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를 쓴 다음, 내가 적은 그 글이 내가 적은 글 같지가 않을 때가 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었는데 늘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이번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은 후 쓴 글은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애기가 빠져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나는 조금만 언급했고 또 하나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생각이 변해서가 아니었다. A라는 글을 써 놓은 이후 B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라면 이런 기분이 들 까닭이 없다. A라는 걸 줄곧 생각했는데 B라는 글을 썼을 때의 기분이다. 스스로를 배신한 기분이랄까. ‘배신’이라는 말은 좀 오버인 것 같지만, 쓰고 나니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는 따로 있었음이 분명해질 때, 좀더 거칠지만 내뱉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그럴 때 드는 잡친 기분이 계속 남아있었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에서 사쿠라 씨의 어릴 적 모습을 담은 “애너벨 리”라는 영상(영화라고 해야 할지..)의 마지막에 흐르던 음악, 결국 미하엘 콜하스 계획이 처음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무대에 올려졌을 때 다시 그 대미를 장식하게 된 그 음악. 그것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2악장이었다. 전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전부 들어봤다. 그렇지만 학습하듯 들었기 때문이었는지 결국 너무도 유명한 8번 비창과 14번 월광만이 기억에 남았는데, 이 기회에 32번을 찾아 다시 들어보았다. 작품에선 프리드리히 굴다의 연주였지만 찾을 수 없어 다니엘 바렌보임과 빌헬름 박하우스의 연주로 감상했다. 2악장 arietta는 오에가 말했듯 “소박한 반복을 포함해 노래하는 듯” 들렸다. 하지만 유튜브로 노장 다니엘 바렌보임이 굉장한 집중력으로, 엄청난 테크닉을 구사하며 연주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깜짝 놀랐다. 네이버를 찾아보니 그 곡은 연주하기가 너무 난해 해서 베토벤 생전에는 연주가 이뤄지지도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단순해 보이고 일견 쉽게 들리던 곡이 그 뒤에 그렇게 빽빽한 테크닉을 갖춘 피아니스트들만이 연주가 가능한 곡이었다니… 오에가 마지막에 그 곡을 선택한 것은 단순히 “들리는” 것만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말년에 들어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때, 보통 작곡가 같았다면 ‘만만한’ 곡들을 간신히 낳았을 만한 그 시기에 기술적으로 엄밀하고 완벽하기 그지없는 음악들을 토해 낸 베토벤에 대한 존경의 염을 보임과 동시에 자기도 그러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것으로 보였다. 그 단단한 결의를 느끼자 이 소설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제일 먼저 썼었어야 했다.

“몬스테라의 갈라진 잎사귀들 틈새로 키가 큰 청동 학이 작은 매화 가지를 물고 검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라는 배경묘사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을 받았다. 그게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몬스테라’가 멕시코산 식물이고 꽃말이 ‘괴기’, 그 이름의 어원이 라틴어 monstrum(이상하다)에서 왔다는 사실이 사뭇 의미심장해 보였다. 소설 맥락 상으로도 사쿠라 씨 개인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과거의 어떤 ‘사건’이 아직 사쿠라 씨에게 밝혀지기 전에 나오는 문장인데, 어떤 전조를 드리우고 있는 것 같았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묘사였지만 앞에서 두 세 번 중요하게 다뤄지는 멕시코와 관련한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왠지 ‘몬스테라’라는 식물이 멕시코와도 관계될 것 같은 기이한 예감을 가졌고 그것은 거의 맞아 떨어졌다. 그러니 검은 머리의 키가 큰 청동 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분명해졌다. 엄밀하다. 빽빽하다. 집념이라고 불러야 할까.. 데뷔 50년 기념 작품에 이 정도의 집중력이라니.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고 내게 남은 것은 위와 같은 두 가지였다. 이것을 말하고나니 다른 책들도 생각이 난다.

한 달 전에 읽었던 수지 오바크의 “몸에 갇힌 사람들”을 읽었을 때도 실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느낌이 아니라 그냥 가십거리를 하나 알게 되었다는 그 사실 한 줄뿐이라서 말하기가 그랬다. 옮긴이의 말에 나온 가십.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의 작가 지넷 윈터슨과 저자가 동성연인 관계라는 사실. 책의 앞 부분에 그러한 소개를 함으로써 나중의 내용에 관심을 더 갖기를 바랬던 마음은 알겠으나 한 달이 지난 후에 기억에 남은 건 역시나 그 간단한 ‘관계’뿐이니 옮긴이와 책을 만든 이들의 바람은 나 같은 독자에겐 무용지물이었던 셈인가 싶다. 딱 그 사실만 한 줄 감상으로 썼으면 그만였던 것을…

마지막으로 하나 더.
오늘 학고재 갤러리엘 다녀왔다. 아이폰 어플 중에 “artday”라는 미술 전시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있다. 엊그제 이 어플을 통해 학고재에서 열리는 Tim EITEL의 개인전 소식을 접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연휴 시작하자마자 다녀 왔다.

“느낌의 공동체”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 표지 그림을 기억할 것이다. 청록색 톤의.. 배를 노 젓는 두 사람. 조금 더 전진하면 수직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구도. 하지만 왠지 거기가 문(門)일 것 같은 예감. 그런 그림. “느낌의 공동체”를 읽었을 때도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은 후와 비슷했다. 그 책에서 정말 인상 깊었던 것은 다른 데 있었다.

표지그림과 제목, 제목과 표지그림. 어떤 것에 먼저 관심이 갔었는지는 지금에 와서 기억 나지 않지만 솔직히 나는 그 표지와 제목만으로도 이 책을 헌책방에 내다 파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느꼈고 책의 안쪽 내용을 다 읽은 후에도 여전히 가장 인상 깊게 마음에 새겨진 것은 표지를 장식하는 팀 아이텔의 그림이었고, ‘느낌의 공동체’라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든 여섯 글자 제목이었다.

오늘 큰 그림 4점(맞나?)과 12점의 작은 작품들(많지 않았다. 고작 16작품)을 보고 왔다. 역시 그림은 원작을 직접 보는 것이 인터넷이나 인쇄한 것을 보는 것보다 훨씬 좋다. 색감도 구도도 그림이 담으려 한 주제도 마음에 든다. Tim EITEL 콕 찍었다.


느낀 것, 떠들고 싶은 것, 나누고 싶은 것에 정말 솔직해져야겠다. 솔직해 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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