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부르든 그 단어들이 지시하는 바가 죽음, 상실, 몰락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처럼 정체가 불분명한 프로파간다는 죽은 것은 바로 역사라고 재빠르게 선언함으로써 그 죽음을 입도선매하려 들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정체가 불분명한 다른 프로파간다들을 제외하고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40

그들은 그 ‘죽음’을 독점하려 했으나 그들 역시 한 시대의 구성원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 ‘죽음’과 ‘상실’과 ‘몰락’은 동시대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주관적이었다. 그러므로 애당초 선언 따위로 객관화될 수는 없었다. 동시대인들은 임상적으로 그 ‘죽음’과 ‘상실’과 ‘몰락’을 제 몸 안에서 앓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되뇌던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40

1991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1992년부터 모두 성기의 언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1991년 5월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내면 풍경이었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41

그 새로운 관계가 서로의 혀를 탐닉하는 프렌치키스로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우리가 느낀 감정은 오누이의 그것과 흡사했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41

술이 취해 불콰해진 얼굴로 여럿이 몰려가 창녀와 하룻밤 자는 일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었지만, 학생회 내부에서 연애하다가 생기는 성욕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었다. 개인적인 모든 것은 전적으로 이해받을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44

말하자면 우리는 캠퍼스 주위에 사상의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혁명의 언어를 완전히 쟁취하고 있었다. 언어의 차원에서 우리는 완전히 해방된 자들이었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45

완전한 해방은 두려울 정도로 요염한 쾌감과 연결돼 있었다. 중년 남자의 말은 옳았다. 완전한 해방이란 사적인 쾌감과 관계된 것이므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47

바로 그랬다. 그 순간, 내가 무슨 얘기를 한다고 해도 그건 좋았다는 뜻이었다. 우주가 하나이듯, 그 순간도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정민과 처음으로 섹스를 하는 일 말이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54

"네 말대로 하자면, 우리 인류 중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 우주는 무한한 게 되겠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56

개인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했다. 이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한 말이었다. 이데올로그들이 말하는 ‘순수한’ 개인으로부터가 아니라, 역사적 조건들과 관계들 내부에 있는 자신으로부터. 그렇다면 어디를 향해? 그 순간 내 몸으로 이해한바,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공간 속으로, 그리고 외로움이 없는 해방 속으로. 그 공간은 너무나 행복하고 너무나 아름다워 다른 곳에 그와 같은 세상이 하나 더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그날의 그 몸이 바로 나라면, 그런 공간도 단 한 곳뿐이었고 그런 순간도 단 한 번뿐이었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59

그해의 봄밤처럼 모든 것들은 정민을 중앙에 두고 지나가고 있었다. 열어놓은 차창으로 초록물이 든 그늘진 바람이 불어오자 땀이 맺힌 정민의 이마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나무들, 그 흔들림, 그 바람소리는 정민이 머무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 세상에서 정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는 것뿐이었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61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을 가득 메운 수많은 이야기Story, 또한 그러하므로 이 세상에 그만큼 많은 ‘나Self’가 존재한다는 애절한 신호Signal.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69

그리하여 외로웠으므로, 정민은 밤하늘을 떠다니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처럼 누군가에게 연결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 누군가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과거나 현재나 미래 그 어디에 있든.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꼭 같이 라디오를 듣겠노라고.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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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그때까지의 내 인생은 물론이고 과연 있을지 없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내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의 전생과, 그 나머지 모든 전생들까지도 아주 근사한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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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감각이 바뀌면서 현실이 무르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마련인데, 이를 두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모든 성인聖人들은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해 그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현실이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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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낸 지난 몇십 년간의 生의 基源을 찾는다면 그건 거품과도 같은 幻覺의 時代에서 기인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러나 시네마스코프처럼 펼쳐진 환각 속에서도 破片의 一生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단 하나의 실낱같지만 확실한 무엇이 存在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는 내 心中의 재산이니 그 누구에게도 理解받을 수 없는 眞實이라 여기에 그 일을 回顧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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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할아버지가 다녀갔다며. 그렇게 해서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가장자리가 타버린 입체 누드사진과 당신이 쓴 기나긴 글의 도입부를 전해받게 됐다

-알라딘 eBook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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