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층적 관점에서 볼 때 중하위계층 출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군부의 눈에 비친 민간인 정부, 즉 이승만정부나 장면정부는 무능한 정부였다. (중략) 이들은 조직 및 위기관리능력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현대적 국가를 수립하고 한국전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군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진화된 조직으로 발전해 있었다. 한국을 냉전의 전초기지로 인식하고 있던 미국에게 군은 가장 필요한 공적 조직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군에 집중 투입했던 자원의 양은 여타 부문에 비해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 P51

군에 대한 민간사회의 존중은 그다지 높지 못했다. 무엇보다 군은 열위계층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던 다소 사회적으로 취약한 집단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개혁적 성향의 젊은 장교들은 박탈감이 매우 심했다. 민간정치는 부패하고 비효율적이라는 불신이 강했다. 그리고 부패한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따라서 젊고 바르고 유능한 자신들이 국가운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이 점점 더 팽배해갔다. - P52

이들은 정치체제를 장악하자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적 정권을 수립했다. 이승만정부나 장면정부와는 달리 민간관료 엘리트들과 연합하여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수립했다. (민군엘리트 연합체제) - P52

박정희를 비롯한 당시의 군부엘리트들은 일본 식민통치 그리고 만주와 일본에서의 사회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민주주의 체제보다는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하는 파시스트적 체제를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 P53

국가주도적 성장전략은 불균형성장전력을 수반했고 이는 결국 이승만정부 때보다도 더 강하게 경제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도농간의 불균형, 대중소기업간의 불균형 그리고 소득분배상의 불균형이 이 기간에 비롯되었다. - P58

요컨대 박정희정부는 이전의 민간정부들에 비해 개선된 정부 능력과 강한 자율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시장을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통솔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 결과 경제성장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점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불균형성장정책에 따른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 P69

1960년대와 비교해 볼 때 국가의 시장에 대한 간섭은 보다 심화되었다. 박정희정부는 보다 심화된 권위주의적 체제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고 총력적 지원전략과 수입대체산업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 P79

제4공화국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한 개념은 단연 전쟁이었다.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정치와 경제체제가 재조직되었다. 이로써 국가는 통치에 전념하게 되고 민주적 정치는 실종되었다. 경제는 통치에 필요한 자원을 산출해 내기 위해서 국가에 의해 동원되었다. - P80

중화학공업과 종합무역상사에 대한 특혜적 정부지원이 소수의 재벌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으로 인해 제3공화국 정부에 의해 시작된 불균형경제성장은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유신체제하에서 재벌기업들은 정부의 보호에 힘입어 괄목할 성장을 경험했다. - P85

박정희정부가 1970년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도농간 불평등의 심화를 교정해보려는 시도였다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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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 38~39쪽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인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차혜원 옮김, <옹정제>, 이산. '옮긴이의 말', 223~226쪽


18질 112책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주비유지>는 옹정제와 232명의 관료가 주고 받은 서간문을 모아 출간한 자료로 당시 사회의 심층부를 그대로 보존해 놓은 일종의 타임캡슐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실록 등의 공식기록이 사실의 표면적인 부분을 스치고 지나간 정도라면 이 자료는 그 핵심부분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가서 살아 있는 정보를 제공해준다.

(...)

<옹정제>를 세상에 나오게 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두말할 나위 없이 미야자키 자신의 역사학자로서의 소명의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시야에 사라져 있었으나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을 소개하고 기억시킴으로써 역사를 제자리에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역사의식이 이 전기의 전편에 흐르고 있으며, 이것이 옹정제의 삶에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

<옹정제>는 일반인을 위하여 쓴 비전문서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이후 40여 년간에 걸쳐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는 이른바 '옹정학'의 출범을 알리는 서곡이기도 하다. 미야자키는 1949년부터 교토 대학 내에 옹정주비유지 연구반을 만들어 <주비유지>의 윤독을 시작하였고 수업교재로도 활용한다. 이때부터 구어체와 속어가 섞여 난해하기 그지없는 <주비유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반에 의해 완전히 독해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단순히 읽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고유명사와 법제상의 술어, 지방풍속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어휘를 카드에 채록하는 색인작업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40여 년간 매주 거의 빠짐없이 윤독회가 이루어졌는데, 모두 99명의 인원이 참가하였던 대사업이었다.

