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드시는 하나님 세우시는 하나님 - 팬데믹 이후, 인생 재편의 시작
박종렬 지음 / 패스오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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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흔드시고 그 다음 다시 세우신다.

하나님은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주신다는 얘기가 위로가  된다.

세상을 살다보면 삶의 의지도 꺾는 인생의 위기가 있는 것 같다.

기독교는 부활의 기쁨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고난을 이겨내면 강력한 믿음의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움직임을 발견하는 사람은 행복하기는 하다.

인생에서 문제가 생기면 내 인생이 어디가 꼬였는지 생각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을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 내가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삶의 멘붕에 빠졌을 때 염려를 하지 말고 11차원도 넘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낙망하지 말고 기도의 끈을 붙잡고 있으면 이길 수 있다.

주변에 코로나에 걸린 교수님이 계신데 코로나는 몸살 감기와 같았다고 했다.

코로나로 교회가  침몰하는 것 같은데 이 책에 교회나 사람들이 다시 비상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는지 찾아 보고 싶어서 읽었다.












저자 박종렬은 14년간 공익 공익 분야에서 일했고 1994년부터 온누리교회에서 전임 사역을 시작해 미디어 연관 목회에서 많은 열매를 거뒀다.

안정적 사역을 하다가 50대 중반 2008년 조이어스교회를 개척했다.

난 믿음과 기도에 대해서 가장 관심이 많다.

내가 잘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어떤 고난에도 끄떡없고 기도생활을 잘한다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너무 행복하고 즐겁기때문이다.

사람들은 믿음이 있다면 모든 삶에서 형통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그런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안 풀리고 더 힘들게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당황하고 맥이 빠진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믿음으로 인한 구원은, 이 구원의 은혜는 형통함으로 인도하지만 형통과 동격은 아니다.

그 본래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고 지키고 인도해주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5)




세상 이치와 기준에 익숙해지면 믿음도 외형적이고 물질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적인 야망과 영적 세계에서 말하는 믿음은 분명 다르다.

믿음의 실체, 믿음의 크기는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다.

믿음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새기고 또 새기고 하나님을 끝간데 없이 무한대로 신뢰해야 겠네,,

인생이 너무 힘들 때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냐고 하는데 죽음직전까지 갔을 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붙들게 없었다.

난 어쩔 수 없이 하나님만 붙들었고 그런 나를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나의 손을 붙들어 주셨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히11;8, 22, 24)









믿음을 빼고 아브라함이나 요셉의 삶을 생각하면 미련하고 바보스러운 인생이다.

자기 꿈과 야망을 따랐다면 더욱 확실하고 유리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 가야 했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 믿음의 세계, 믿음의 원리는 세상 원리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세계를 만들고 또 다른 세상에서 살게 한다.

진짜 믿음은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것, 그 약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믿음의 근거는 내가 경험한 것, 내가 본 것, 내가  행한 것에 있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있다.

겨자씨만 한 믿음 자체로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믿음 자체가 기적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능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다.

겨자씨만 한 믿음은 믿음의 근거, 믿음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믿음의 근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눈을 뜨는 것, 그 예수를 내 삶과 능력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주님은 바라신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믿음의 근본이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기도는 영혼을 살리고 유지시키는 호흡이다.

모든 믿음의 사람에게 기도는 지켜야 할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삶 그자체이다.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 영으로 사는 존재임을 알게 하고 영의 능력으로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을 알도록 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18:1)

기도는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대화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내 안에서 일하시는 생명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기도는 그  모든 상황, 환경, 인간의 약점, 연약함을 돌파하는 힘을 준다.

사방이 다 막혔더라도 하나님을 찾고 예수께 나아가는 기도의 길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를 마음껏 펼쳐 보여주신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는 변함없는 진리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볼 수 있게 한다.

기도의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다.

겉으로 볼 때는 힘도 없고 볼품도 없지만  그 안에는 강인한 힘이 있고 말과 말 사이에 분명한 매듭과 확신이 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주변을 둘러보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도 믿을 만한 것 하나 없는데 그래서 외롭고 고독하고 두려움과 염려뿐인데 하나님은 늘 그 자리에 계신다.

