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해야 할 일을 마치면 그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 순간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듯, 쳇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삶을 살아가는 한 가족은 현재의 소박한 삶에 감사함을 느끼고 속에 들어찬 서글픔은 서로를 위해 잘 포장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잠든 부인 옆에서 쉽게 잠에 들지 못하는 남편 ‘펄롱’은 오늘의 평범한 일상을 누리지 못한 채 왜인지 심란해 보인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걸까. 앞으로 닥치게 될지도 모를 그 무언가를 고민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방황하는 사람처럼 복잡함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큰 집에 혼자 사는 여성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지내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펄롱은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날 선물로 아버지와 500피스짜리 퍼즐을 받고 싶어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어린 펄롱에게는 간절했고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글픔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내리려 했지만, 내색하면 안 될 것 같아 외양간으로 뛰어 들어가 울어버렸다.

젖소가 자기 칸 안에 묶인 채 선반 위의 건초를 끌어 내려 만족스러운 듯 먹고 있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펄롱은 말구유에 언 살얼음을 깨고 세수를 했다. 아픔을 잊기 위해 손을 차가운 물에 깊이 담그고 손에 아무 느낌이 없을 때까지 한참 그러고 있었다. (p. 30)

펄롱이 아기였던 시절, 구슬처럼 빛나는 맑은 눈으로 들여다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윌슨의 집 정사각형 부엌 안에서 일해야 하는 엄마가 위험한 것들로부터 조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을 유아차의 안전띠에 매인 아기 펄롱이 알아들을 수는 없었겠지만, 공중에 대고 허우적거리는 손짓과 음성은 쌓이고 쌓여 자신이 마음껏 양팔을 휘젓고 소리 내는 것이 누군가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더 자라서 윌슨이 가끔 같이 쓸 수 있게 해주는 거실을 가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처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 먼지가 내려앉듯 그렇게 펄롱의 성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쌓여만 갔을 것 같다.

그렇게 펄롱은 자랐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날 농장 일꾼 ‘네드’가 준 보온 물주머니와 윌슨이 준 곰팡내 풍기는 낡은 책 <크리스마스 캐럴>은 그 당시에는 원하는 선물이 아니었기에 서럽게만 느껴져 외양간으로 달려가 눈물을 쏟았지만,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니 그 덕분에 오랫동안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에게 필요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집 크기와 보이는 행색에 따라 쳐다보는 시선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숙덕거림 속에서 가족들도 외면한 어머니를 일할 수 있게 해준 윌슨이 따뜻하게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해 준 그 손길만으로도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쳐 온 생을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소설 속 주인공 펄롱이라면 불행했던 삶 속에서도 그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준 순간들을 발견했을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라나는 동안 누군가에게는 사소할지 모를 배려와 관심이 단순한 행동을 넘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줬음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어느 날, 펄롱은 수녀원에서 한 소녀를 우연히 만난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 보였고,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기에 외면하지 않고 그 소녀에게 손길을 건넸다.

그 순간 소녀의 심정을 떠올려보았다.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늘 그곳에 그가 있을 거라는 안심만으로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고마움과 안도감으로 이미 따뜻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펄롱이 어린 시절 윌슨이 머리카락을 따뜻하게 쓰다듬어주던 그 손길만으로도 다른 아이들처럼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내 이름은 빌 펄롱이고 저기 부두 근처 석탄 야적장에서 일해. 무슨 일 있으면, 거기로 찾아오거나 아니면 나를 불러. 일요일만 빼고 늘 거기 있으니까.” (p. 82)

유한한 삶을 살아가며 오늘의 평온만을 원하는 삶에서 더 나아가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 해 준 고마운 순간들을 과거의 기억으로만 끝내지 않고 현재와 연결 지어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채우는 것이 무엇인지 고뇌하며 소녀에게 손길을 건넸으나, 펄롱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 의지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이 겁이 났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져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감수해야 할 것들도 훨씬 많기 때문이다.

