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층적 관점에서 볼 때 중하위계층 출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군부의 눈에 비친 민간인 정부, 즉 이승만정부나 장면정부는 무능한 정부였다. (중략) 이들은 조직 및 위기관리능력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현대적 국가를 수립하고 한국전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군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진화된 조직으로 발전해 있었다. 한국을 냉전의 전초기지로 인식하고 있던 미국에게 군은 가장 필요한 공적 조직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군에 집중 투입했던 자원의 양은 여타 부문에 비해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 P51
군에 대한 민간사회의 존중은 그다지 높지 못했다. 무엇보다 군은 열위계층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던 다소 사회적으로 취약한 집단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개혁적 성향의 젊은 장교들은 박탈감이 매우 심했다. 민간정치는 부패하고 비효율적이라는 불신이 강했다. 그리고 부패한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따라서 젊고 바르고 유능한 자신들이 국가운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이 점점 더 팽배해갔다. - P52
이들은 정치체제를 장악하자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적 정권을 수립했다. 이승만정부나 장면정부와는 달리 민간관료 엘리트들과 연합하여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수립했다. (민군엘리트 연합체제) - P52
박정희를 비롯한 당시의 군부엘리트들은 일본 식민통치 그리고 만주와 일본에서의 사회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민주주의 체제보다는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하는 파시스트적 체제를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 P53
국가주도적 성장전략은 불균형성장전력을 수반했고 이는 결국 이승만정부 때보다도 더 강하게 경제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도농간의 불균형, 대중소기업간의 불균형 그리고 소득분배상의 불균형이 이 기간에 비롯되었다. - P58
요컨대 박정희정부는 이전의 민간정부들에 비해 개선된 정부 능력과 강한 자율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시장을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통솔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 결과 경제성장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점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불균형성장정책에 따른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 P69
1960년대와 비교해 볼 때 국가의 시장에 대한 간섭은 보다 심화되었다. 박정희정부는 보다 심화된 권위주의적 체제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고 총력적 지원전략과 수입대체산업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 P79
제4공화국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한 개념은 단연 전쟁이었다.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정치와 경제체제가 재조직되었다. 이로써 국가는 통치에 전념하게 되고 민주적 정치는 실종되었다. 경제는 통치에 필요한 자원을 산출해 내기 위해서 국가에 의해 동원되었다. - P80
중화학공업과 종합무역상사에 대한 특혜적 정부지원이 소수의 재벌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으로 인해 제3공화국 정부에 의해 시작된 불균형경제성장은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유신체제하에서 재벌기업들은 정부의 보호에 힘입어 괄목할 성장을 경험했다. - P85
박정희정부가 1970년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도농간 불평등의 심화를 교정해보려는 시도였다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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