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거짓말 - 비올 때 우산을 빼앗아가는 은행의 냉혹한 금융논리
김영기.김영필 지음 / 홍익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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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경제신문 기자인 저자들의 한계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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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쓴 다음, 내가 적은 그 글이 내가 적은 글 같지가 않을 때가 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었는데 늘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이번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은 후 쓴 글은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애기가 빠져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나는 조금만 언급했고 또 하나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생각이 변해서가 아니었다. A라는 글을 써 놓은 이후 B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라면 이런 기분이 들 까닭이 없다. A라는 걸 줄곧 생각했는데 B라는 글을 썼을 때의 기분이다. 스스로를 배신한 기분이랄까. ‘배신’이라는 말은 좀 오버인 것 같지만, 쓰고 나니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는 따로 있었음이 분명해질 때, 좀더 거칠지만 내뱉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그럴 때 드는 잡친 기분이 계속 남아있었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에서 사쿠라 씨의 어릴 적 모습을 담은 “애너벨 리”라는 영상(영화라고 해야 할지..)의 마지막에 흐르던 음악, 결국 미하엘 콜하스 계획이 처음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무대에 올려졌을 때 다시 그 대미를 장식하게 된 그 음악. 그것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2악장이었다. 전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전부 들어봤다. 그렇지만 학습하듯 들었기 때문이었는지 결국 너무도 유명한 8번 비창과 14번 월광만이 기억에 남았는데, 이 기회에 32번을 찾아 다시 들어보았다. 작품에선 프리드리히 굴다의 연주였지만 찾을 수 없어 다니엘 바렌보임과 빌헬름 박하우스의 연주로 감상했다. 2악장 arietta는 오에가 말했듯 “소박한 반복을 포함해 노래하는 듯” 들렸다. 하지만 유튜브로 노장 다니엘 바렌보임이 굉장한 집중력으로, 엄청난 테크닉을 구사하며 연주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깜짝 놀랐다. 네이버를 찾아보니 그 곡은 연주하기가 너무 난해 해서 베토벤 생전에는 연주가 이뤄지지도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단순해 보이고 일견 쉽게 들리던 곡이 그 뒤에 그렇게 빽빽한 테크닉을 갖춘 피아니스트들만이 연주가 가능한 곡이었다니… 오에가 마지막에 그 곡을 선택한 것은 단순히 “들리는” 것만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말년에 들어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때, 보통 작곡가 같았다면 ‘만만한’ 곡들을 간신히 낳았을 만한 그 시기에 기술적으로 엄밀하고 완벽하기 그지없는 음악들을 토해 낸 베토벤에 대한 존경의 염을 보임과 동시에 자기도 그러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것으로 보였다. 그 단단한 결의를 느끼자 이 소설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제일 먼저 썼었어야 했다.

“몬스테라의 갈라진 잎사귀들 틈새로 키가 큰 청동 학이 작은 매화 가지를 물고 검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라는 배경묘사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을 받았다. 그게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몬스테라’가 멕시코산 식물이고 꽃말이 ‘괴기’, 그 이름의 어원이 라틴어 monstrum(이상하다)에서 왔다는 사실이 사뭇 의미심장해 보였다. 소설 맥락 상으로도 사쿠라 씨 개인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과거의 어떤 ‘사건’이 아직 사쿠라 씨에게 밝혀지기 전에 나오는 문장인데, 어떤 전조를 드리우고 있는 것 같았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묘사였지만 앞에서 두 세 번 중요하게 다뤄지는 멕시코와 관련한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왠지 ‘몬스테라’라는 식물이 멕시코와도 관계될 것 같은 기이한 예감을 가졌고 그것은 거의 맞아 떨어졌다. 그러니 검은 머리의 키가 큰 청동 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분명해졌다. 엄밀하다. 빽빽하다. 집념이라고 불러야 할까.. 데뷔 50년 기념 작품에 이 정도의 집중력이라니.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고 내게 남은 것은 위와 같은 두 가지였다. 이것을 말하고나니 다른 책들도 생각이 난다.