내내 이어지는 서리가 내린 듯한 날씨가 마치 금방이라도 맑게 갤 하늘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게 했다. 무시할 수 없는 여러 목소리에 휩싸여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마치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무겁기만 하고, 집에 돌아가면 밖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내놓는 몇 파운드의 동전을 못마땅해하는 부인과 다른 친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러 나가고 싶지만 내색도 못하고 아빠 펄롱의 일손을 돕기 위해 사무실을 봐야 하는 딸이 기다리고 있다.


이 소설은 불완전한 삶 속에서 세상의 불의 앞에 고민하게 될 때, 인간이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나의 지난 삶의 선택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마음의 소리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늘 최대한 평온함을 유지하며 살고 싶어 했으며, 그나마 합리적인 쪽을 택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스크롤 내리는 손가락의 속도만큼이나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기사들 사이로 지금, 이 순간도 지옥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나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한기가 느껴지는 날씨처럼 침울함을 견디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이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만 머물러 있는 쪽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지만, 사실이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늘 어떤 경계에서 고민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내적 갈등과 감수해야 할 현실로 가슴 속이 꽉 막혀 있을 때, 늘 타인의 생각과 판단을 배경으로 했던 지난날의 내 선택들을 되짚어보니 원하는 대로 흐르는 듯 보이는 강을 바라보며 침묵과 용기 사이에서 고뇌했던 펄롱의 모습이 현실의 내 모습 같아서 공감할 수 있었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p. 2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ainbass 2025-09-29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책이라고 해서 안 읽고 있었는데, 곰돌이님 글 읽으니 어렵지 않을것 같기도 하고...🤔

곰돌이 2025-09-29 13:16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사두고 계속 읽지 못하는 바람에 영화까지 미뤄지다 보니 킬리언 머피를 얼른 보고 싶어서 그 계기로 최근에서야 읽었어요~!! 개인적으로 강추까지는 아니지만 이 소설 속의 날씨처럼 추운 계절에 어울릴 만한 책이었던 것 같아요.ㅎㅎ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이제 펄롱은 과거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 P19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ᅳ성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ᅳ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우린 참 운이 좋지?" 어느 날 밤 펄롱이 침대에 누워 아일린에게 말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렇지." - P20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ᅳ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 P29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표면에 불 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 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 P67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니?" 펄롱이 말했다. "말만 하렴."
아이는 창문을 쳐다보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처음으로 혹은 오랜만에 친절을 마주했을 때 그러듯이. - P81

그게 가능할지, 아니면 어떻게 할지, 정말 뭔가를 할 것인지, 진짜로 거기 갈 것인지 생각했다. - P1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밤의 아이들 2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0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0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거의 인연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은 없다. 과거의 내 모습은 영원히 나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 1권에서는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을 선언한 날, 특별한 능력을 지닌 1,001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정각에 태어나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진 불가분의 관계이자 ‘맏형’으로서 가장 강력한 능력을 지닌 이 소설의 화자 ‘살림 시나이’가 서른한 살을 앞두고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연인 ‘파드마’에게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그 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권에서도 외할아버지의 성난 바나나 같은 큰 코를 물려받은 살림의 스러져가는 삶 속 흩뿌려진 기억이 이어지고, 인도의 빠른 경제 성장과 함께 쑥쑥 자라 벌써 성인의 키만큼 자란 열한 살 살림이, 봄베이(현 뭄바이) 영화계에서 유일한 사실주의 작가인 외삼촌 ‘하니프 아지즈’와 전직 여배우인 외숙모 ‘피아 아지즈’에게 잠시 맡겨진 이야기로 시작된다. 자식이 없는 부부에게 살가운 아들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곳은 석양과 소음이 어우러진 봄베이의 ‘마린 드라이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파트다. 이곳에서 카드놀이가 벌어지는 날이면 외삼촌의 단골들인 재즈 연주가, 가수, 화가, 사진 기자 등이 모이는데, 살림은 이곳 사람들에게서 떨어지는 흥미진진한 일화와 추악한 이야기를 줍고 또 줍는다.