기도만이 살길이다.

절망적 상황에서 절대자를 놓치지 않는 것이 정의를, 인자를 나타내는 겸손한 자의 영성이다.

하나님앞에 부르짖으며 침묵하며 몸부림치며 해왔던 모든 기도는 영원히 남아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고 드린 기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나라에 쌓아둔 자본금이다.

하나님은 성도가 그렇게 쌓아둔 기도를 세상에서 필요할 때마다 기도자의 삶에 필요할 때마다 크고 놀랍게 사용하신다.

개인에게 응답되지 않은 기도도 있고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모든 기도를 하나도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당신의 품 안에서 잘 품으시다가 어느 순간 때가 되면 강력한 생명력으로 나타나도록 사용하신다.

이것이 기도의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의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아버지의 품을 파고들어 그 품 안에서 둥우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많은 열매와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로 세상을 다스리시길 원하신다.

기도가 넘칠수록 세상은 좋아지고 아름다워지며 기도가 강해질수록 세상 세력은 약해진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우리의 기도에 달려 있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변함없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시2:8)

이 책은 내가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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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
정운찬 지음 / 파람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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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운찬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경기도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미국으로 건너 가 마이애미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프린스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하다가 1978년 말 귀국해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서울대 경제학부장과 사회과학대학장을 거쳐 서울대 제23대 총장에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40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한국 경제는 70여 년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눈부신 성장 뒤에는 미래를 위해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바로 함께 잘사는 사회, 더불어 잘사는 삶이라는 가치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한국 사회는 산업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소수에 의한 소득과 부의 독점과 기회의 불평등 현상이 나타났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

저자는 기회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인 격차는 용인되어야 하지만 기회가 평등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수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못한다면 적극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한다.

불공정한 상태를 방치하여 만들어진 격차, 부정행위로 만들어진 격차도 용인하면 안 된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경쟁이 효과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진 규칙과 감시기구가 중요한 이유는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여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함이다.

지금은 신뢰가 다 깨졌다.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이 승자와 패자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패한 구성원과 승리한 구성원 사이에 격차가 너무 벌어져 마침내 양극화가 고착되는 것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

경쟁에서 패하더라도 직업 교육과 업종 전환, 개인의 노력으로 재기할 수 있는 유연성과 유동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와 같은 동반 성장을 사회를 위해서는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활력이 저하된 배경에는 정부정책의 실패와 민간 부분의 소비와 투자 부진에 따른 수요 위축과 고용 및 기술력 둔화에 따른 공급 정체라는 요인이 있다.

저자가 동반성장이라고 해서 사회주의나 반자본주의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저자는 진짜 그런 이념적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는 동반성장은 좌우나 보수 대 진보라는 이념적 프레임 안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실사구시적 대안이었고 그동안 제기된 이념에만 치우친 반론은 매우 아쉽다고 했다.

동반성장이 사회주의적이라며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 반대하는 것은 동반성장이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은 채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격이라고 한다.

동반성장이 반자본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자기 스스로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동반성장은 앞서 가는 사람들에게 같이 가자고 말한다.

동반성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같이 가자는 말 속에 앞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 끌어내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의심한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끌어내리려 한다면 그것이 곧 반자본주의적 사상일 수 있다.

앞서 가는 사람이 있다면 뒤쳐지는 사람도 있는데 왜 앞서 가는 사람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가,,

그런 능력의 차이는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타고난 것인데 저자가 뭐기에 하나님이 만든 인간의 능력 차이를 부정하는가,,

그런 사상이 곧 사회주의 사상, 공산주의 사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자신의 이기심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저자는 이기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후생도 같이 생각을 하자고 하는 것 같다.

각자가 이익과 효용을 극대화하면 사회적 후생은 저절로 극대화되고 남 걱정할 필요 없이 자기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면 된다.

아담 스미스의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면 그걸로 충분하다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자본주의를 너무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과 행동 자체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닐뿐더러 인간이 모여 구성하는 사회는 더욱 간단한 원리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면 만사 오케이이다.

