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의 삶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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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지키며 사람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는 남자에게 안쓰러움이 담긴 눈빛을 건네는 한 여자.

자신과 닮은 외로움의 냄새를 맡고 채워진 적 없는 사랑이 만들어 놓은 빈 공간을 확인한 순간, 그 짧은 순간에도 불행을 공유하며 서로를 위로해본다.

슬픔도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했을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가혹하기만 한 이들의 세월은, 결코 추억의 한 페이지를 넘겨보듯 애틋한 마음으로 들여다 볼 수 없을만큼 가련한 인생이었다.


이 책은 유럽의 강대국들이 문명화를 의무삼아 패권을 잡으려고 식민지 쟁탈 등으로 전쟁을 일으키던 시절, 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일들을 배경으로 한다.

가난한 집을 가출해서 길을 떠돌다가 나중에는 독일군에 자원 입대하는 일리아스와 부모님 죽음 이후 남의 집에서 노예처럼 지냈던 일리아스의 여동생인 아피야, 마찬가지로 가난에 의해 인도에서 넘어와 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상인 밑에서 일했던 칼리파, 그리고 도망치듯 독일군에 자원했다가 죽음의 기로에 섰던 함자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총 4부로 엮었다.


일리아스는 어릴 적 군인에게 짐꾼으로 납치 되었다가 풀려난 뒤, 근처 독일식 미션스쿨로 보내졌다. 독일어를 배우고 교육을 받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음에도 유럽 국가 간 전쟁이 벌어지자 자신들을 지배했던 독일군에 자원입대한다.

독일 농장주인의 도움을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낸 일리아스에게는 자신들을 지배 했던 나라를 향한 시선이 다른 식민지인들과는 달랐던 것 같다.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여동생에게 글을 알려주고는 떠나버린 오빠 일리아스.

가출 했던 오빠를 겨우 다시 만나 노예처럼 지내던 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기쁨도 잠시, 아피야는 군에 입대하는 오빠가 떠난 뒤, 다시 전에 살던 남의 집으로 가야만 했다.

여자가 감히 글을 배우려 한다면서 그녀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아저씨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의 가족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살기 위해서 편지를 썼다. 오빠의 친구 ‘칼리파’에게로.

(P. 77) 카니누미자. 니사이디에. 아피야. 나를 다치게 했어요. 도와주세요.


영국령 동아프리카라고 부르던 곳에 유럽인을 정착시키는 식민지 정책이 승인되었다. 야만적인 약탈과 식민지 노예의 눈물을 싣는 침략 도구로 발전될 철도가 건설되고, 그 철도를 끊어놓으려는 기습의 목적과 반복적인 순찰 등을 하는 독일령 아프리카의 ‘슈츠트루페’에 입대한 일리아스. 그리고 영국에 인도인 ‘세포이 용병’이 있듯 독일의 아프리카인 용병 ‘아스카리’에 자원한 함자.

서로 다른 공간에서 누군가는 독일을 위해, 누군가는 현재의 불행에 벗어나기 위해 입대를 한 것이다.

독일군에 자원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자발적인 일부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른들의 협박에 이끌리거나 상황에 휩쓸리거나 혹은 길거리에서 데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의 빚 때문에 상인에게 넘겨진 함자는 도망치듯 충동적으로 자원해서 독일편에 서게 된 인물인데, 잔혹한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는 예쁘장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함자에게 유독 한 중위가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시중을 드는 당번병으로 삼고, 독일어까지 알려주는 등 이해하지 못 할 행동을 하며, 흑심이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이를 내내 못마땅하게 여겨온 소위에게 어느 날 함자는 칼을 맞고 크게 다친다. 이 소식을 듣고 나타난 중위는 독일이 만든 선교지로 데려가 함자의 치료를 부탁한다. 독일군 장교가 아프리카 용병을 위해 치료를 맡긴다니, 무슨 이유일까?