인도의 신화적 삶에 휘말려버린 나는 나 자신의 불가사의한 모습을 의식하면서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p. 20)

살림은 행상인과 거지, 노점상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발코니로 나가 둥근 목걸이처럼 가로등 불빛이 만들어낸 빛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다. 이때,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영화계 거물인 한 남성과 잠시 대화를 나눈다.

“바깥공기가 상쾌하구나.”
“네, 아저씨.”
“그래, 그래. 인생이 그럭저럭 살 만하니?”

부모님 곁을 떠나 귀양살이 중이니 그럭저럭 살 만할 리가 없는 살림의 속마음을 들어보려 했으나 순번이 틀렸다는 듯 생각도 못 한 외숙모 피아의 하소연부터 이어졌다. 신식 사고방식의 며느리에게 냉소적으로 대하는 시어머니 ‘나심 아지즈’의 잔소리로 인한 한숨과 여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의 향수가 한데 뒤섞여 눈물과 함께 흐른다. (참고로 1권부터 이어진 시어머니 나심의 독특한 화법이 꽤 웃긴데, 익숙해져서 감흥이 없을 만도 한데 어째 튀어나올 때마다 잔웃음이 나온다.)

“우리 집안은 거뭣이냐! 아니 그러니까 거뭣이냐! 내 말은 거뭣이냐!”

그건 그렇고 살림도 울고 싶은 건 마찬가지다.
다시 메솔드 단지의 부모님 곁으로 돌아와 한평생 신기하고 황당무계한 변화의 세계와 맞닥뜨리면서 여러 가지로 골칫거리가 많아 고달프기 때문이다.

1권에서 살림은 인도의 독립과 함께 태어난 아이들과 ‘한밤의 아이들 협회’를 만들었는데 살림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간 이 협회는 단순히 아이들이 모여 잡담하고 낄낄거리는 친목회가 아니라, 자신들의 특별한 능력을 인도의 미래를 위해 활용하기 위해 고민하는 제법 진지한 모임이다. 외삼촌 댁에서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왔으니(물론, 이보다 더 큰 이유로 미뤄두었던) 다시 회의를 소집한다. 상황이 좋지 않음을 뜻한다.

인도는 독립 선언 이후에도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오랜 시간 식민 지배를 받으며 지내왔고 다양한 언어, 종교, 문화를 가진 나라이면서 독자적인 국가 운영 경험 또한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밤의 아이들 협회도 이런 나라 사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인지 다시 모인 아이들과 영 신통치가 않았다.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른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지역, 피부색, 종교, 계급 등의 차별과 충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 대화조차 사라지며, 더 나아가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살림은 아이들에게 서로 ‘사랑’으로 단결하자고 호소한다. 그런데 이때, 한밤의 아이들 중 살림과 같은 시간에 태어난 ‘파괴의 신’의 막강한 힘을 가진 ‘시바’가 콧방귀를 뀌며 말한다.

“그렇게 시시껄렁한 것들을 어디다 쓰겠냐? 다들 먹고 살기도 바쁜 판국에. 지랄염병, 이 오이코 녀석아, 난 이제 너희 협회라면 신물이 난다. 재물과는 아무 상관도 없잖냐.” (p. 44)

인도는 빠른 경제 성장으로 불균형과 빈곤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시바의 시선으로 볼 때,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살림의 낙관적이고 감상적인 태도에 호의적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얻게 되는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빈민굴의 냄새와 치열한 몸부림이 만들어내는 온도를 알지 못하는 자본 계층에 속하는 살림에게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덩치만 컸지 아직도 열한 살인 살림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혈안이 되어 속이 조용할 날이 없고 안팎으로 괴롭다. 외삼촌 댁에서 유배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온 가족이 파키스탄으로 건너가야 한단다. 이렇게 처음으로 내 나라라고 말할 수 없는 북녘 도시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

파키스탄 군인이자 정치가인 ‘아유브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제 쿠데타라는 단어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날 것 같다) 총리가 되고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 살림의 눈앞으로 폭력, 부패, 탐욕, 빈곤이라는 독립의 자식들이 줄을 지어 등장했다. 또 한참 이야기에 푹 빠져 읽고 있는데, 그런 나를 훤히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능구렁이 같은 살림이 한 마디 툭 던진다.