한 달 전에 읽었던 수지 오바크의 “몸에 갇힌 사람들”을 읽었을 때도 실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느낌이 아니라 그냥 가십거리를 하나 알게 되었다는 그 사실 한 줄뿐이라서 말하기가 그랬다. 옮긴이의 말에 나온 가십.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의 작가 지넷 윈터슨과 저자가 동성연인 관계라는 사실. 책의 앞 부분에 그러한 소개를 함으로써 나중의 내용에 관심을 더 갖기를 바랬던 마음은 알겠으나 한 달이 지난 후에 기억에 남은 건 역시나 그 간단한 ‘관계’뿐이니 옮긴이와 책을 만든 이들의 바람은 나 같은 독자에겐 무용지물이었던 셈인가 싶다. 딱 그 사실만 한 줄 감상으로 썼으면 그만였던 것을…

마지막으로 하나 더.
오늘 학고재 갤러리엘 다녀왔다. 아이폰 어플 중에 “artday”라는 미술 전시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있다. 엊그제 이 어플을 통해 학고재에서 열리는 Tim EITEL의 개인전 소식을 접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연휴 시작하자마자 다녀 왔다.

“느낌의 공동체”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 표지 그림을 기억할 것이다. 청록색 톤의.. 배를 노 젓는 두 사람. 조금 더 전진하면 수직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구도. 하지만 왠지 거기가 문(門)일 것 같은 예감. 그런 그림. “느낌의 공동체”를 읽었을 때도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은 후와 비슷했다. 그 책에서 정말 인상 깊었던 것은 다른 데 있었다.

표지그림과 제목, 제목과 표지그림. 어떤 것에 먼저 관심이 갔었는지는 지금에 와서 기억 나지 않지만 솔직히 나는 그 표지와 제목만으로도 이 책을 헌책방에 내다 파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느꼈고 책의 안쪽 내용을 다 읽은 후에도 여전히 가장 인상 깊게 마음에 새겨진 것은 표지를 장식하는 팀 아이텔의 그림이었고, ‘느낌의 공동체’라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든 여섯 글자 제목이었다.

오늘 큰 그림 4점(맞나?)과 12점의 작은 작품들(많지 않았다. 고작 16작품)을 보고 왔다. 역시 그림은 원작을 직접 보는 것이 인터넷이나 인쇄한 것을 보는 것보다 훨씬 좋다. 색감도 구도도 그림이 담으려 한 주제도 마음에 든다. Tim EITEL 콕 찍었다.


느낀 것, 떠들고 싶은 것, 나누고 싶은 것에 정말 솔직해져야겠다. 솔직해 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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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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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모든 것을 담아보려… 길게, 복잡하게 써 나갔다. 결국 모두 지워 버렸다.
표면적으로는 미하엘 콜하스 계획을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해 나간다는 이야기지만… 이 소설은,

늙음과 생성(창작)의 이야기며
분노와 치유(극복)의 이야기이고
순수와 관능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아직도 뭔가를 할 수 있겠어? 라는 물음에
아직도 이렇게나 할 수 있어. 라는 대답이기도 하다.

오에 스스로에게는 새로운 형식(공동작업으로 작품 쓰기)의 물꼬를 튼 사건이며,
사쿠라 씨(애너벨 리, 롤리타, 리스베트, 메이스케 어머니)에게는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고,
고모리(영화의 제작자, 오에의 친구, 사쿠라 씨의 애인)에게는 헌신의 길을 가르쳐준 세월이었다.

개인(독자)에 대해
분노의 방법으로 연대를
치유의 방법으로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해석하고 변형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듯 하며

작가가 속한 세계(일본국민)에 대해
안타까움과 연민을…
그리고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남성에서 여성으로, 혼자에서 여럿으로, 서양에서 자기 것(동양)으로의 이동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리아스식 해안처럼
이 짧은 소설 안에는 구체적인 삶과 알레고리가 구석구석 복잡하게 전개된다.

마지막 버스 안 사쿠라 씨가 메이스케 어머니의 넋두리를 알토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공연의 마지막 연습에 베토벤 노년의 작품. 피아노 소나타 32번의 2악장이 울리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돋는다.

짧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이 작품은 마스터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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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의 드로잉
존 러스킨 지음, 전용희 옮김 / 오브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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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보다는 사물을 관찰하는 시각이 중요,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와 일맥상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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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20
사이먼 스위프트 지음, 이부순 옮김 / 앨피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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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물지 않은 생각으로 리뷰를 쓰느니 나중에라도 참조할만한 문장 몇 개를 적어 놓는 것이 낫겠다. 한나 아렌트의 사상이 궁금했다기 보다는 “스토리텔링”이라는 주제에 끌려 읽었다. 문학 읽기, 삶 읽기에 적지 않은 가르침을 받았다. ‘간결하고 정확한 정리’라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데, 사이먼 스위프트는 그것을 글자 그대로 여기에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 새롭고 독특하다는 생각,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항상 포괄적 세계관에 끼워 맞추려 해서 또는 기성의 이론으로 그 사건을 설명하려 해서 그것이 지닌 새로움과 독특함을 손상시킬 위험이 있다는 생각에 경도되어 있었다. (중략) 덴마크 작가 아이작 디네센에 대한 에세이에서 아렌트는 “스토리텔링은 의미를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서 의미를 드러내는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과의 일치와 조화를 가져온다”고 썼다.
: 여기서부터 끌린다. 이러한 생각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같은 편이군’