중위에겐 고작 17살 밖에 되지 않은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강요로 입대 했다가 병영에 불이 나는 사고로 죽은 동생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동생 나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함자에게 연민을 느낀게 아닌가 싶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통받는 함자가 깨어나면 읽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생전에 동생이 좋아했던 책을 두고 다시 전쟁터로 향하는 중위.

함자가 글을 읽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던 선교지 사람들은 그 책을 함자가 보지 못하게 치웠고, 호전이 된 후 책을 찾는 함자에게 목사는 선뜻 가져다 주지 않았다.

이 책에서 내가 느낀 핵심으로 꼽는 말 중에 하나가 이때 나오는데, 함자가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을거란 말을 남기고 떠난 중위의 말에도 의문을 품고 돌려주지 않는 목사를 향한 그의 부인의 한 마디가 그것이다.

(P. 199) “정당한 주인에게 책을 돌려주어야 한다.”


독일과 영국의 전쟁에서 패한 독일이 사라지고 선교지에서 나온 함자는 돌고돌아 옛 고향마을로 오게 된다. 거기에서 칼리파를 만나고 어느 상인의 밑에서 목공일을 하게 된다. 오고 갈데 없는 함자를 칼리파가 자신의 집으로 들이고, 거기에서 아피야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다. 조혼과 억압된 삶을 살았던 아피야가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용기를 냈던 순간은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뿌듯했다.

이렇듯 이들의 운명에 가혹함과 슬픔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함자와 아피야에게 투박하지만 애정과 연민의 손길로 구출하고, 이들에게 쉽사리 잊혀질 수 없는 수 많은 후회와 슬픔을 넘어 다시 살 수 있게 해준 ‘칼리파’의 관심이 있었으며, 폭행에서 벗어나려 살기 위해서 도움을 요청했던 아피야의 편지를 전달해준 마을의 어느 가게 주인과 수레꾼의 도움의 손길도 있었다.


리뷰 맨 처음에 언급했던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본 남녀가 바로 ‘함자’와 ‘아피야’이다.

이 둘은 보이지 않는 미래의 행복을 꿈꿔보지도 못한 채, 불행한 삶을 살아가다 만났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부가 되어 그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성인으로써, 독립된 그들만의 삶을 찾음으로써, 무엇을 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아피야에게 자유란 특별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 눈에 좋아보이는 가장 끌리는 바나나를 고르고, 새로 수확한 호박을 내 손으로 고르고 사는 것.
나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할 수 있을만한 일을 내 힘으로 찾아서 하는 당연한 것들, 그 뿐이었다.
이런 사소한 일로써,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기를 얻고, 힘을 얻는 것이었다.


전쟁의 과정에서 희생된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이후 반식민주의 정서가 번지고, 사회주의 바람이 불다가 마침내 독립을 이루기까지의 역사를 담은 이 책은 ‘잊혀지고’, ‘지워지기’를 거부하며, 아프리카 출신 아랍계 작가인 압둘라자크 구르나가 문학으로써 꺼지지 않는 등불을 밝히듯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바라며 만든 작품이라 생각한다.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1994년 <낙원>을 시작으로 2001년 발표한 <바닷가에서>와 2005년에 <배반> 그리고 2020년에 <그 후의 삶>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을 읽을때마다 느꼈던 것이 있다면, 암담한 상황이 주는 서글픔이나 충격적인 상황의 절망감이 읽고 있는 나에게 바로 송곳처럼 찌르듯이 다가온다기 보다 그 앞에 압둘라자크 구르나가 서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고통도 그가 먼저, 절망도 그가 먼저 받고 그의 위로의 손길을 거친 후에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아마도 잔지바르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한 그가 남아있는 가족들과 고향 사람들을 향한 죄책감으로 그들이 삶에서 겪는 고통을 먼저 아파하는 맘으로 적어내려갔을 그 마음이 헤아려지기 때문인 것 같다.