지금까지 나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 소홀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나의 청취자가 감정이입의 능력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p. 122)

어휴 못 말린다, 정말...
이처럼 독자와 호흡을 같이 함으로써 인물과의 정신적 교감이 깊어지고, 이 감정적 연결은 소설을 더욱 생동감 있고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지루해질 만하면 살림이 또 곁길로 새거나 음란 마귀가 씌어 쓰잘머리 없는 소리를 던지고 가는데, 우리가 이해해 줘야 한다. 이 녀석은 지금 사춘기를 겪고 있다. 그러나 누울 자리를 보고 뻗는다고 신들의 인구수조차도 국민의 인구수와 맞먹는다는 이 나라는 조용할 날 없이 어수선하여 사춘기 따위는 명함도 못 내민다. 불쌍한 녀석...


또다시 봄베이로 돌아온 살림의 가족.
살림은 탄생과 함께 인도의 운명과 함께한다고 밝혔으니, 변화가 있다는 건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는 뜻이다.

1962년 10월 20일, 국경 문제로 인도는 중국과 군사적 충돌을 벌였다.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중국은 위기를 맞이했고, 제3세계 싸움에서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인도와 중국이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전쟁이 터진 것이다. 6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이 분쟁과 관련하여 얼마 전 “일부 희망적인 합의가 있을 것”이라는 인도 무역부 장관의 기사를 읽었다. 내 나라 문제도 어수선하지만, 참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기적처럼 고통을 순식간에 벗어던질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아니라지만, 질긴 잿빛 운명이 참 길기도 길다.

살림의 가족들이 비극에 대처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나가는 모습은 다양했다. 불안으로 인해 악화하는 갈등 속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 때문인지 각자의 사정을 떠나 사람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 어쩌면 불행했던 어린 시절도 이제는 흘러간 세월만큼 담담하게 다가오고, 가족들을 향한 측은지심이 그 당시에는 뾰족하게 올라갔던 송곳도 자취를 감추게 하여, 글을 써 내려가는 살림의 펜 끝이 뭉툭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파리처럼 무력했지만 파리보다 더 어리석었다. 거미줄에 걸렸는데도 오히려 기뻐했기 때문이다. (p. 149)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신앙보다는 상업의 윤리를 중시했던 살림의 집은 어머니의 요구로 봄베이에서 다시 파키스탄으로 향하게 된다. 위기에 처한 파키스탄 정부가 특효약으로 눈길을 둔 것은 전쟁이었고, 인도와 중국과의 분쟁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5년에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터졌다. 이쯤 되면 인도 현대사 전체가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는 살림의 비애감이 만들어 낸 주장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방에서 집이 터지고 무너지고, 구원의 희망도 없고, 얻기 위해 빼앗아야 하는 이 전쟁은 휴... 6년 후에 또다시 일어난다.

살림이 들려주는 참혹함을 조용히 듣고 있는 그의 연인 파드마의 두 뺨에 눈물이 연실 주르륵... 주르륵... 그녀와 독자의 무거운 마음을 달래줌과 동시에 뻔한 전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지 혹시라도 의문을 품을지 모를 사람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그 걱정은 하지 말라는 듯 친절한 살림이 한 마디 덧붙인다.

“내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어! 감전 사고와 열대우림에 대한 이야기도 남았고 골수가 흐르는 들판에 우뚝 솟은 머리통 피라미드에 대한 이야기도 남았단 말이야. 앞으로 아슬아슬한 탈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비명을 지르는 첨탑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거야. 간단히 말해서 아직도 다음 상영작과 개봉박두가 수두룩하다 이거야. 부모가 죽으면 인생의 한 장이 끝나지만 그때부터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법이니까.” (p. 227)


책 읽기 전 맨 앞에 있는 ‘차례’를 들여다봤을 때, 도대체 무슨 제목이 이럴까?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다 읽고 다시 들여다보니, 제목만 봐도 머릿속에 줄거리가 떠올라서, 오! 이거 참 포인트를 잘 잡아서 정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찌나 섬세한지 독자의 기억 저장 능력을 염려하여 줄줄이 이어지는 폭풍 같은 이야기를 종종 요약해 줌으로써 기억의 조각들이 다시 척척 들어맞게 해 준다.