<주비유지>의 윤독회가 수백회 거듭되면서 연구원들 사이에는 이렇게 반복되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빠른 결론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하여 연구반의 또 다른 기둥이었던 아베 다케오라는 학자는 이렇게 일축하였다고 한다. "이런 것을 해나가는 일, 그게 바로 학문이라는 겁니다"라고.

(...)

1986년 그 총결산이 <옹정시대의 연구>라는 방대한 단행본으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또한 1990년대에는 그동안 정리한 카드 12만 매 분량의 색인작업을 완성하였다. 이 색인은 단순히 어휘의 소재를 밝히는 데 머물지 않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후의 문장을 몇 구절씩 함께 채록한 일종의 난해어 사전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청대사 연구자들이 <주비유지>라는 망망한 사료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데 있어 가장 든든한 등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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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6 18: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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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7 2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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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7 2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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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7 2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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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7 2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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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7 2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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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반론과 항변이 많긴 하지만,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전쟁이 그때 시작되지 않았다면, 김일성 역시 좀더 이른 시점에서라면 몰라도 그때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가면 우리는 내전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온다는 진리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내전은 다양한 원인으로 일어나며, 모든 이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먼저 한국을 아무 생각 없이 갈라놓고 식민지 정부기구를 재건한 미국과 그 기구에 봉직한 한국인들에게 책임이 있다. (중략) 한국이 고대부터 지녀온 통합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인들이 그런 체제를 원하든 않든 간에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소련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 P333

미국도 소련도 자국의 군대가 전쟁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는 한, 증오의 대상이 된 38도선을 제거하는 군사행동을 지지하려 들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에서 ‘열띤‘ 내전의 시발점을 소련군은 이미 철수했고 미군이 철수중이던 1949년초 이후로 잡을 수 있다. - P333

독자는 북한이 왜 1949년 여름 남한의 도발에 침략으로 응수하지 않았는지 질문할지 모른다. 만약 그때 침략했다면 그것을 도발에 의하지 않은 침략으로 해석하기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 대답은 간단하다. 나중에 6월 침공의 주된 타격력이 된 병사들, 즉 정예군이 아직도 중국에서 전투중이었던 것이다. - P340

1950년 6월에 발발한 전쟁은 1949년의 유격전과 9개월에 걸친 38도선 부근 전투에 뒤이은 것이다. - P346

한국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기본개념이 이승만의 개념과 아주 비슷했으며 1949년 8월의 전투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즉, 막다른 지역인 옹진을 공략하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개성을 장악하고 나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최소한 이 작전은 옹진과 개성에서 공격받기 쉬운 평양을 훨씬 더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게 된다. 최대한으로 잘 풀리면, 북한군이 서울을 며칠 만에 점령한다는 것이다. - P350

양쪽 모두 1950년 여름이 1949년 여름처럼 시작되리라고 예상했으며, 양쪽 다 상대방을 이번만큼은 영원히 요절내기를 원했다. 김일성은 모스끄바로부터 새 장비를 얻은 데다가 자신의 계획에 대한 스딸린의 외견상의 동의와 뻬이징의 마오쩌뚱에게서 직접적인 지원을 얻어냈으니, 분명히 그만큼 더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 P355

1950년 6월의 전쟁 발발 상황에 대한 설명들 대부분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적을 향해 북한이 새벽녘에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전쟁은 1949년에 많은 전투가 벌어진 바로 그 외진 옹진반도에서 시작되어 몇 시간 후에 38도선을 따라 동쪽으로 확산되면서 개성, 춘천, 동해안에 이른 것이다. - P364

