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아이가 물었다. 풀입이 뭐예요? 손안 가득 그것을 가져와 내밀면서.

 내가 그 애에게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인지 그 애가 알지 못하듯 나도 알지 못하는데.

 

 나는 그것이 내기분의 깃발, 희망찬 초록 뭉치들로 직조된 깃발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손수건이라고 생각한다,

 향기로운 선물이자 일부러 떨어뜨려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한구석 어디엔가 그 주인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어 그것을 본 우리가 누구 것이지? 하고 묻게 되는 그런 것.

 

 아니면 나는 풀잎은 그 자체로 아이라고... 식물로 만들어진 아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나는 그것이 불변의 상형 문자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것은, 넓은 곳에서든 좁은 곳에서든 똑같이 피어나며,

 흑인들 사이에서, 마치 백인들 사이에서처럼,

 프랑스계 캐나다인, 버지니아 사람, 하원 의원들, 아프리카 출신 미국인들 사이에서처럼 자라난다는 것, 내가 그들에게 똑같이 주고 똑같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 그것은 내게 깎이지 않은 아름다운 죽음의 머리칼로 보인다.

 나 너 둥근 풀잎을 부드러이 사용하겠다.

 아마도 너는 젊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그들을 알았다면 나는 그들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너는 나이 든 사람들과 여성들로부터, 그들 어머니들의 무릎에서 곧장 받은 후손들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이곳에서 어머니들의 무릎인 것이다.

 

 이 풀잎은 나이 든 어미들의 하얀 머리에서 비롯되어 무척 어둡다.

 늙은 남자들의 무채색 수염보다도,

 붉고 흐릿한 입천장 아래에서 비롯된 어두움이다.

 

-윌트 휘트먼, 나 자산의 노래

 

 난생처음 그는 자신을 지탱해온 감정의 정점에 올라서꼬, 그러자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관계들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이 우뚝 치솟은 증오의 산이 애당초 산이 아니라 사람들, 즉 자신이나 잰과 같은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희망과 예전에는 감당하지 못하리라 여겼던 깊은 절망이 그를 덮쳤다.

-리처드 라이트, 미국의 아들

 

 

1. 문학적 상상력

 

p27

즉, 소설(지금부터는 소설 작품들에 주목할 것이기에)은 고유한 형태와 스타일 그리고 독자와의 소통 방식을 통해 삶의 규범적 의미를 표현함으로써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는 형식을 띤다.

 

 

 

p32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문학과 예술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단순히 "일어난 일들"을 보여주는 반면, 문예 작품은 인간 삶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p46  그래서 나는 독자의 경험을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소설 읽기가 타당한 도덕 및 정치 이론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무비판적 근거로서가 아니라)을 하는 통찰들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소설 읽기가 도덕 및 정치 이론의 규범적 결론으로부터-그것이 얼마나 완벽하든 간에-시민들이 현실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도덕적 능력들을 발달시켜준다는 것이다(이것 없이는 현실 구성에 실패할 것이다). 서문에서 언급하였듯이, 소설 일긱가 사회정의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읽기는 정의의 미래와 그 전망의 사회적 입법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수는 있을 것이다.

 

 시적 정의를 한마디로 요약해본다면 공적 합리성의 향상을 위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길러주는 도구로서 탁월한 문학의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양철학의 원류인 소크라테스-플라톤은 감정에 휘둘리면 이성적인 판단에 방해되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에 있어 감정을 배제하고자 했다. 우리는 종종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 사람이 '물불' 가리지 못하고 소위 '날뛰는' 모습을 본 적이 있거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꼭두각시가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감성에는 즉흥성, 우발성, 맹목성 등 논리를 뛰어넘거나 배제하는 '반이성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감성은 이성의 영역에서 설 자리를 박탈당했다. 또, 소위 말하는 과학문명의 진보가 '이성의 신화'를 만들고 보존하는 데 일존하여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조장하는 데 한 몫 톡톡히 했다. 감성은 사적인 것, 개인적인 언어로 치부되고, 이성은 공적인 것, 사회적인 언어로 치부되었다. 감성에 휘둘리지 말 것, 내면의 비가시적 무질서가 아닌 눈에 보이는 명명백백한 사실들의 사실관계를 따져 정확하게 판단할 것.  