저자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활용한 표현이 맨정신으로는 살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이었던 세상을 떠올리며 말하는 사람의 심정이 어땠을지를 더 생각해 보도록 해주었던 것 같다. 이 소설 속 이야기가 신화와 전설 등과 뒤섞여 있어도 허구와 환상으로 들여다볼 수가 없는 이미 드러난 뼈아픈 역사를 담고 있어서인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움과 위화감 대신 오히려 ‘본질’을 들여다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끔찍한 상황을 처참하게 그려내기보다는 순수한 아이가 단순하게 풀어내는 과정을 거쳐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그간의 삶 속에서 겪은 마법처럼 여겨질 만한 비극을 감당하면서 고통 없는 평화와 실낱같은 희망을 꿈꾸고 좌절하다가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총칼을 들이대는 사실적인 표현보다 오히려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 그리고 침묵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으며 살아가야 했던 가혹한 경험으로 살림이 점점 매사에 초연해지는 현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슬픔과 참혹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살림은 그 고통스러운 꿈과도 같은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사랑이 결여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일으켜 세워 준 초월적 힘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가장 멋진 기적은 사랑이었다. (p. 130)

다 읽고 나니, 후련하기보다는 아쉽다.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할 것 같은 한쪽만 검은색 렌즈를 끼운 안경을 쓴 살만 루슈디의 노여움과 울분 가득한 장황한 수다는, 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내려놓는 순간 또다시 그리워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갱지 2025-09-23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 구절에 많은 상념이 밀려오니, 문득 서글퍼지네요.

곰돌이 2025-09-23 12:24   좋아요 1 | URL
저도 갱지님처럼 서글픈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변화되지 않은 삶 속에서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기까지의 과정을 제 삶과 덧대어 들여다보는 동안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고요. 너무 우울해 말라는 듯이 재밌게 입담도 풀어주는 데, 왠지 그게 더 애잔하더라고요!!
 

샬럿 우드의 <상실의 기도>를 방금 받았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지만, 조금만 훑어볼까 싶어서 펼쳐봤다.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 속이 시끄러울 때,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 소란스러움 없이 차분한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잔디는 없고 그냥 흙먼지 쌓인 죽은 풀밭이다. (p. 16)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묘비, 기계로 자르고 광택을 낸 그 두 개의 돌덩이 앞에 섰다. 묘비의 색깔과 디자인, 그 위의 글자들은 부모님 누구의 흔적도 간직한 듯 보이지 않지만 분명 내가 결정하고 승인했을 것이다. (p. 16)

나의 외면은 변하지 않았으나 내면의 모든 것이 곤두박질치던 기억. 마치 내 안에서 모래톱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던. (p. 17)

마치 알알이 묵주처럼. 마치 내 몸의 뼈 이름을 하나하나 되새기듯. (p. 18)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5-09-15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따끈따끈한 신간이네요. 잘 모르는 작가라서 이런 책은 먼저 읽은 분의 리뷰가 항상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부커상 좋아요. 부커상 출신 작품들 왠만하면 괜찮더라구요.

곰돌이 2025-09-15 20:44   좋아요 1 | URL
앞부분만 조금 읽어봤는데 불편한 느낌이 없고 편하더라고요.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고 싶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흠.. 표현력이 부족해서 답답해요!!) 바람돌이님이 아마 잘 알아채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ㅋㅋ

바람돌이 2025-09-15 20:45   좋아요 1 | URL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고싶은게 제일 핵심이죠. 훌륭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밤의 아이들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기 전부터 기대감으로 들뜨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한다.
내게는 살만 루슈디의 작품이 그런 편인데, 이전에 읽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통해 저자를 향한 존경과 사랑을 담은 번역이라는 말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 김진준 님의 번역이라 <한밤의 아이들>이 더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들뜨게 하는 데는 재미가 크게 한몫한다.
초반에 알아가는 과정을 지나고 나면,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라는 듯 다채로운 이야기로 머리에 기름칠도 시켜주고, 조금 지루하겠다 싶으면 콧방귀 한 번 뀌며 특유의 재치가 섞인 지적인 농담으로 고봉밥 꿀떡꿀떡 넘기듯 책장이 술술 넘어가게 해주어 제법 분량이 많은 책임에도 잘 읽히게 해준다.