다른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면 경제학을 잘못 배운 것이고 자본주의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난 항상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가 이기심만 있는지 궁금했다.

자본주의 경제의 최고 이상은 이윤 극대화이며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무한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사회에 속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제활동을 연구할 때 개인 내면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사회 구성원의 하나라는 측면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활동을 이해하는 데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개인이라는 측면과 사회 구성원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성향과 사회적 성향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성향 때문에 인간은 도덕 또는 윤리의식을 가질 수 있다.




















아담 스미스는 인간이란 다른 사람들이 정의를 위반하는 것을 절대로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 사법당국은 정의라는 미덕의 실천을 강제하기 위해 영연방의 권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예방 조치가 없다면 시민사회는 모든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고 믿을 때마다 자기 손으로 보복에 나서는 유혈이 난무하는 무질서한 조직으로 변할 거라고 했다.

아담 스미스는 이기심에 대해서 무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담 스미스는 각 개인의 이기적인 추구는 사회적 다툼의 풍부한 원천이라고 했다.

그래서 정의법칙과 도덕법칙이 필요하다고 했다.

도덕법칙은 완벽하게 강제할 수 없으며 오직 본인 스스로의 절제에 의해 지켜진다.

정의법칙은 부분적으로는 개인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절제에 의존하지만 정의법칙이 확실하게 준수되려면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정의법칙이나 도덕법칙 같은 제재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판단은 편파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안 좋은 판단은 실어하고 자기기만을 할 가능성이 높다.

무엇이 맞고 적절한가에 대한 법칙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계속적으로 관찰한 뒤 이성과 추론의 기술을 사용하여 얻어지는 결과다.

도덕법칙에 대해 아담 스미스는 우리의 도덕적 능력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류 행복 증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신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의 힘이 닿는 한도까지 신의  계획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미스의 특징적인 주제인 인간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의 원래 의도와 관련이 없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신의 손이다.

신의 손에 따라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이루게 되는 경제원론에서는 그것을 효용의 극대화, 이윤의 극대화라고 한다.

스미스가 말했던 것은 인류의 최대 행복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이루게 되는 것은 인간을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신의 계획이다.

신의 손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능력을 통해서다.

도덕적 능력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사회적 후생이 최대화될 수 있다.

도덕 법칙을 따르지 않고 정의 법칙만 따른다면 즉 처벌받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법률만 지키는 식이라면 그 사회의 행복은 절대 극대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항상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에 대해서 궁금했었는데 저자가 그것을 풀어줘서 좋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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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
정운찬 지음 / 파람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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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실체를 분명히 알게 돼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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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성전입니다 - 몸으로 이루는 한 글자 영성
김관선 지음 / 두란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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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몸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뜻안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고 싶었다.

이 책은 몸에서 시작해서 삶으로 끝난다고 한다.

건강한 성전다운 몸과 삶이 펼쳐 낼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내야 한다.

몸은 하나님의 신비한 작품이다.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삶을 살아내고 몸의 가치를 높이는 건 자기자신이다.

하나님의 귀를 닮아가야 한다는 얘기가 마음에 든다.

영의 눈이 열리면 보이는게 많은 것 같다.

세상의 비난을 받고 있는 교회가 자성을 해야 하기도 하지만 억울한 면도 많다.

그래서 속상하다.

그래도 하나님을 따르는 건 소홀할 수 없다.

저자 김관선 목사는 목사라고 불릴 때마다 정말 목사답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직함에 맞는 태도는 화려한 경력이 아니라 삶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없다면 오랜 신앙생활이나 화려한 수식어가 붙더라도 공허할 수 밖에 없다.

저자의 아버지는 90세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건강하셨다.

저자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몸과 삶의 태도는 복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몸의 가치를 높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을 잇게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머리 되신 주님의 몸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 몸으로 삶을 가꾼다는 것이 성경 곳곳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도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1-2





사람은 몸을 가지고 존재한다.

몸으로 모든 행동을 한다.

몸으로 일을 하고 몸으로 즐거움을 느끼고 몸으로 이 세상의 모든 활동을 한다.

