이동이 아닌 좌표평면 자체를 변화시키는 사건...
5차원 공간에서 쿠퍼와 머피의 소통 장면은 개인적으로 감동적이었는데 다르게 느낀 관객들도 많은 것 같다. 과학적으로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시공을 뛰어넘은 소통/교감을 책읽기와 신비주의적 교감?의 메타포로 읽었다(보고 싶은 대로 본 거지...). <인터스텔라> 보고 난 다음 들었던 김수환 선생님의 <책에 따라 살기> 강연이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리고 생각나는 구절이 있었다. 구원의 이미지가 구약성서에서 세상의 끝난 다음에 오는 종말론적 이미지라면(그래서 구원이 오기를 넋놓고 기다리기만 한다면) 신약성서에서는 현실을 세상의 끝으로 살면서 현실 안에 이미 메시아가 도래해 있는 임재의 이미지로 그려진다고 한다.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살고 싶어한 내일이라는 구절, 수험생들 사이에서 자기통제와 착취를 독려하는 슬로건으로 쓰여 싫어하게 됐지만 사실 그렇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열렬히 욕하는 사회는 과거 누군가가 열렬히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실현된 세상이기도 하다(창비 팟캐스트에 나온 한홍구 선생님은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는 분명히 진보하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지금 여기는 과거의 누군가의 꿈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미래에 누군가가 살게 될 사회로 이어질 꿈들이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이 꿈을 기억하기 위해선 읽고, 듣고, 봐야 한다. 또한 쓰고, 말하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사회에서 살게 되었는지,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탐구하게 하지 않는 인문교육은 참교육이 아닐 것이다. 비단 인문학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신비주의에 생각의 촉수가 뻗친 건 5차원 공간이 블랙홀을 통과해 도달한 곳이라 표상되어 있지만 물리적으로 다른 은하계에 있는 그 어딘가가 인간의 정신 속에 이미 내재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신 속에 과거-현재-미래가 다 들어 있고, 그것에 접속해 대극적 합일을 이루면 세상의 이치/원리/도/법을 깨닫게 된다는 신비주의의 이야기를 내 멋대로 해석해 상상하면서 그렸던 이미지가 물론 인터스텔라의 그것과 달랐지만 무한히 반복되는 보르헤스적 이미지와 겹치면서 엉뚱한 만남이 성사된 게 아닌가 싶다.(5차원 공간이 실의 이미지로 그려진 건 초끈이론의 영향이라 보면 될까?)
별 일 없는 한 지구를 떠나보지 못하고 죽을 예정인 나로선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방식으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1. 별 것 아닌 것 같은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 구하기.
노자식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무위도식. 밥 한 숫갈에 감동하기.
2. 실존적 의미 탐색하기.
비록 내가 생각하는 의미가 내가 몸 담고 있는 사회의 역사, 문화적 맥락과 내가 받은 교육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단순히 수동적으로 주입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사유를 통해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 찾기.
3. 관계적 의미 생산하기.
2번의 실존적 삶의 과정 속에서 타인/타자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선행의 지점이 발생한다면 거기서 행복-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꼭 대의적인 차원에서 보탬이 아니더라도 타인을 기쁘게 해주고, 슬플 때 위로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이 영화를 통해 깨달은 몇 가지 사실.
1. 나는 우주의 이미지에 어느 정도 페티시가 있는 듯하다
2. 내 감성코드는 신파. 그러나 머리를 최대한 굴려야 작동한다는 전제가 있음. 주지주의적 서정.
3. 한스 짐머 아저씨가 쿵쾅쿵쾅하는 음악만 작곡하는 건 아니였어...!
p.s 브랜든 박사(마이클 케인)은 왜 이렇게 시에 집착하는 걸까? 그는 원래 과학자가 아닌 시인이 되고 싶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