이데올로기적인 폭발성으로 충만한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하는 질문은 분명 잘못된 질문이다. 그것은 내전에 관한 질문이 아니며, 단지 동족상잔의 투쟁으로 직접 고통을 당한 세대들의 애간장을 쥐어짤 뿐이다. - P369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순전히 한국인들끼리의 내부충돌이라면 식민주의, 민족분단, 외국간섭 등으로 야기된 엄청난 긴장이 해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이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이전의 현상으로 복구되었을 뿐이며, 오직 휴전만이 평화를 유지했을 뿐이다.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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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의 북한은 단순한 소련의 위성국가가 결코 아니었으니, 1945~46년에 광범위하게 결성된 ‘인민위원회’에 기반한 연립정권으로부터 1947~48년에는 비교적 소련의 지배를 받는 정권을 거쳐, 그 후 1949년에는 중국과 중요한 연계를 갖는 정권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전개 덕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두 공산주의 대국 사이에서 적절한 책략을 쓸 수 있었다. - P319

소련의 정책은 남한에 단독 정부 및 군대를 세우려는 계획을 밀어붙인 미국의 정책보다 임시적이고 소극적인 것이었다. - P320

공산당 혹은 노동당은 사실 방대한 농민층에 사회적 토대를 갖고 있었다. 당 기구는 출신계급에 상관없이 거의 누구든지 당원이 될 수 있는 개방정책을 채택함으로써 김일성의 지배를 따르는 대중을 끌어모았다. 이로 말미암아 빈농 대중이 당 대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 P320

해방 후 일년 동안은 민족주의자, 기독교도, 토착 천도교도 같은 비공산주의 정당과 단체가 많이 있었다. 김일성의 지도력은 조선민주당과 천도교의 ‘청우당’이라는 두 주요 정당에 대해 ‘통일전선’ 정책을 채택했다. (중략) 이 통일전선 정책은 이 정당들에게 어떤 실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이 정책은 농민층에 뿌리내린 천도교와 도시, 특히 평양에서의 기독교 세력의 중요성을 고려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권은 이런 정당들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겪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명하달식 통제에 예속시켰다. - P322

북한은 곧 비좌익 정치적 반대파 모두를 가혹할 정도로 철저히 제거했다. 통일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두 비공산계 정당이 여전히 허용되었으나, 권력은 전혀 없었다. 그 의도는 남한 우익의 의도와 마찬가지로 대안적인 권력중심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 일을 훨씬 더 철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조직의 월등한 우세와 반대파의 전반적인 약세 때문이었다. - P325

북한의 보안기구는 하나의 혁명적 사법기구이자 동시에 철저하고 종종 전체주의적인 통제·감시 체제였다. - P326

그들의 직무에는 기본적인 정치적 사유를 신봉하는 사람을 소름끼치게 할 만큼 전체주의적 사상통제 및 감시체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 정권은 대규모 비밀 조직망을 구축하여, 시민들의 충성심을 검사하는 한편 여론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지도부에게 제공할 수단으로서 풍문과 소문을 포함한 정치적 발언들을 보고하도록 했다. - P328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조국을 통일하려는 목표를 지녔다. 이승만과 달리 그는 1950년에 이르러서는 그 과업을 달성할 수단을 확보하였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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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2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02 0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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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9
케빈 패스모어 지음, 이지원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가운데 케빈 패스모어의 <Fascism> 개정판을 완역한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전면적으로 다시 쓰기로 생각한 것은 초판에서 제시한 파시즘의 정의는 그릇된 가정에서 출발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는 여러 이론을 종합하여 파시즘에 대한 나은 정의를 내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파시즘의 다양한 양상을 하나의 정의로 규정하기란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제1‘A이면서 A가 아닌에서는 결국 파시즘을 여러 의미를 포괄하는 편의적인 명칭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파시즘을 어떻게 논의하고 어떻게 이에 대항해야 하는가? 그것은 당시 활동가들에게 매우 실제적인 개념이었던 파시즘은 어떻게 해석했고, 그로부터 무엇을 차용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차용한 것들을 다른 사상 및 실천과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2파시즘 이전의 파시즘?’부터는 이러한 전제를 깔고서 논의를 전개한다. 2장에서는 파시즘의 사상적 토양이 되는 19세기의 여러 사상과 정치적 맥락을 볼 수 있다. 그 사상들은, 첫째 보편적 법칙으로부터 도출된 설계도에 따라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계몽주의 사상”, 둘째 낭만주의와 그 뒤를 이은 다양한 관념론적 사조와 같은 반이성적 사유 전통, 셋째, 조르주 소렐과 귀스타브 르 봉 유형의 군중심리”, 넷째 프리드리히 니체, 다섯째, 사회다윈주의와 인종주의 등이 포함된다.