생각도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마음도 몸 안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신비하게 창조하셨다.

사람의 몸에는 100조 개의 세포 조직이 있고 25조 개의 적혈구와 250억 개의 백혈구가 있다.

몸은 하나님의 신비한 작품이다.

그런 몸을 성경적 태도로 견지해야 한다.

성경은 몸과 영을 같이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몸과 영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한다.

우리 몸은 영이 깃든 공간이다.

고귀한 영혼이 깃든 우리의 몸은 매우 소중하다.

영과 몸의 분리가 바로 죽음이다.

사람은 몸으로 삶을 가꾼다.

몸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는 위험하다.

이는 오랫동안 인류를 지배해 온 그리스 사상인 이원론의 영향으로 발생했다.

이원론은 몸음 천하고 영, 정신, 이데아, 로고스만 고상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단은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리스에서 말 그 이상의 개념을 담은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해 유대인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로고가 몸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강조한 것이다.





 

 

 

 

 

우리는 몸으로 하나님 앞에 산 제사를 드리는 삶을 산다.

몸이 움직여서 선한 일을 하고 예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역사를 이 세상에 펼칠 수 있다.

예수님도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사 우리를 살리셨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이 매우 귀하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깨우쳐 주었다.

몸을 더럽히는 성적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겨냥한 말씀이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영이나 정신, 마음으로가 아닌 몸으로, 행위로 하는 것이다.

몸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몸이 바르게 사용되려면 내 몸에 성령이 거하셔야 한다.

그러면 몸이 따라간다.

성령이 내 몸에 거하신다는 말은 내 생각, 내 마음의 작용을 성령이 움직이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몸은 자연스레 건강하게 활동한다.



















몸은 마음을 따라간다.

마음이 원하면 몸은 힘들어도 움직인다.

마음이 감사하면 몸도 감사를 표현하고 감사한 행동을 한다.

우리는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예배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한다.

신앙생활을 통해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마음이 원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26:4


몸을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은 귀한 일이다.

예수님은 금식을 하셨지만 신앙적으로 바르게 먹고 건강하게 일하는 데 초점을 맞추셨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을 해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의 모습이다.

몸을 과도하게 피곤하게 하면서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일 수 있다.

내 몸은 내가 관리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은 돈이나 여타의 재산, 재능, 그리고 자녀 등에 대해 우리 각자를 관리 책임자, 청지기로 세우셨다.

몸도 마찬가지이다.

몸을 잘 관리해서 건강한 삶을 살고 그 몸으로 가치 있는 일에 힘쓰며 살아야 한다.

몸이 약해 힘든 사람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

사도 바울, 디모데 등 믿음의 선진들도 병을 안고 살았다.

죽지는 않는 병이지만 가시처럼 불편함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하나님은 바울과 디모데의 병을 고쳐 주지 않으시고 그 약한 몸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셨고 하나님만이 힘이 되심을 알게 하셨다.

그 사실을 알기에 그들의 병은 선한 일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에 사용할 때 내 몸의 부가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최고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진정 아름다운 몸이란 아름다운 삶으로 이어지는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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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글쓰기 - 자발적 글쓰기를 시작하는 어른을 위한 따뜻한 문장들
이은경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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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일단은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저자는 힘든 일들을 전부 글로 승화시켰다.

다른 사람들과의 글을 비교하지 말고 자신감을 꾸며낸다는 것이 마음에 드는 글귀이다.

글은 매일 쓰고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도 밥을 먹듯이 그냥 또 쓰고 해야 한다는 얘기는 새겨야겠다.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는 건 아주 좋은 현상이라고  한다.

글을 쓸 수 있는 감정의 상태가 된다고 한다.

해런 건 진짜 좋은 거다.

저자의 글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현실과의 밀착이라고 하는데 그런 단어들도 마음에  든다.

글을 쓰면 우울증도 벗어나고 다른 사람들도 위로할 수 있는 것 같다.