총 2권으로 나눠진 이 <한밤의 아이들>은 저자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인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우리나라와 인도는 독립운동 방식이나 식민 지배 기간의 차이는 있어도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것과 독립 이후에도 분단의 아픔을 겪는 것, 그리고 8월 15일이라는 독립 날짜까지 같다는 역사적 연결이 있는 나라이기에 여러 면에서 유대감이 느껴진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따라가 본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을 선언한 날,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져 불가분의 관계로 태어난 이 소설의 화자 ‘살림 시나이’는 곧 서른한 살이 된다. 안타깝게도 그는 지금 혹사당한 몸이 목숨을 건질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로 허망한 죽음에 두려움만 떨고 있다. 남은 시간은 유한하지만 할 얘기가 많아도, 너무 많단다.

살림은 피클 공장의 요리사로 지내는데, 밤에는 그의 곁을 지켜주는 연인 ‘파드마’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와 인도 역사를 들려주고 기록하면서 ‘보존’하는 작업에 만전을 기한다. (생계를 위해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글을 썼던 저자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듯하다) 자기 몸 살피랴 역사를 굽어보랴 의사가 엉터리 치료법을 쓴다는 둥 독자에게 하소연하랴 바빠도 너무 바쁘다.

앗참!! 살림 옆에서 피클 국물처럼 들척지근한 향 풍기는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파드마가 내 심정을 어찌나 잘 알아채는지, 이야기가 곁길로 빠져 늘어지거나 궁금증만 유발하고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면 알아서 찡그리고 독촉하고 끌어내는 등 독자와의 정서적 교감을 하며 등을 시원하게 긁어준다.
아, 일단 살림에게 시간적 여유가 아주 넉넉지 않은 것 같으니 그의 이야기부터 얼른 들어봐야겠다.


35년 전, 1915년 인도 카슈미르의 어느 봄날로 거슬러 가본다.
보석상을 하는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독일에서 최근 의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살림의 외할아버지인 ‘아담 아지즈’의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유럽에서 살다 돌아와 변화의 냄새를 맡은 그의 눈에 이 작은 골짜기는 협소해 보일 뿐이고, 반대로 고향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간 얼음장 같은 게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외할아버지의 ‘코’가 예사롭지 않다!!!

보라, 지금 수면에 반사된 그의 얼굴 한복판에서 성난 바나나처럼 너울거리는 저것을...... (p. 35)

이 거대한 살덩어리를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하는 살림의 코 이야기는 줄줄이 이어지고, 저자의 익살스러움이 담긴 문장도 이어진다. 또 내 뱃속이 간질간질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코가 그냥 코가 아니란다. 카슈미르 골짜기의 지박령 같은 존재인 늙은 뱃사공 ‘타이’가 말하길, 그의 코는 무굴제국의 황제들도 탐낼 정도이며 왕조의 씨앗이 깃들었다고 한다. 나이도 알 수 없고 온갖 잡다한 소문만 무성한 뱃사공 타이는 아담 아지즈를 향해 예언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코가 경고할 때 조심하지 않으면 끝장나는 줄 아시우. 코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크게 출세할 게요.” (p. 45)

어느 날, 카슈미르의 지주 ‘가니’의 딸 ‘나심’이 복통을 호소한다는 전갈을 받은 아담 아지즈는 뱃사공 타이가 노를 젓는 배를 타고 의사로서 가니의 저택을 방문하게 된다. 무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왕진이 계속되었고, 어쩌다 보니(?) 아담과 나심, 이 둘은 결혼하게 된다. 이렇게 살림의 외조부모는 결혼과 동시에 조용한 골짜기를 떠나 도시로 떠나게 되는데......