척박한 땅을 벗어난 것은 그의 육신이었을 뿐, 낯선 땅에서 이방인처럼 겉돌며 살아가는 동안 마음은 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터이기에 그 심정들이 그가 남긴 책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이 된다. 내가 읽지 못한 <낙원>을 제외한 그의 다른 소설 <바닷가에서> 는 영국으로 망명한 노인 ‘오마르’가 있었고 <배반> 에서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라시드’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가난에 허덕이고 질병에 노출된 환경 속에서 미래를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미래를 위해 배워야 하는 것을 알려준 적 없는 부모에게서 벗어났던 이번 <그 후의 삶> 속의 등장인물 ‘일리아스’의 입을 통해 그의 여동생 ‘아피야’에게 전하는 말이 왠지 더 가슴 아프게 들려온다.

(P. 62) 어느 밤에는 너무 배가 고픈데다 아빠가 너무 시끄럽게 신음소리를 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아빠는 다리가 부풀었고 썩는 고기처럼 고약한 냄새가 났어. 아빠 잘못이 아니라 당뇨 때문에 그런 거야. 눈물 고이는거 보이네. 널 괴롭히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아마 그런 이유로 내가 도망치고 싶었을 거라는 걸 설명하고 싶은거야.


나는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책들을 통해 아랍계 아프리카인의 애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의 뿌리를 찾으려는 흑인들 앞에 침입자로만 보였을 아랍인이나 인도인들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읽는동안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픈데도 서정적인 문장들에서 느껴지는 처연함을 머금은 아름다움은, 저자의 책을 읽을 때마다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놀라움을 자아낸다.
절망과 슬픔이 굳어져서 그런지 우리 삶이 뭐, 좀 이랬어. 라고 체념하듯 말하는 덤덤함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 같다.


그 후의 삶은 어땠을까.

소말리아, 남아라비아, 서인도 등의 바다건너에서 온 무역상들과 상인들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는 해안마을에서 이따금씩 떠올려지는 내륙에서의 잔혹함을 지우지 못한 채, 과묵하지만 진실됨이 느껴지는 모습에 호감을 주는 사람이 된 함자.

소심해 보이는 함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려주는 신호를 보내야겠다는 결심하고 처음으로 느낀 호감의 대상에게 용기를 내 결혼까지 한 아피야. 이후에 조산원의 직업을 갖게 된 그녀의 모습에서 금욕적인 생활과 억압이 있던 시절처럼 더 이상은 자신의 인생을 낙담으로 채우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하듯 역사의 발자취를 들여다보고 끄집어 내는 사람들이 있었던 한 편, 식민지를 되찾고 싶어하는 나치의 편에 서서 식민지 반환을 요구하는 깃발을 함께 든 퇴역군인 ‘일리아스’같은 사람도 있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남긴 씁쓸하면서도 안타까운 모습이다.

식민지 사람들로 만든 군부대이기 때문에 헤아리지 못할만큼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희생 당했다. 전쟁이 끝나도 그들은 뿔뿔이 흝어지고 가난에 시달려 당장에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자식들은 더 나은 배움의 환경을 위해, 자신들을 지배하는 국가가 제공하기로 한 여러 약속들에 귀를 기울이고 또다시 그들의 전쟁에 참여하고 목숨을 잃고, 흑과 백으로 나누어진 삶에서 제한된 가능성을 인정하며 살아가야만 했다.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돌아오는 침묵만을 들으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들은 잊혀져 간다.

