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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평점 :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과 가구를 매각하고, 옷, 가방, 핸드폰을 없애고, 은행계좌를 폐쇄하고, 세 대의 피아노까지 헐값에 팔고, 안 이덴은 북 역을 통해 고속열차를 타고 떠난다. 이전의 자신에게 영원한 안녕을 고한다. 북 역(Gare du Nord).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원제목이 Gut Gegen “Nord”wind 였다. 안 이덴이 파리 북 역(Gare du “Nord”)을 통해 긴 탐색-여행을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무언가 적절해 보였고, 당연하게 여겨졌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은 두셋의 연쇄된 우연을 휘감아 ‘충동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떠났다. 그 충동의 여파는 커서, 한동안 나는 짐을 꾸린 가방을 방 한쪽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었다. 안 이덴의 결정은 충동적이었을지 몰라도, 그녀가 북 역(Gare du Nord)에 도달하기까지는, 도주선에 서기까지는. 나지막해진 얼굴과 숱한 불면, 이제는 잠잠해진 눈물을 겪고 나서였다. 철저한 준비를 마친 후였다. 소설 분량의 3분의 1을 소모할 정도의 심리적 에너지가 쓰인다. 그것은 우리가 이전의 나를 떠나기 위해서는 완전범죄를 노리는 킬러처럼 엄밀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파리를 떠나 브뤼셀, 티에넨, 마스트리흐트, 라나켄, 뒤렌, 프리부르, 투틀링겐, 빌, 엥가딘, 몬차를 거쳐 나폴리로 간다. 그리고 나폴리만(灣) 맞은편 이스키아 섬에 도착한다. 이 여정을 ‘지도’에 그려보면 《?》처럼 보인다. 북으로 가다가 방향을 돌려 우회해서 기다란 이탈리아 반도의 중간에 위치한 나폴리까지가 《?》의 굽어진 상단 부분을, 그리고 ‘이스키아 섬’은 《?》 하단의 점(.) 같아 보였다. 유럽지도에 그려진 커다란 물음표. 떠남의 본질적 의미와 새로운 삶의 불확실성. 안 이덴에게도 독자인 나에게도 다행히, 그 물음표 하단의 점인 이스키아는 ‘은밀한 기쁨’이 느껴지는 ‘경이로운’ 곳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시(詩)는 각자의 의식과 감성이 원하는 장소의 중심에 주관성을 부여할 수 있다.’ 『철학자의 여행법』에서 미셸 옹프레는 이렇게 말한다. 안 이덴이 이스키아와 이스키아의 빌라 아말리아에 ‘주관성을 부여하는’ 일은 맞아, 결국 그녀 자신의 시를, 음악을 짓는 일이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굼펜도르프’를 찾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빈 바로 옆의 자치도시였던 이곳에 하이든의 ‘오두막’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을 하이든은 ‘자신의 영혼이 통째로 들어있어서, 일단 안에 들어가면 작곡의 확신이 생겨난다’고 했다지. 자신의 몸이, 자신의 영혼이 가장 살아 숨쉴 수 있는 장소. 굼펜도르프. 안 이덴의 굼펜도르프는 이탈리아 나폴리만의 맞은편 이스키아 섬의 빌라 아말리아였던 셈. 이처럼 구체적인 지명이고 장소인 이유는 모든 사랑은 구체적이고 강렬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에미와 레오가 이메일을 통해 서로를 구체화시키듯, 그레고리우스가 포르투갈 작가 프라두와 리스본을 세세하게 알아가듯이. 그렇게.
엄마와의 이별, 어린 레나와 줄리아와의 인연은 몹시 아프다. 뼛속까지 아프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내내 세세하게 살아나는 감각의 결을 느꼈다. 기쁨의 음악이었다. 내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