역사의 아픔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 코가 반응한다.
간지럽고, 또 너무 간지러워진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아담 아지즈가 재채기를 “에에에에-흐엣취!” 하는 순간, 주변에서 비명이 들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무너지고 가슴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그 멍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자국이 사라지지 않는다.

독립을 약속한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약속을 어기고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일부터 1919년 4월 13일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 사건, 1947년 10월 27일 인도-파키스탄 전쟁 등 엄청난 만행이 벌어진 사건들을 포함해 그 외에 아직까지도 공식적인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은 다양한 역사적 아픔을, 저자의 너스레 속에 기가 막히도록 잘 녹여내어 읽는 재미를 높여주고, 농담도 농담이 아닌 것 같은 뼈가 담긴 우스갯소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이방인 같은 심정으로 지냈던 저자의 그 당시 혼란스러운 내면의 심리를 아담 아지즈에게서 느낄 수 있다. 그의 (돼지가죽으로 만든) 진료 가방인 하이델베르크 가죽 가방은 침략자이자 진보의 산물로 상징되는데, 독립운동 탄압을 더 강화하며 심리 없이 인도인들을 체포하고 투옥할 수 있는 ‘롤라트 법’의 폐기를 요청하며 시위하는 인도인들을 향해 영국군이 총격을 가한 날, 그 가방을 들고 거리로 나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머큐로크롬(소독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며 치료를 해준다. 집에 돌아온 아담 아지즈는 자신과 반대 성향인 부인 나심에게 이 혼란스러운 다툼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며 말한다.

“이번 일은 아직 안 끝났소. 우린 떠날 수 없단 말이오. 다시 의사가 필요할 테니까.”
“그래서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여기 죽치고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담은 코를 비볐다. “아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아 걱정이오.” (p. 82)

외조부모의 이야기는 여기서 살짝 건너뛰고 살림의 부모님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느 날, 살림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꼬물대던 시절 어머니가 위험에 처한 힌두교 사나이의 목숨을 구해 준 보답으로 그의 용한 점쟁이 사촌 형을 통해 ‘예언’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뱃속 아이의 앞날을 알려준다는 말이 어머니의 마음을 건드린 것이다. 며칠 후 만난 점쟁이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기이한 목소리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계속해서 내뱉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힌두교 사나이를 다시 만나게 된 어머니가 한 말씀을 하신다.

“그때 당신 사촌 형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요.” (p. 193)


유럽에서 살다 돌아온 외할아버지를 카슈미르가 쫓아내고,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던 암리차르도 쫓아내고, 부모님 결혼 후에도 또다시 여기저기서 그들을 봄베이(현 뭄바이)로 몰아내는 바람에 살림이 봄베이에서 태어난 과정과 거꾸로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봄베이가 동인도회사가 들어와 간척 사업을 벌여 지금처럼 육지로 변하기 전, 아령 모양의 섬이었던 시절에 빼앗기고 또 빼앗기는 패배로 원한만 표독스럽게 번뜩이던 그 옛날까지...(헥헥) 주사위를 잘못 던져 모든 게 다 최악인 시대를 읊어내느라 살림의 입이 고생이 많다.

아무튼 고기잡이 그물과 코코넛과 쌀과 뭄바데비가 지배하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고, 1947년 8월이 되면 이번에는 영국인들이 떠날 차례였다. 영원한 지배는 없다. (p. 206)

봄베이에서 살게 된 살림의 부모님은 인도의 독립 선언으로 떠나야 하는 영국 행정관 ‘메솔드’의 주택 단지에 입주하기 위해 그가 제안한 조건에 수긍하며 거래하게 된다.