 

사회 정치적으로는 전문지식인에 대한 질시와 더불어 유대인과 여성의 전문직 진출에 대한 두려움을 거론할 수 있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맥락은 바로 대중의 약진이었다. 엘리트 지배 사회에서 대중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여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가 화두가 된 것이다. 이 문제는 곧 새로운 정치와 사상이 대중 정치에서 태어났지만 그것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이상의 경향들은 급진적 우파에게서 발견되지만, 이것이 곧장 파시즘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급진적 우파와 파시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3장과 제4장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예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파시즘의 양상을 살펴본다. 유럽에서 파시즘의 등장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만연한 사회적 불안과 관련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전후 계속된 사회불안이 내셔널리스트들의 분노를 더욱 돋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은, 대중운동을 이용하는 한편 역설적으로 더욱 권위주의적인 구체제 국가를 구축하고자 했다. 권위주의적 국가의 건설은 보수주의자, 이탈리아 내셔널리스트, 그리고 급진주의자 모두 선호했던 것으로, 서로 다른 극단적 정치체들이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파시즘아래 모였던 것이다. 이는 무솔리니가 총리가 된 이후의 일로, 만약 파시스트당이 집권하지 않았다면 파시즘이 흥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1차 대전의 참혹함은 이탈리아보다 독일에 더 치명적이었다.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의 붕괴는 독일 사회의 민주주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미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부터 많은 이들은 1920년대부터 이미 대중주의와 극단적 내셔널리즘을 옹호하고 있었다.” 감옥에 수감되었던 히틀러는 옥중에서 무솔리니의 선례를 연구하여 그의 성공 비결, 즉 선거와 협박의 결합을 간파했다.” 그와 나치는 보수정권을 비난하며 자신들은 진정한 국민의 대변자라고 선전했다.” 이러한 대중주의적 메시지는 한때 보수주의자들은 물론이요, 더 폭넓은 대중에게 위력을 발휘하였다(히틀러가 탁월한 대중 연설가였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나치가 집권하면서 그들은 독일의 모든 법치의 근간을 파괴했다. 이러면서 그들의 사상은 전체주의에 더 가까워져서 파시즘이라고 하기 힘들지만, 20년대부터 이어졌던 히틀러의 사상은 되짚어볼 만하다. 히틀러는 감옥에 갇히던 중 저술한 <나의 투쟁>에서 “‘유대-볼셰비키러시아로부터 동유럽의 생활권을 쟁취하는 것이 독일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핵심 사상은 반유대주의와 같은 인종주의는 물론, 내셔널리즘, 사회다윈주의, 제국주의 등 19세기의 사상적 지류들이 모두 발견된다. 반유대주의와 생활권 확보라는 히틀러의 망상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관철되었으며, “독일군이 괴멸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점령지 수용소에 인원을 남겨두어 학살이 중단되지 않게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부분을 자세히 다룬 책이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이다.

