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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의 하루
홍남권 지음 / 파코디자인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612년에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범했던 수양제는 살수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하고 돌아갔다.
당태종 이세민은 대륙의 자존심 회복과 동북쪽으로의 세력확대를 위해
50만 대군을 이끌고 645년 고구려의 안시성에 이른다.
그는 이미 요동성을 비롯한 여러 개의 성을 함락시킨 터라 빠른 시일 안에 성의
항복을 받아내고 평양성으로의 진격을 생각했지만 안시성 전투에서 대패한다.
수양제가 그랬듯이 당태종 역시 놀라 데인 가슴을 내리쓸며 분루를 흘리고
그들 나라를 향해 갔을 것이다.
중,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살수대첩과 안시성전투에 대해 배우면서 대륙의 많은
군사와 싸우면서도 한치의 물러섬이 없이 전투에 임했던 고구려의 호쾌한
기개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소설 <안시의 하루>는 비교적 간단하게 전해지는 역사적 사건 '안시성 전투'에
그 뼈대를 일으켜 세우고 살을 붙였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은 정사에는 이름이 전하지 않고 송춘길의
'동춘당선생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등 야사에만 나온다.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개모성.요동성.백암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말갈 연합군대 15만을 무찌른 뒤 안시성을 공격하자 군사.백성들과
힘을 합쳐 당군을 물리쳤다.
당군이 성 남동쪽에 토산(土山)을 만들어 공격하자 성 위에 목책을 쌓아
대응하였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당군이 60여 일 동안 연인원 50만을 동원하여 성보다 높은 토산을 구축하자
토산을 공격, 정상을 점령하고 3일 동안 당군의 총공세를 물리쳤다."
~ 네이버 백과사전
<안시의 하루>의 기본 얼개는 네이버 백과사전의 소개와 같은 내용을 토대로 한다.
여기에 더한 작가의 기발한 문학적 상상력은 정사와 야사에서 차용한 안시성 싸움을
보다 극적으로 재구성, 역사 속에 스러져간 사람들을 깨우고 그 인물들을 통해
생생한 역사를 느끼고 되새기게 한다.
"겨울에 접어들면서 날씨가 추워지고 군량이 다하자 당군은 퇴각하였는데,
양만춘이 성 위에 올라가 송별의 예를 하니 당태종이 그에게 명주 100필을
주면서 성의 방어를 하례하고 고구려왕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도록
격려하였다고 한다." ~ 네이버 백과사전
소설에 나오지는 않지만...
전투 이후의 기록은 정변을 일으킨 연개소문에 홀로 대항하여 임금에 대한
의리와 성주로서의 지위를 지켰던 성주 양만춘의 사람됨을 알게 한다.
소설속에서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하루'라고 불리우는 여(女)성주로 재탄생한다.
'하루'는 고구려말로 봄이라는 뜻이다.
여성이며 양만춘 성주로 설정한 하루를 보면서 얼핏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이 떠올랐다.
<바람의 화원>이 김홍도의 여화공 신윤복에 대한 그리움을 단장의 아픔으로
묘사했다면 <안시의 하루>에서 하루와 계백과의 사랑 역시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애절하게 그려진다.
몰락한 왕족으로 그려지는 온달의 아내 평강공주는 백성들이 '고구려의 어머니'로
칭하며 존경하는 정신적 지주이다. 온달이 죽고 홀로 되어 안시성에 머무는 그녀는
양만춘, 즉 하루의 할머니이다.
계백은 백제의 장군이 아니라 의자왕의 아우로 설정되는데 부하인 타로와 함께
여러 나라를 돌면서 정탐, 협상을 통해 백제가 패권을 잡기를 희망한다.
그는 스스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멍에를 지고자 한다.
(저자는'멍에를 진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아마도 나라의 지도자가 권력욕과
사리사욕 추구에서 벗어나 백성을 사랑하며 선정을 베풀고 백성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 표현으로 생각된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계백과 대치와 협력을 번갈아 했던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 일본에 가서 천황의 시조가 되는데 그것은 황당하지만
참으로 기분 좋은 가정이다.
그는 타로로 하여금 안시성 전투에 관한 책을 쓰라고 종용한다.
백제와 고구려는 망한 나라이고 후일 강자에 의해 쓰고 보존된 역사는 거짓이므로
왜곡된 안시성 전투와 계백에 대한 올바른 기록이 세상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의 치욕과 하루성주의 이름을 자신의 기록에서 지웠고 이후
고구려라는 그 위대한 이름이 사라졌으니 승자로 남은 당나라의 사서만이 모두
사실인 것처럼 전해질 것이 뻔하다. 현실의 승자가 기억하고 싶은 추억만,
남기고 싶은 자랑거리만 역사에 남을 것이다." ~ 350쪽 연정토
"누구 하나는 제대로 기억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어느 누구 하나는!
그들이 숯처럼 뜨겁게 온몸으로 생생하게 삶을 살아갔다는 것을." ~ 서문 10쪽 연정토
타로는 30년 세월 동안 계백의 뒤를 따랐고 계백이 친아우처럼 여겼던 신하였다.
계백 왕자가 황산벌 전투에서 자기의 운이 다함을 알고 연정토에게 몸을
의탁하라 명했다. 그의 회고가 이 글로 서술된 셈이다.
"이제 그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설 것이다. 어찌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만 있을쏘냐.
40년 전 그 세상은 암팡진 현실주의자의 것만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이상을
뚜렷이 그리려했던 사람도, 꿈꾸는 멋쟁이 낭만주의자도 제가 설 자리는 분명히 있었다.
부라퀴같은 기회주의자도. 심지어 그 암울했던 현실에서 도피하려 했던 사람마저도
역사의 한 장을 너끈히 채울 것이다." ~ 서문 12쪽 타로
하루와 계백, 평강공주, 계백을 사모하는 여인 비류, 비류를 연모하는 계백의 시종 타로,
하루성주와 평강공주를 지키고 고구려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안시성의 백성들,
당태종 이세민과 당의 군사들까지 모두 이 글의 주인공이다.
저자는 후기에서 '단 한 분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10만 안시성민께 이 글을 바친다'고 한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러져간 민초들의 삶은 때로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오고
전쟁의 굴레를 피하지 못하고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그들의 삶이 아프게 느껴진다.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근본과 의를 저버리지 않는 하루와 계백의 사랑 또한 안타깝다.
백성을 위해 기꺼이 멍에를 지는 하루와 평강, 계백의 모습에서는 올바른 지도자의
모습과 철학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역사는 흐른다.
역사의 각 페이지에 이름을 남겼거나 이름을 남기지 않은 무명씨들 모두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저자는 계백, 평강, 양만춘 등 역사에서 잊어버리면 안될 사람들을 소설에서 부활시켜
다른 인물로 살짝 옷을 입혀 각색하였다.
그 시도가 유쾌하게 다가옴은 소설속의 그들은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대의를 위해
권력에 몸을 기대지 않기 때문이다.
고구려 민족의 기상과 역사의 자리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 온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느껴진다.
"안시는 고구려의 영혼이자, 자존심입니다. 여러분이 고구려의 역사를 새로
쓸 것이며, 영원토록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 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