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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들의 세계 ㅣ 트리플 15
이유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1월
평점 :
다만 잊히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건 싫고 무서웠다. 꼭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가 아니어도 좋으니, 내 세계는 끝나 없어지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세계 어느 한구석에는 끝내 남아 있고 싶었다. -모든 것들의 세계 中-p30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모든 것이 조금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해본 일도, 사랑받아본 일도 그전까지는 없었으니까. 도일의 방식은 내가 지금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고, 나는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으레 이렇게 하는가 보다 하고 받아들인 것였다. 마치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무한대로 돈이 들어 있는 통장을 얻은 것처럼 나는 방탕하게 사치를 부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세상에 그런 것은 없었다. 남에게 받은 것 가운데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것은 없고, 돌려줄 방법을 모른다면 애초에 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마음소리 中-p50
<모든 것들의 세계>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죽은 게임중독인 고양미와 게이 천주안이 영혼 결혼식으로 만나고, 두 사람은 살아있던 시절의 이야기를 나눈다. 양미는 매일 PC방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고, 주안은 애인이 그립지만 무서워 찾아가지 못한다. 양미는 용기 없는 주안과 함께 그의 남자친구 집에 함께 가준다.
<마음소라>
평생 한 사람에게만 자신의 마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소라'가 있는 세상!
고미는 도일에게 마음소라를 받고, 그의 사랑과 일방적 희생이 당연하다 여기며 오만하게 굴다 결국 도일을 떠나게 만든다. 잊고 살던 어느 날 그의 아내라는 양희가 찾아오고, 그의 마음소라를 돌려달라 말하며 그의 마음을 들어봐달라고 부탁한다.
<페어리 코인>
요정을 키우는 부부가 어느 날 전세사기를 당한다. 남편의 친구는 요정을 이용해 '페어리코인'을 만들자 제안하고, 부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순수하기만 한 요정을 이용해 돈을 버는게 맞는지, 친구의 과거를 돌아보자 과연 친구를 믿을 수 있는지 의심하며 고민한다. 그리고 전세사기를 벌인 집주인의 딸이 전화를 걸어 사과를 하고 모든 일이 잘 해결된다.
-에세이 이유리위원회 산하 의문규명위원회의 어떤 오래된 어젠다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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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사람은 잊고 잘 살기를 바라지만, 실은 잊혀지기 두렵고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조건없이 주는 사랑을 당연하다 여기며 오만하게 굴다 결국 잃고 난 후에야 소중함을 느끼며 후회하는 마음을,
당한 만큼 복수하고픈 마음과 누군가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마음을 짧은 단편에 잘 녹여냈다.
언제나 독특한 상상력으로 매력 넘치는 글을 쓰는 이유리 작가가 참 좋다.
그녀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랑스럽다.
#브로콜리펀치 에서 그랬듯, 생각지도 못한 독특한 이야기들은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고, 애틋하고 뭉클하기도 하다.
각박하고 무섭고 힘든 세상 속에서 인물들은 반성하고, 후회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치유한다.
쉽지 않은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울지만, 결국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서로를 구원한다.
아마도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따뜻하고 선한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