 

여기서 이탈리아와 독일 파시즘의 공통점을 잠깐 정리하자. 먼저 전 사회적 영역에 걸쳤던 불안을 양분 삼아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독일은 경제적 불만이 매우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사상적으로 대중주의와 극단적 내셔널리즘을 옹호한 점이 눈에 띈다. 어떤 면에서 파시즘이란 대중연합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셋째로 독재자의 등장이다. 이는 파시즘이 나오게 된 정치사적 맥락이 대중 정치의 제한임을 상기하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 이러한 파시즘의 양상을 가장 유사하게 보여주는 정치 집단이 바로 이범석과 족청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지이 다케시의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참조)

 

이렇게 전간기 파시즘의 특징을 정리하는 것은 현대의 극우파 정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6재에서 되살아난 불사조?’에서 애국운동, 국민전선, 뉴라이트 등 현대의 네오-파시즘과 극우 운동을 분석한 결과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극단적 내셔널리즘과 소수 종족에 대한 차별, 반페미니즘, 반사회주의, 대중주의, 기성의 사회적정치적 엘리트 세력에 대한 반감, 반자본주의, 반의회주의등에서 현대의 극우 운동과 전간기 파시즘은 연속성을 가진다. 이러한 극우가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된 원인에는 세계화와 그로 인한 남서 노동자 실업률의 증가와 관련이 있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부유층과 전문직 여성에 대한 반감, 반이슬람주의, 자국민우선주의 등으로 나타나며, 이때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도 함께 수반된다.

 

그러나 중대한 차이점도 있다. 현대에는 준군사조직을 동원하여 민주주의를 전복하기보다는 민주주의에 잠재된 차별의 가능성을 활용하고자 한다.” (주류 정치의 장으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점도 꼽았으나, 몇 년 전에 프랑스에서 국민전선이 집권한 적이 있어 이는 빼겠다)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수결이나 인민주권쯤으로 좁게 정의하면, 민주주의는 배제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정치가들이 민주주의의 차별적 측면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바로 혐오이다. 이것이 경제적 불안과 극단적 내셔널리즘과 자국민우선주의와 결합하면 커다란 시너지를 발휘하여 그때부터는 인종주의적 배제의 정치가 시작된다. 이러한 배제의 정치가 저자가 말한 대로 과거의 파시즘보다 덜 위험한 것은 아니다.

 

여러 고민이 든다. 과연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포용의 정치를 위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 정치적 주체가 혐오와 배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화의 흐름과 자국민의 이해는 상충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여기서 내 관심은 다시 외국인 노동자, 국제 이주민과 난민 문제로 이어진다. 이들이 실제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과연 이들과 자국민 사이에 조화를 이룰 부분은 없는 것일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고병권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에서 이미 시도한 바 있다. 이 책의 한 단락을 인용해보겠다. “민주주의에서는 지식도, 재산도, 혈통도, 성별도, 심지어 숫자도 다른 어떤 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민주화 투쟁이란 그런 근거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폭로하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근거 없이, 자격이나 조건 없이, 우리와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그들과 공동의 삶을 위한 교섭을 벌여야만 한다.” 고대 그리스 원어로 민주주의는 근거 없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슨 근거인가? 바로 통치의 근거이다. , 민주주의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위에서 지배하고 군림할 합당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타인을 지배하거나 배제할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다스림을 정당화할 자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논의를 확장하면, 결국 국적도, 다수성도, 다른 무엇도 타자를 배제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바로 이때 배제의 정치에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세 번째 질문, '혐오와 배제의 문제''이주민 경제와 자국민우선주의 문제'는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IVP), 폴 콜리어의 <엑소더스>(21세기북스)를 다시 읽으며,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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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4-29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유서가 시리즈 나란히 꽂힌 걸 흐뭇하게 보면서도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번역물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늘 치열하게 공부하시는 모습!!!

Redman 2021-04-30 05:16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ㅋㅋ 저도 얼마전에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첫 단추 시리즈로 말고도 번역된 게 있는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