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다리나 팔이 없는 시에라리온 사람 한 명을 구해와 모델로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그 생각은 그를 환멸하게 했지만 그 밤, 작업은 계속 이어졌고 그는 수백 장의 사진을 메모리카드에 저장할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31
올리브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진 가자지구의 농가 마을에서 보낸 한 계절도 떠올랐다. 1차 인티파다와 2차 인티파다* 때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잃은 것도 모자라, 이스라엘 군인에게 돌멩이를 던졌다는 이유로 십 년 형을 선고받은 손자를 기다리던 노파를 그는 그곳에서 만났다. 노파는 올리브나무 가지를 손질하며 카메라 앞에서 말했다. 손자가 석방되면 이곳으로 올 거라고, 그때까지 올리브 열매는 계속해서 열릴 것이고 때가 되면 수확하는 게 내가 할일이니 나 역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옆에선 소년들이 찌그러진 축구공으로 공놀이를 하고 있었고, 근처 사원에서 들려오는 아잔 소리는 올리브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며 여러 겹으로 울려퍼졌다. 아잔 소리 한가운데서 그는, 사진가로서의 지난 시간은 오직 이 노파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한참 동안 꿈쩍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건 믿음에 가까웠다. 사진가로 살지 않았다면 다른 나라의 시골 마을에서 온몸으로 삶을 끌어안는 노파를 만날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33
숱하게 찍어온 사진들이 과연 단 한 사람에게라도 의미 있는 말을 걸었는지,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형벌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낯선 사람의 손가락이라도 힘껏 잡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아기의 절박함을 기억하게 해주었는지……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36
사진을 찍는 사람은 그녀였지만, 그녀는 그들의 눈에도 그녀의 한순간이 포착되어 그들 각자의 기억 속 필름에 기록되리란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안다는 것이, 그녀는 좋았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51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외로워졌다. 긴 통로라는 것만 알 뿐, 바닥은 좀처럼 가늠되지 않는 우물 같은 외로움이었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59
지유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민영이 상체를 숙여 그 손바닥에 손가락 하나를 가만히 올려놓자 힘주어 잡아주었다. 민영은 순간 삶이라는 높은 대지에 손가락 하나를 걸치고는 힘껏 매달려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지유가 민영을 붙들었다. 삶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말을 대신하며, 우리가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듯……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64
‘각기 다른 공간에서 찍은 후지사의 반자동 필름 카메라는 열두 살의 내게도 살 자격이 있다는 걸 알려준 사물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촬영을 떠나기 전날이면 이 필름 카메라를 한 장씩 찍으며 내가 왜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잊지 않으려 했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68
이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같은 자리에서 마주서리란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지금이 삶의 전부이기도 하다는 걸 알려주려는 듯, 아프도록 무구하게……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76
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던 오래전 그 작은 방을 떠올리며……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84
지금도 빛이 피사체를 감싸는 순간이 좋아. 지붕 아래나 옷장 뒤편에, 빈병 속 같은 데…… 끌어안은 연인의 어깨와 어깨 사이에, 서로에게 기댄 채 잠든 두 사람 뒤로 길게 이어진 그림자 주변에, 석양이 스민 물웅덩이 속에, 그 모든 곳에 얄팍하게 접혀 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면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순간이, 그때의 온기가…… 여전히 나를 숨쉬게 해.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84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철로 된 무기와 무너진 건물을 지나, 올리브나무와 묘비 없는 무덤을 지나, 총성이 울리는 도시 한가운데 설치된 임시 병원에서 절망하고 흐느끼는 사람들과 그들의 상처를 봉합하고 소독하는 누군가의 손길을 지나, 살겠다는 의지를 포기한 적 없는 아기의 악센 손가락을 지나, 한 아이가 들여다보던 스노볼 안의 점등된 세상을 지나, 그 아이를 생각하며 잠 못 들고 뒤척이던 또다른 아이의 시름 깊은 머릿속을 지나, 거울 속 세상과 그녀를 위해, 영원에서 와서 영원으로 가는 그 무한한 여행의 한가운데서, 멜로디와 함께…… 빛이, 모여들었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