저자 이은경은 교육대학교를 졸업하던 해부터 15년간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5년 전, 출판계약금 백만 원을 벌고 싶다는 절박한 이유로 갑작스러운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 덕에 길었던 공무원 생활을 정리한 후 작가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오랜 우울증과 결별했다.

지금은 매일 글을 쓰고 쓴 글을 모아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글을 좀 써볼까 싶은 마음으로  일기쓰기를  시작했다면 혹은 마침 지금 작고 초라해 보이는 글을 끄적이던 중이었다면 이 책은 지금이 딱 볼 때이다.

뭐라도 쓰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바라는 만큼 시간을 실컷 쏟아야 한다.

 저자는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다.

애비게일 토머스는 마흔일곱이 되어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지만 어떤 학위가 있어야 하거나 어떤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물론 아무도 어떤 집단에 가입하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그저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비게일 토머스작가의 시작이었다.

글을 쓰는 법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읽고 공부하는 것, 그리고 직접 써보는 것이 글 쓰는 학습법이다.

글을 쓰는 것은 누가 시켜서 쓰는 게 아니라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글을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고 그저 시작하는 게 어른의 글쓰기이다.

일단 시작부터 해봐야 한다.

글 쓰고 싶다는 사람은 자주 만나지만, 이제는 정말 글쓰기를 시작하겠다는 사람은 여간해 만나지 못한다.

쓰기만 하면 더 잘 쓸 수 있게 될 수도 있을 텐데 시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작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글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지금의 우리가 어른이라서, 시키는 사람도 검사하는 사람도 없는 어른이라서 그렇다.

쓴다고 칭찬해 줄 사람도 없고, 안 쓴다고 혼낼 사람도 없다.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이 제법 있지만 이 점은 확실히 별로이다.

최근에 이것과 비슷한 일이 작가의 가족 이야기다.

아빠와 아들이 동시에 다이어트를 시작했는데 아들은 9킬로그램 감량에 성공했고 아빠는 4킬로그램이 붙었다. 아들에게는 적게 먹어라, 간식 끊어라, 일찍자라, 운동하라는 잔소리를 달고 사는 어른이 곁에 있었지만 아빠에게는 그런 존재가 없었다. 잔소리 하는 이가 없으니 아빠의 다이어트는 흐지부지되다가 요요까지 와 버렸다. 글쓰기도 이와 같다.

아이들은 매일 저녁 일기장을 펼쳐 강제적인 글쓰기를 하면서 실력을 쌓아가는 반면 어른은 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쓰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른의 글쓰기 습관은 매일 써야 한다.

출근하듯, 밥을 짓듯 해야 한다.

이 책을 펼쳐 들어 읽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일 글을 써볼 생각이 생겼다고 봐도 될 것이다.

글쓰기 습관이나 잘쓰기 위해서는 일단 시작해야 한다.

저자는 처음엔 잘 쓰기보다는 일단 쓰기 시작부터 해보라고 권한다.

글을 쓰고 싶다면 영감을 기다리기 보다는 영감을 찾아 나서야한다.

글을 쓰고 싶다면 메모지와 펜을 들고 영감을 찾아 나서야 한다.

잭런던은 영감이 찾아오기를 기다고만 있을 수 없다.

몽둥이를 들고 영감을 찾아 나서야 한다라고 했다.

잭런던은 미국의 소설가이다.

잭런던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낭만적으로 다루어서 잭런던의 작품이 가장 많이 번역된 미국 작가에 속한다.

잭런던은 힘든 삶을 낭만적으로 표현했다.

또 이렇게 매일 찾아 나서는 날 중 어느 하루쯤은 영감이라는 놈이 찾아 나서기도 전에 책상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글쓰기에도 가끔 요행을 바라기 위해서는 매일 잭런던의 말대로 몽둥이를 들고 영감이라는 놈을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말로는 몽둥이라는 뜻은 굵고 가름한 막대기다.

아마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다듬어라는 것일 것이다.

​저자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이런 막대기를 들고 교실에 들어갔을 것이다.