아렌트가 인용한 아이작 디네센의 표현을 빌리면, “슬픔을 이야기 속에 담아내거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모든 슬픔을 견딜 수 있다.” 아렌트는 스토리텔링이 역사에 대처하는 도구로 이해되는 것만큼이나 현대 세계의 악에 저항하는 중요한 도구를 제공한다고 여겼다.
: 악에 저항하는 도구. 거창하다. 하지만 ‘악의 평범성’이라는 아렌트를 대표하는 개념을 대입해 보면 스토리텔링은 그 거창한 것을 실천하는데 있어 가장 기본적이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수긍하게 된다.


대화와 설득, 타인들의 주장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 등을 포함하는 정치를 대부분의 철학자나 이론가들은 성가시고 불명료하며 인간적인 문제로 여긴다. 정치는 철학적 사유에 필요한 조용한 공간을 공적 영역의 소음과 불확실성으로 어지럽힌다.
: 이것은 철학자나 이론가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설득, 정치 이런 과정들을 나부터도 얼마나 성가셔 하는지… 이 문장을 읽고 흠칫 놀랐다.


세계 속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탁자가 그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것처럼, 사물의 세계도 그것을 공동으로 소유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처럼 세계는 사람들을 관련시키는 동시에 분리시킨다.
: 탁자로서의 세계. 멋진 비유.


공적 삶과 사적 삶 사이의 고대적 구분이 ‘사회’라는 독특한 근대적 현상의 출현으로 붕괴되었다고 생각했다. (중략) 사회란 단지 생활하고자 상호 의존한다는 사실이 공적 의미를 획득하고, 순전히 생존과 연관된 활동들이 공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형식이다.
: 순수하게 먹고 사는 문제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모든 나라의 보수정권이 자주 쓰는 전략이 이거 아닌가. 생존과 연관된 활동들이 공적으로 더 많이 나타나게 하는 것.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더욱 심화시키고 마는 방향 말이다.


인간의 조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이 조건을 이야기와 서사의 주제로 만들어 준다. 그러나 개별적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을 사는 바로 그 사람에 의해 얘기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궁극적으로 타인들, 말하자면 그 사람이 죽은 이후에도 살아남아 전체 이야기를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얘기되는 이야기다.
: 나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을 읽었을 때 본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성 또한 ‘세계로부터 자아로의 비행’으로 규정할 수 있다. 우주 비행이 인간을 세계에서 멀리 데리고 간다면, 자아로의 비행은 개별 자아들의 공통된 인간 세계를 거부하는 내적 망명의 형태로 일어난다.
: 이러한 생각이 실현 가능하게 된 것은 20세기부터 라고 아렌트는 얘기한다. 고독으로 망명하고 싶어하는 충동. 아. 하지만 말이다. 이 충동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걸…


세계는 모든 인간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 따라서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정해야 한다.


플라톤은 육체를 정치 및 정치적 영역과 동의어로, 영혼을 철학과 동의어로 보았다. 그러므로 철학자가 진정한 철학자가 되면 될수록 “그는 더욱더 자신의 육체와 분리된다.”
: 언어에 집착하면 할수록 도(道)와 멀어진다는 말이 퍼뜩 생각난다.


인간을 규정하는 철학적 방식은 개별적 인간을 개별적이게 만드는 것인 그의 유일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 말하자면 무엇(what) 보다는 누구(who)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린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의 행위들 속에서 발견되는데, 그 행위들은 그의 삶의 이야기, 즉 전기가 될 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 무엇 보다는 누구. 사람을 대할 때 예술작품을 접할 때, 내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포인트.


아렌트에게 죽음은 오히려 공적 소통의 가능성,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을 나타낸다.
: 승자독식의 세계, 유명인의 세계, 일등만 기억하는 세계, 쏠림의 세계 안에서… 작은 개별적 인간은 어떤 가능성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아렌트가 칸트를 인용한 바대로, 판단은 “특별함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


거트루드 스타인은 “장미는 장미인 것이 장미”라고 썼다.


유대인으로 출생했다는 사실이 종교적, 민족적, 사회경제적 의미를 상실할수록, 유대인다움은 더욱 강박적으로 변해 갔다.
: 이건 유대인들한테 하는 얘기가 아니라 딱 현재의 우리들한테 하는 얘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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