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력도 없고 못 알아보는 사람이 부지런만 해서 사고치고 다니면서 창조력이 없다면 가만히 있는 게 최고다. 창조적인 사람을 내쫓으면 회사가 망한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사실상 오늘 당장 우리가 넥타이 색깔 하나를 옷과 매치하는 감각이 있으면, 책상에 깔아놓은 색채 하나를 보면 미래의 창조성이 보인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생명자본주의라는 단어가 거창하게 들리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고 현재 진행형이다. 문명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고, 또 경제는 잘사는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올림픽도 그 동안 북반구에서 치러졌고 남반부에서 치러진 것은 호주 올림픽이 유일했다.
지금 세상은 바뀌어서 인도나 인도네시아가 경이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끝이 없지만, 쓴 걸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직도 원시적, 비문화적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다. 서양 사람들은 쓴 것을 못 먹는다. 문명화된 사람은 쓴 것을 못 먹는다. 그래서 한국 식생활을 보면 한국 문화가 얼마나 원시적, 문화적으로 극과 극이 잘 섞였는지, 세계에서 이런 유례가 없다. 일본과 중국도 나물을 잘 안 먹는다. 한국은 지금까지도 나물을 먹는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채집 문화를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에 김을 먹고 씀바귀도 그대로 먹는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쑥과 마늘이 나물 문화다. 그 마늘이 아니고 야생 달래마늘이다. 어쨌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온 인간들의 문화적 문명적인 생활소재, 먹는 것의 소재, 요리하는 방법, 디자인하는 방법 등 복잡한 여러 문제를 요약해보면 우리 미래가 보이고 현재가 보인다.
우리 바지 디자인을 보면 세계에 없는 아주 특이한 디자인이다. 서양의 바지는 전부 밀착되어 있는 패션인데 한국바지는 헐렁하다. 유럽에서 말하는 바지는 주로 호복이라고 해서 유목민들에게서 전파된 스커트가 변형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바지를 접어서 입는다.
서양 옷은 정확하게 한 치, 두 치 재는데, 우리 바지는 정확하게 재지 않는다. 허리통이 굵은 바지를 접어서 입는다. 서양의 의복 디자인은 재단부터 시작한다. 저자의 사례들은 재미있는 것 같다. 창조나 문화는 전부 언어에서 나온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는 언어로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한다.
워드파워는 무기나 돈보다 강력하다. 언어는 도구적 기능이 80퍼센트이고 미적 공감이 20퍼센트이다. 20퍼센트에는 문화와 영혼이 있어서 말속에는 삶과 죽음과 사랑의 자력을 가진다. 나도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서 일본잡지를 보다가 일본의 헤어나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 패션도 헐렁하게 입는다. 헐렁하면 편하고 부담없이 옷을 입을 수 있을 수 있고 활동력도 생긴다. 언어에서 모든 것들이 확장되고 무브가 일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