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국가의 위대한 민주주의 - 국가의 미래, 어떻게 만들 것인가
윤비 지음 / 생각정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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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저자 윤비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초청 장학생으로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훔볼트대학교에서 고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사상을 강의하고, 한국연구재단 사회과학단장을 역임했다. 2010년부터 성균관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며, 현재 사회과학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주목받는 정치학자로, 파리 고등사회과학원과 뉴욕대 레마르크 연구소, 에를랑겐-뉘른베르크 국제 인문사회 컨소시엄 등 여러 해외 연구기관의 초청을 받았다. 저자는 글로벌한 사람같다.

오늘날 국가는 국방뿐만 아니라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토머스 홉스는 국가를 ‘리바이어던’이라는 괴물에 비유했지만, 그것이 정말 괴물이 될지 아니면 선한 수호신이 될지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에 달려있다. 권력이 시민의 감사와 견제를 벗어나는 순간, 국가는 언제든 ‘위험한’ 존재로 돌변할 수 있다. 민주주의만이 국가를 통제할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세계 민주주의 쇠락과 그 풍랑 속에 갇힌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다시금 왜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이다.

한국 민주주의가 지금의 한계를 넘어 질적으로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하기 위한 해법을 모색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국가,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관심과 의견,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국가의 정치와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이런 다양한 목소리에 고르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 공동체는 분열되고, 궁극적으로는 붕괴에 이를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국가는 기업 조직과 다르며, 기업처럼 운영될 수 없다. 기업은 이윤 창출이라는 한 가지 목표에만 집중하여 성과를 낼 수 있지만, 국가를 그렇게 운영한다면 전체 공동체는 크고 작은 혼란에 빠지기 쉽다. 국가는 모든 사람들이 부당하게 억압받거나 차별받지 않고,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이해를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유, 공정, 연대는 단지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국가를 국가답게 만드는 핵심 가치다.



민주주의가 권력의 폭주를 막고 억압과 독점을 대신하여 세우려는 것은 자유와 공정이다. 여기서 자유와 공정은 단지 정치적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 차별 없이 참여할 권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정치적 권리를 통해 사회 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부당하게 이익을 얻거나 불이익을 당하거나, 혹은 서로 속박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 때로 민주주의 없이도 사회∙경제적인 공정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변덕스러운 대중보다 선택받고 훈련된 엘리트들이 훨씬 더 공정하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없이 공정하고 그래서 살 만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호언장담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현실이 되어본 일이 없다. 박정희 정권의 과오는 이를 잘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의 문제점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데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경제 발전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비록 권위주의적이었지만 강한 리더십을 발휘해 과감한 인프라 투자와 공업화를 추진함으로써 국가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추상적인 민주주의 가치와 손에 잡히는 경제 발전 성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매우 황당한 논쟁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이야기했듯, 박정희가 무너뜨린 민주주의의 가치는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박정희 권위주의는 수출과 산업화 그리고 극단적인 반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다른 의견이나 이해를 표현하고 실현할 기회를 차단했다. 그 결과 한국 사회의 자유와 공정이 크게 침해되었고, 심각한 기회를 부조화와 불균형이 자리 잡았다.

역사는 어떤 국가도 그런 부조화와 불균형을 장기적으로 버텨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박정희 정권은 한국 사회를 심각하게 분열시켰고, 그 후유증은 그가 사망한 지 4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곳곳에 남아 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벌인 잔혹한 진압에 가려 잘 이야기되지 않지만, 19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비극의 원인은 정권 유지를 위해 광범위한 시민들의 정치 권리를 박탈하고 지역 간 대립을 부추긴 박정희 정권에 있다.

만약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가 10년만 더 지속되었다면, 한국 사회는 총을 든 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심각한 대립과 충돌에 빠져 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는 그나마 이룩한 경제 발전의 성과마저 갉아먹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큰 성과를 가져오는 대통령은 아직도 없는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이 세계를 다니면서 많은 성과를 냈는데 비상계엄을 했다고 날려버리는 비상계엄무지성때문에 답답하다.



반세기 전 박정희가 꿈꾸었던 발전 모델을 오늘날 다시 추진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과거 중국의 정치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현재 중국 국민들의 상황을 다각적으로 고려할 때, 정치 참여의 문을 개방하면 오히려 혼란이 발생하고 국가 공동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중국 특수론’을 내세우곤 했다. 이후 중국이 정치∙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한편, 좌익 포퓰리즘의 득세로 미국과 유럽의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중국을 ‘능력주의’ 국가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중국 공산당은 엄격한 선발과정과 장기간의 교육 및 훈련과정을 통해 유능하고 책임감 있는 엘리트들을 양성하며, 이들이 중국의 사회∙경제적으로 공정한 체제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중국 사회 전반에 걸친 극심한 불평등과 부패, 비효율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반세기 전 한국에서처럼 박정희식 발전 모델이 중국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특권과 부패를 멀리하고 공동체의 사회적∙경제적 자유와 공정을 위해 헌신하는 엘리트의 지배라는 이념은 한때 플라톤이 ‘수호자’ 개념으로 구상했지만, 결국 자유주의 시대에 와서 포기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아래로부터의 참여와 통제라는 원칙으로 대체되었다. 박정희식 모델은 대한민국에서만 박정희가 잘해서 성공하는 것이지 중국은 성공 못할거다.

서구의 ‘지혜’가 중국을 포함한 어느 사회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성장의 열쇠일 뿐 아니라 공동체를 통합하는 근본적인 토대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요인들을 대의제 붕괴, 내각제 강화, 진연논리의 확산, 관료조직의 과도한 영향력과 일탈 등이 그 주요원이다. 물론 이외에도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으며, 이들은 때론 개별적으로, 때로는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미친다.

국가들의 쇠퇴와 몰락은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거울이 될 수 있는지 진단하는 것이다. 세게에서 우리나라를 좌파가 집권하면 베네수엘라가 된다는 얘기가 많다. 베네수엘라는 좌파 권위주의의 등장, 그 안에서 여전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부패의 사슬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베네수엘라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신자유주의적 입장을 지지하는 언론이나 학자, 정치인들때문이다. 그들은 베네수엘라를 국유화와 퍼주기식 포퓰리즘으로 국가를 망쳤다. 좌익 포퓰리즘의 사채는 그렇게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니라 경제시스템의 전면적 붕괴였다.

경제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2019년, 베네수엘라의 최저임금은 월 7달러에 불과해 겨우 4일을 버틸 수준이었다. 생필품은 물론 기본 의약품마저 부족해 시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2024년에도 전체 인구의 82퍼센트가 빈곤상태에 있고, 53퍼센트는 극빈층에 속한다. 이렇게 경제가 붕괴되면서 사회인프라도 심각하게 붕괴되었다. 무엇보다 치안이 무너져서 갱단이 판을 치고 공권력이 이를 누르기는커녕 함께 공모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민주주의도 중요하지만 경제 정책도 이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민주주의와 경제는 같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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