 

 하지만 마사 누스바움은 이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감정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아는 게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그 사람이 무슨 감정을 가졌는지 아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행동/실천의 차원에서 생각(이성)과 감정 중에 더 강력한 동인을 생각해본다면 감정의 위상이 명확해질 것이다. 모든 감정이 논리적 인과 관계에 따라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감정은 논리적 추론을 통해 상당 부분 설명될 수 있다. 특정 상황에서 특정 감정을 왜 느꼈는지 내용이 아닌 형식, 맥락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할수록 감정의 출처 또한 명확해질 수 있다. 바로 이 맥락의 구체적 형상화 과정에서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풍경이 드러나게 된다.

 

 마사 누스바움은 누군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왜 그가 그런 행동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행동의 이면에 있는 사회와 그 사회의 불평등, 부조리를 발견함으로써 표면적 사실만이 아닌 이면의 진실까지 포괄할 수 있는 정의로운 판단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범박하게 말해 문학이 그려내는 내면의 드라마, 문학적 진실에 눈이 밝을수록 사건,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가능해지고, 이 정확한 판단/행동을 통해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지켜져야 하는 것들을 지켜지게 만드는 인간들의 합의이다. 무엇이 지켜져야 하고, 지켜지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들의 합의를 통해 인간이 지향하고 지양해야 할 가치와 윤리의 체계를 세우고, 그 가치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 정의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건 아니잖아'가 없는 사회가 아니라 '이건 아니잖아'가 없어야 한다는, 재발하지 않아야 한다는 정신적 합의 아래 실천이 이뤄지고 있는 사회이다. 정의는 당위의 세계이다. 정의가 정의로울 때 이 당위는 존재자를 폭력적으로 억누르는 아버지의 법이 아니라 존재자의 본래적 존재함을 부추기고 앞당겨 실현시키는 신의 법에 가까워진다. 당위는 신의 언어이다.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법은 인간이 신에게 빌린 언어체계이다. 법은 개인의 판단을 판단하는 기준이란 점에서 개인을 초과한다. 이 초과는 오직 지배자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로 동원될 때의 순리가 아닌 지켜져야 하는 것이 지켜지는 보편성의 세계, 질서와 조화의 세계를 작동할 때의 순리가 이 세상에 던져진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공백에 육박해들어올 때에만 자신의 근거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정의는 언제나 정의로워야 한다.

 

 한 가지 남는 의문은 사회적 계급/계층의 하층, 말단부에 위치한 이들을 공감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들이 공감의 주체로 서고자 할 때 감정을 말살해버리는 살인적 노동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희망을 말하기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구체적인 경험이 있었는데 인문학 캠프로 인연을 맺은 인문학 협동조합에서 메일을 받고 간 강의에서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정확한 인용이 불가능해 그냥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재구성된 버전으로 쓴다. 얼핏 보기에 쉬워 보이는 약자들 간의 연대가 어려운 이유는 이들 간에도 복잡미묘한 수직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광주는 국가유공자 처리가 되었지만 비슷한 비극을 겪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은 광주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세월호에서도 같은 전략이 쓰였는데 가장 비참한 자리에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대학 특례입학 같은 말을 퍼뜨려 그들에게 '유가족충' '시체장사꾼' 같은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슬픔과 애도의 공동체가 자가분열되도록 조장한 것이다. 보상. 인간은 유기체의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사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때도 나의 고통에 비추어 바라보고, 이 비교/계산 속에서 오만가지 정념들이 소용돌이친다. 이야기된 고통과 이야기되지 않은 고통. 이야기되지 않은 고통들을 일순간에 괴물로 만드는 감정정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건 물론 냉정한 이성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선물. 벤야민이 말한 문자의 사슬을 끊고 나온 해방된 산문이란 문자-형식의 지배, 인간을 지배하는 교환논리를 뚫고 나오는 '부서진 이름(들)'이 아닐까. 온전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그 온전함의 온전하지 못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이후의 언어는 권력에 기생하는 검열에 의해 조각났으나 우리 가슴에 더 생생하게 전달된 <소년이 온다>의 희곡/대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선물. 더 큰 사랑의 길. 이것이 <시적 정의>가 내게 남긴 화두다.   

 

 

    

시적정의,마사누스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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