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
정운찬 지음 / 파람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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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운찬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경기도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미국으로 건너 가 마이애미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프린스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하다가 1978년 말 귀국해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서울대 경제학부장과 사회과학대학장을 거쳐 서울대 제23대 총장에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40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한국 경제는 70여 년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눈부신 성장 뒤에는 미래를 위해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바로 함께 잘사는 사회, 더불어 잘사는 삶이라는 가치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한국 사회는 산업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소수에 의한 소득과 부의 독점과 기회의 불평등 현상이 나타났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

저자는 기회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인 격차는 용인되어야 하지만 기회가 평등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수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못한다면 적극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한다.

불공정한 상태를 방치하여 만들어진 격차, 부정행위로 만들어진 격차도 용인하면 안 된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경쟁이 효과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진 규칙과 감시기구가 중요한 이유는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여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함이다.

지금은 신뢰가 다 깨졌다.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이 승자와 패자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패한 구성원과 승리한 구성원 사이에 격차가 너무 벌어져 마침내 양극화가 고착되는 것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

경쟁에서 패하더라도 직업 교육과 업종 전환, 개인의 노력으로 재기할 수 있는 유연성과 유동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와 같은 동반 성장을 사회를 위해서는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활력이 저하된 배경에는 정부정책의 실패와 민간 부분의 소비와 투자 부진에 따른 수요 위축과 고용 및 기술력 둔화에 따른 공급 정체라는 요인이 있다.

저자가 동반성장이라고 해서 사회주의나 반자본주의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저자는 진짜 그런 이념적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는 동반성장은 좌우나 보수 대 진보라는 이념적 프레임 안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실사구시적 대안이었고 그동안 제기된 이념에만 치우친 반론은 매우 아쉽다고 했다.

동반성장이 사회주의적이라며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 반대하는 것은 동반성장이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은 채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격이라고 한다.

동반성장이 반자본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자기 스스로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동반성장은 앞서 가는 사람들에게 같이 가자고 말한다.

동반성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같이 가자는 말 속에 앞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 끌어내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의심한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끌어내리려 한다면 그것이 곧 반자본주의적 사상일 수 있다.

앞서 가는 사람이 있다면 뒤쳐지는 사람도 있는데 왜 앞서 가는 사람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가,,

그런 능력의 차이는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타고난 것인데 저자가 뭐기에 하나님이 만든 인간의 능력 차이를 부정하는가,,

그런 사상이 곧 사회주의 사상, 공산주의 사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자신의 이기심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저자는 이기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후생도 같이 생각을 하자고 하는 것 같다.

각자가 이익과 효용을 극대화하면 사회적 후생은 저절로 극대화되고 남 걱정할 필요 없이 자기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면 된다.

아담 스미스의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면 그걸로 충분하다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자본주의를 너무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과 행동 자체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닐뿐더러 인간이 모여 구성하는 사회는 더욱 간단한 원리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면 만사 오케이이다.

다른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면 경제학을 잘못 배운 것이고 자본주의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난 항상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가 이기심만 있는지 궁금했다.

자본주의 경제의 최고 이상은 이윤 극대화이며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무한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사회에 속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제활동을 연구할 때 개인 내면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사회 구성원의 하나라는 측면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활동을 이해하는 데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개인이라는 측면과 사회 구성원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성향과 사회적 성향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성향 때문에 인간은 도덕 또는 윤리의식을 가질 수 있다.




















아담 스미스는 인간이란 다른 사람들이 정의를 위반하는 것을 절대로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 사법당국은 정의라는 미덕의 실천을 강제하기 위해 영연방의 권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예방 조치가 없다면 시민사회는 모든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고 믿을 때마다 자기 손으로 보복에 나서는 유혈이 난무하는 무질서한 조직으로 변할 거라고 했다.

아담 스미스는 이기심에 대해서 무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담 스미스는 각 개인의 이기적인 추구는 사회적 다툼의 풍부한 원천이라고 했다.

그래서 정의법칙과 도덕법칙이 필요하다고 했다.

도덕법칙은 완벽하게 강제할 수 없으며 오직 본인 스스로의 절제에 의해 지켜진다.

정의법칙은 부분적으로는 개인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절제에 의존하지만 정의법칙이 확실하게 준수되려면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정의법칙이나 도덕법칙 같은 제재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판단은 편파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안 좋은 판단은 실어하고 자기기만을 할 가능성이 높다.

무엇이 맞고 적절한가에 대한 법칙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계속적으로 관찰한 뒤 이성과 추론의 기술을 사용하여 얻어지는 결과다.

도덕법칙에 대해 아담 스미스는 우리의 도덕적 능력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류 행복 증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신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의 힘이 닿는 한도까지 신의  계획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미스의 특징적인 주제인 인간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의 원래 의도와 관련이 없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신의 손이다.

신의 손에 따라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이루게 되는 경제원론에서는 그것을 효용의 극대화, 이윤의 극대화라고 한다.

스미스가 말했던 것은 인류의 최대 행복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이루게 되는 것은 인간을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신의 계획이다.

신의 손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능력을 통해서다.

도덕적 능력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사회적 후생이 최대화될 수 있다.

도덕 법칙을 따르지 않고 정의 법칙만 따른다면 즉 처벌받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법률만 지키는 식이라면 그 사회의 행복은 절대 극대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항상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에 대해서 궁금했었는데 저자가 그것을 풀어줘서 좋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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