메솔드 단지의 매각 조건은 두 가지였다 : 건물 안의 모든 물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송두리째 구입해야 하며 새로운 주인은 그 모든 품목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소유권을 양도하는 시점은 8월 15일 자정으로 미룬다는 것. (p. 209)

이 조건은 1947년 8월 15일 인도의 독립과 그 이후 1948년 6월까지 인도의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한 영국이 ‘그냥 버리자’ 외치고 무책임하게 몸만 빠져나간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와, 이걸 이런 식으로 풀어낸다고?’라고 생각할 만큼 상징적인 것들의 연관성이 놀라울 만한 (이 리뷰에 담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내 집이라고 해도 남의 집에 들어가 사는 것처럼 어딘가 찝찝하기만 한데 메솔드는 가격도 환상적이고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상태로 넘겨주는 것이라며 큰 호의라도 베푼 듯 말한다.

“만사형통이로다.”


(아직도 안 꺼낸) 살림의 탄생 이야기까지는 하고 마쳐야겠다. 1947년 8월 15일 자정, 불행의 시대를 마감하고 독립이라는 자유의 소식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1,001명의 아이 중 정각에 태어난 살림. 아니,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과 함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까지 발생한다.

나에게는 1,001명의 아이 중 마음에 쓰이는 아이가 있다.
허구이길 바랄 만큼 비현실적인 세상 속에서 삶의 의미와 목표, 그리고 나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만든 썩어빠진 세상을 향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시바’라는 아이인데, 희망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했을 이 아이의 난폭함이 오랜 세월 식민 지배를 받았던 인도가 독립이 되었어도 갈등과 분열로 인해 운명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불안정한 모습을 닮았다. 특별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그래봤자 어린아이일 뿐인데, 시대와 나라를 잘 타고났어야 한다는 말밖에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잠재적 위협이 느껴져 불안하게 만드는 이 아이가 2권에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먹구름 낀 궁금함만 가득하다.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나 자신을 스스로 끌어 올리려고 이것저것 해보며 노력했던 시기가 있었다. 뜬금없이 이 얘기를 왜 꺼내냐면, 무너지고 일어서는 반복이 헛되지만은 않았다고 느끼기까지의 나의 간절함을 떠올리게 해준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 생각해 봐야겠어.” (p. 478)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꼬맹이의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게 느껴지던지. 그리고 이 소설에서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이야기인 동시에 내가 흥미롭게 봤던 부분이 있다. 살림이 사나운 기질이 있는 자기 여동생의 호전적인 모습이 ‘사랑’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며 그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인데, 삭막한 상황을 사랑이라는 ‘온기’로 따뜻하게 덮어 주는 것 같아서 그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이 절실한 세상이다.

내가 저자의 책에 손길이 가는 이유는 그의 지적인 유머가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힌다는 점도 있지만, 악조건 속에서도 끌어내고 또 끌어내며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확실하다는 것에 있는 것 같다. 너무 거창하게 받아들이는 걸 수도 있고, 사람이 매번 진지하게만 살아가는 것도 살짝 고리타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삶이라는 것에 대한 태도에 대해 가끔 진지하게 생각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게 만드는 점은 분명 나를 자극하고 손길을 가게 만든다.

아직 2권이 남은 상태라 개인적인 감상을 더 추가하다 보면 여태 스포일러를 샤샤삭 피해가며 적은 나의 노력의 땀방울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아 이쯤에서 1권의 이야기는 무 자르듯 잘라야겠다. 2권에서는 살림의 몸이 왜 지금 서른한 살을 앞두고 만신창이가 되어 다가오는 죽음에 두려움을 떨게 되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아, 고달프다.

후덥지근한 더위에 땀이 비처럼 쏟아지듯 답답한 밤의 끈적임은 사람들의 갈망만큼이나 끈적했고, 살림이 들려준 가정사와 그의 삶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혼란으로 머릿골은 지끈거렸다. 환상과 현실의 분별력을 잃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온갖 언어로 존재를 알리는 소리, 동류가 동류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들려줄 이야기를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5-09-14 0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은 게 하도 오래 전이라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 같네요. 곰돌이님 글도 잘 쓰시지. ㅋㅋㅋ

곰돌이 2025-09-14 06:36   좋아요 1 | URL
1권 재미나게 잘 읽고 2권으로 갑니다.ㅎㅎ Falstaff님 칭찬 요정님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