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 탱고>를 펼쳤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서 앞부분만 읽어보려고 했는데 금세 100쪽을 넘겨버렸다.

모든 것을 훑고 가버린 듯한 황폐한 마을이 등장한다.
습하고 축축하면서도 시큼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방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떠날 시기를 노리는 사람들이 내뿜는 두려움과 무력감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머릿속에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간다.

진창길을 걷느라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부츠를 신은 남자들과, 강박이 느껴질 만큼 끊임없이 사람들을 기록하는 의사까지... 쓸만한 물건들은 모두 드러내어 버려진 물건과 함께 남겨진 듯한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동안 소리까지 민감해지면서 나마저 집요한 관찰자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아직 윤곽이 분명치 않은 그 형체를 보고 싶게 만드는 궁금증 때문인지 책장이 계속해서 넘어가고 있다.


- 밑줄 -

그는 요람과 관의 십자가에 결박되어 경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는 결국 냉혹한 즉결심판을 받고 어떤 계급 표식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시체를 씻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부지런히 피부를 벗겨내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차 없이 인생사의 척도를 깨닫고 말리라, 돌이킬 수도 없이. (p. 15)

매일 밤 대야에 담긴 따뜻한 물만 있으면 돼. (p. 26)

두 사람은 몇 시간 동안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수킬로미터를 걷는다. 어쩌다가 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이는 것도 같지만, 짙은 어둠이 내내 이어진다. 어쩌다가 달도 모습을 드러내긴 하지만 달은 그 아래 자갈길을 걷는 두 지친 방랑자들처럼,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는 마주치는 모든 장애물을 통과해 마침내 새벽이 올 때까지 하늘의 전장(戰場)을 가로질러 도주하는 중이다. (p. 70)

혼자서는 절대로 저지할 수 없다고 느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모든 것-집들과 담장들, 나무와 들판, 공중에서 하강하며 나는 새들, 배회하는 짐승들, 육신을 가진 인간들, 욕망과 소망들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힘에 맞설 수는 없었다.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한 위협적인 공격에 헛된 저항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음험한 몰락에 자신의 기억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의 모든 것, 벽돌공이 쌓고 목수가 만들고 여인들이 바느질한 모든 것이, 남자들과 여자들이 애써 이룬 모든 것이 저승의 물살에 어지러이 휩쓸려 형체가 불분명한 액체로 화한다 해도 오로지 기억만은, 그가 맺은 계약이 깨져 죽음과 몰락이 그의 뼈와 살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살아 있을것임을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p.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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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10-09 1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시작하자! 마음 먹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첫 장 넘기면 곧바로 확 빨려 들어간 몇 안 되는 책이었답니다. 이 책 읽으신다는 것 만으로도 반가워서 말입죠.

곰돌이 2025-10-09 20:58   좋아요 2 | URL
한두 장만 읽어보고 느낌만 조금 가져보자!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세상에나... 페이지 터너! (참고로 이 책은 Falstaff님 리뷰를 읽고 땡투까지 했답니다.)

그레이스 2025-10-09 21:25   좋아요 2 | URL
폴스타프님이 원조셨군요 ^^

페넬로페 2025-10-09 21:45   좋아요 2 | URL
역시 폴스타프님👍👍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10-09 2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 작가님 노벨문학상 수상하셨네요!

곰돌이 2025-10-09 20:59   좋아요 1 | URL
오~!! 괜히 기쁘네요. 전 참고로 살만 루슈디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었어요...ㅎㅎ

페넬로페 2025-10-09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곰돌이님
선견지명 있으십니다^^

곰돌이 2025-10-09 20:59   좋아요 1 | URL
곰돌둥절!!! ㅎㅎ 어쩌다가 이렇게 책 읽은 시기와 맞아떨어졌어요. 얻어 걸렸는데 그래도 왠지 기쁘네요, 곰돌으쓱!! ㅎㅎ

2025-10-09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09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10-09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발표하는거 보고 방금 샀는데,,, 곰돌이님께 땡투를 했더라구요.
전에 장바구니에 넣을때 곰돌이님 리뷰나 피드 보고 한듯요.^^
발표 직전까지 제가 왜 긴장을 했는지...^^ 암튼 축하합니다~~

곰돌이 2025-10-09 21:44   좋아요 1 | URL
우연히 <사탄탱고>를 펼치게 되어 그레이스님께 축하까지 받게 되네요. 하하!! 또 곰돌둥절입니다!! 이 책의 작가님이 조금 무섭게 생기셔서 분위기에 압도되었는데 책은 술술 잘 넘어가네요!! (아무말 대잔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