(P. 326) 그 한가운데 혼란과 폐허가 있다해도, 세상은 늘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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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람이라는 거, 내가 다른 사람이면 좋을 텐데, 차라리 다른 물건이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게 아니라는 거에 갑자기 두려워지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걸까요?"
"맞네요, 이런 사람이면서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거,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면서도 이런 사람이라는 거. 맞아요, 이렇게 말하면 딱일거 같아요. 내가 이런 부류라는 거, 무슨 다른 부류가 아니라 하필 이런 부류라는 거에 무서워지는 그런......"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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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뒤처진 야만인들을 상대하고 있고, 그들을 다스릴 유일한 방법은 야만인들과 허영심 많은 난쟁이 왕국 술탄들에게 공포를 불어넣고 모두를 두들겨패서 복종하게 만드는 것뿐이야.
슈츠트루페는 우리 도구지. 너도 마찬가지야. 우린 너희가 상상도못할 정도로 규율이 잡히고 고분고분하고 잔인해지기를 바라지. 너희가 망설임 없이 우리 지시에 따르는 낯두껍고 비정한 허풍쟁이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너희에게 값을 잘 치러주고, 너희를 마땅히 존중해줄 것이다. - P134

자신들로서는 기원조차 알 수 없는 공허한 야망이자 결국 그들을 지배할 목적이었던 명분을 맹목적으로, 살인적으로 끌어안고 계속 분투했다. 짐꾼들은 말라리아와 이질, 탈진으로 여럿씩 죽어나갔다. 아무도 굳이 그 사람들의 숫자를 세지 않았다. 그들은 그야말로 겁에 질려 탈영했다가 피폐해진 시골에서 죽어갔다. 나중에 이런 사건들은 기이하고 무심한 영웅담으로, 유럽에서 벌어진 엄청난 비극에 곁들여지는 이야기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시대는 그들의 땅이 피로 젖고 시체로 어지럽혀진 시기였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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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살던 마을에는 다시 가본 적이 없어. 옛날 식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네. 이 마을에 와서 살면서 알게 된 건데, 그곳이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더군, 사실 여기 오기 전에도 고향 가까운 곳에 살게 되리라는 걸 알았지만 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 - P40

진짜 오빠와 언니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장난삼아 놀리고 아프게 하더라도 그녀는 두 사람을 오빠와 언니라고 생각했다. 때때로 둘은 매우 고의적으로 그녀를 때렸다. 그녀가 성질을 돋울 만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녀에게는 막을 힘이 없어서 때렸다. - P51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그녀를 더욱 슬프고 작게 만드는 것들, 이 세상에서 혼자만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들은 따로 있었다. 매야 다른 애들도 매일 맞는 것이었으니까.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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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꽃 소년 - 내 어린 날의 이야기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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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기만 한 귀한 시간들을 귀한지도 모르고 지나쳐버린 걸 이제와 후회해서 뭐 하겠냐만, 그럼에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후회할 수 밖에 없기에 참 착잡하다.

이럴때면 다들 저마다의 먹먹한 맘을 한 켠에 두고, 오늘 하루를 또 살아 나가고 있을거라는 생각을 급히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P. 13) “이건 하느님의 실수가 분명하당께요. 어쩌케 날씨 좋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봄가을만 요로코롬 짧고 바쁘게 만들었당가요. 하느님의 실수가 아니믄 심술이랑께요.”

“좋은 날은 말이제, 짧아서 좋은 것이여. 귀한 건 희귀하니께 귀한 것이고. 그랑께 감사함이 있고 겸손함이 있는 거제. 하이튼 하느님한테 답장 오믄 나한테만 살짝 알려주드라고잉. 하하하.”


하늘은 높푸르고 대추 밤 호두도 따야하고, 가을 운동회랑 소풍도 가야해서 바쁜, 그러면서도 좋은 날 많은 봄가을이 짧아 아쉬움을 말하는 아이 ‘평이’에게, 좋은 날은 짧아서 좋은거라는 신부님 말씀에 난 왜 울컥 하는건지.

좋은날을 떠올리니, 그 자체만으로 좋으면서도 같이 회상하고, 또 같이 계속 누리고 싶지만 그럴수가 없는 떠나간 사람들이 떠올려져 내가 그렇게 먹먹한 감정을 느끼는가 보다.

