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반론과 항변이 많긴 하지만,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전쟁이 그때 시작되지 않았다면, 김일성 역시 좀더 이른 시점에서라면 몰라도 그때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가면 우리는 내전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온다는 진리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내전은 다양한 원인으로 일어나며, 모든 이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먼저 한국을 아무 생각 없이 갈라놓고 식민지 정부기구를 재건한 미국과 그 기구에 봉직한 한국인들에게 책임이 있다. (중략) 한국이 고대부터 지녀온 통합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인들이 그런 체제를 원하든 않든 간에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소련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 P333

미국도 소련도 자국의 군대가 전쟁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는 한, 증오의 대상이 된 38도선을 제거하는 군사행동을 지지하려 들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에서 ‘열띤‘ 내전의 시발점을 소련군은 이미 철수했고 미군이 철수중이던 1949년초 이후로 잡을 수 있다. - P333

독자는 북한이 왜 1949년 여름 남한의 도발에 침략으로 응수하지 않았는지 질문할지 모른다. 만약 그때 침략했다면 그것을 도발에 의하지 않은 침략으로 해석하기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 대답은 간단하다. 나중에 6월 침공의 주된 타격력이 된 병사들, 즉 정예군이 아직도 중국에서 전투중이었던 것이다. - P340

1950년 6월에 발발한 전쟁은 1949년의 유격전과 9개월에 걸친 38도선 부근 전투에 뒤이은 것이다. - P346

한국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기본개념이 이승만의 개념과 아주 비슷했으며 1949년 8월의 전투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즉, 막다른 지역인 옹진을 공략하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개성을 장악하고 나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최소한 이 작전은 옹진과 개성에서 공격받기 쉬운 평양을 훨씬 더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게 된다. 최대한으로 잘 풀리면, 북한군이 서울을 며칠 만에 점령한다는 것이다. - P350

양쪽 모두 1950년 여름이 1949년 여름처럼 시작되리라고 예상했으며, 양쪽 다 상대방을 이번만큼은 영원히 요절내기를 원했다. 김일성은 모스끄바로부터 새 장비를 얻은 데다가 자신의 계획에 대한 스딸린의 외견상의 동의와 뻬이징의 마오쩌뚱에게서 직접적인 지원을 얻어냈으니, 분명히 그만큼 더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 P355

1950년 6월의 전쟁 발발 상황에 대한 설명들 대부분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적을 향해 북한이 새벽녘에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전쟁은 1949년에 많은 전투가 벌어진 바로 그 외진 옹진반도에서 시작되어 몇 시간 후에 38도선을 따라 동쪽으로 확산되면서 개성, 춘천, 동해안에 이른 것이다. - P364

이데올로기적인 폭발성으로 충만한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하는 질문은 분명 잘못된 질문이다. 그것은 내전에 관한 질문이 아니며, 단지 동족상잔의 투쟁으로 직접 고통을 당한 세대들의 애간장을 쥐어짤 뿐이다. - P369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순전히 한국인들끼리의 내부충돌이라면 식민주의, 민족분단, 외국간섭 등으로 야기된 엄청난 긴장이 해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이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이전의 현상으로 복구되었을 뿐이며, 오직 휴전만이 평화를 유지했을 뿐이다.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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