영감이 오든 오지 않든 글이 술술 잘 써지는 날도 있지만 유난히 막히는 날도 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쓰다가 자꾸 지우게 되고 다 쓴 글은 도무지 엉망인데 다른 얘기로 옮겨보려니 쓸 만한 소재도 딱히 떠오르지 않을 때도 많다.



 

 

저자는 지나고 보니 영감과 글쓰기는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영감은 글쓰기를 위한 필수요소가 아니다.

 영감이 찾아와주면 글을 좀 더 쉽게 쓰거나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감이 자기 책상에 와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노트북을 켜고, 다이어리를 펼쳐야 한다.

영감과 상관없이 오늘의 계획한 시간과 분량만큼 쓰는 것이다.

어른의 글쓰기는 때론 베껴 쓰기도 해보는 것이 좋다.

쓰려고 앉을 때마다 쓸거리가 이것저것 떠오른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런 일은 여간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뭔가를 좀 써보고 싶고 뭐라도 당장 써야 할 것 같다면 출발은 베껴 쓰기이다.

자신의 생각이 전혀 담기지 않은 누군가의 글을 그대로 베껴서라도 쓰기 시작하면 오래 기다리지 않아 자신의 생각이 담긴 글이 따라 나오게 된다.

또 어떤 이에게 베껴 쓰기는 대단한 문장을 흉내 내어 잘 쓰는 것에까지 닿지 못했다 하더라도 마음에 담고 싶은 괜찮은 문장 한두 가지쯤은 갖게 될 수 있는 유익한 작업이 될 수 있다.

글을 쓰기 어려운 이유는 어렵게 쓰려 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쓰고 싶은 이유는 생각보다 훨씬 글을 쓰는 이의 허영, 교만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많이 아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고, 똑똑한 사람같이 보이고 싶은 것이다.

같은 말을 굳이 한자어, 영어로 쓰고 거창한 서술어를 사용해 문장을 길게 늘어놓는 것도 그런 것이다.

​쉽게 쓰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렵고 멋진 글이 아니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다.

뛰어난 글에 앞서 자연스런 글이다.

글을 쓸 때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는 것도 괜찮은 글이 될 것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댓글 중 하나가 재미, 감동, 교훈을 모두 잡았다라는 표현이다.

쓰는 사람으로서의 목표가 꼭 그렇다.

우리도 그런 글을 쓰면 좋겠지만, 재미, 감동, 교훈이 담긴 글, 만만치 않는 과제이다.

쓸 수 있었으면 진작 썼겠지만 글을 쓰다 보면 한 가지 잡기도 힘이 든다.

감동을 잡자니 글마다 눈물 짜는 신파가 될 것 같고, 교훈을 잡자니 까딱하다간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지루한 글이 되기 때문에 가장 만만한 재미를 잡는 것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재미있는 글을 위한 노력은 읽는 이를 위한 일인 동시에 쓰는 이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글은 아무리 재미있어도 유튜브와 넷플릭스 아래이다.

그러나 사실 글의 재미라는 것은 더욱 근본적으로는 쓰는 이를 위한 장치에 가깝다. 지루한 글을 쓸 때는 쓰는 사람도 흥이 나질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재미있는 글은 어떻게 쓰는 건지 궁금하다.

재미있게 잘 읽히는 글에는 이런 특징이 있다.

솔직함이 글의 최우선이다.

부정적인 감정도 글감이 될 수 있다.

하루 동안 감정변화를 분 단위로 기록해보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중 어떤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까?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지고 있는, 가져도 괜찮은 자연스런 감정이라는 걸 편안하게 인정해본다.

하루를 보내며 말도 못하게 억울하고, 속상하고, 답답하고, 화나는 상황을 만나고 있다면 반가워 해도 좋다.

 그 감정을 토해 내듯 후련하게 써버리는 덕분에 오늘도 제법 괜찮은 글을 쓸 가능성이 높아진다.

글은 자신을 표현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그게 경험이든 감상이든 느낌이든 정보든 충고든 제안이든 경고든 모든 것이 글을 쓰는 데는 필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이 알고 경험한 모든 것이 자신의 글이 될 수 있다 

이 책을 읽어보니 사람들은 자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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