아버지와 할머니를 일찍 여윈 후, 허우룩한 마음이었을 평이는 그럼에도 씩씩하고 식구들 챙길줄도 아는 속 깊은 어른스러운 아이다. 그 속마음을 모를 수가 없기에 참 대견하면서도 애잔하다.

어찌나 동네 사람들에게도 싹싹한지 모른다.
나는 평이처럼 넉살도, 수더분한 면도 다 부족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대차지도 않아 그림자처럼 주변을 서성이다 맛있는거나 ‘쓰윽’하고 가져가 보는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해보는 사람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사람으로써, 서로들에게 살뜰한 사람들이 내뿜는 에너지만으로도 나란 사람은 서서히 충전이 필요해진다.

‘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이런 나일지언정 박노해 시인의 어린시절 이야기 속, 서로 다붓다붓 정을 나누는 모습은 보기만해도 흐뭇하고 충만한 감동과 깨달음을 얻게 한다.
본명인 박기평으로 살아갔던, 모두가 평이라고 불렀던 그 시절에 함께 했었던 사람들이, 이 아이에게 들려주는 말들과 굳이 또 말로 하지 않아도 참된 인간의 길을 알려주는 행동들이, 여러면으로 부족한 나란 사람에게는 자극제가 되기도 하고, 필요했던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도 해줬다.


모내기를 앞두고 논일을 도와주는 일손들을 위해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하다가, 갯장어 손질 중 손을 다친 어머니.
대신에 급히 어머니가 알려준대로 장어요리를 해버려야(?) 하는 8살 평이.

그 어린것이 어머니 손에서 뿜는 붉은 피를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이미 가슴이 두근두근 머리가 하얗게 질렸을텐데, 생전 해 보지도 않은 요리까지 해야 했으니, 그 막막함과 부담감과 분주함의 식은땀이 안 봐도 생생하여 내가다 초조했다.

더구나 자기집 논일을 도와줄 일꾼들을 위해 정스러운 마음으로 푸지게 차려주고 싶었을 어머니 대신 아닌가. 이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8살 인생에 이 또한 얼마나 큰 사건이었을까.

그럼에도 평이는 인생 첫 요리를 잘 마쳤고, 자신이 아플 때 받았던 정성들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꿰매고 온, 어머니 이마의 수건을 올려 땀을 닦아줄 줄 아는 다부진 아이였다.

(P. 81) 울 엄니가 크게 베인 손을 움켜쥐고 핏방울 떨구며 홀로먼 황톳길을 걸어가던 꿈같이 어질하고 절박했던 그날 이후, 나에게 요리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어느 날, 준비도 연습도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울며 기도하며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주어지면,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꼭 해내야만 하는, 내인생의 모든 것이 그날 정오에 시작되었다.
생각할 때마다 아뜩하고 목이 메이는 나의 첫 요리. 내 인생의 첫 요리.


이야기에 빠져서 들여다보는 내내, 자꾸만 책 장수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가며 읽었다. 최종회를 남긴 드라마를 보며 ‘아, 이제 다 끝나가네.’ 하면서 아쉬워하듯 그 마음을 오랜만에 느껴본 것 같다.


재밌다. 글이 너무 재밌다.
토끼털 귀마개를 하고 누빈 솜옷을 입은 찐빵 같다던 방물장수가 사랑방에 모인 마을 사람들 앞에서 펼치는 말 보따리는 청산유수가 따로 없고, 실감나는 묘사에 나도 사랑방 어디 한 귀퉁이에 자리펴고 앉아서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이날 방물장수에게 어렵게 얻어 낸 무협지를 호롱불 밝혀 밤새도록 홀린 듯 읽으며 품었을 평이의 장대한 꿈도 그려지는 듯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성실하고 좋은 어른들이 계시는 모두가 정답게 지내던 시절속에서, 조금씩 자라났을 아이 ‘평이’가 바라본 세상은, 기대했을 세상은, 분명 무협지를 보며 키웠을 그 꿈을 키울만한 가치가 있는 따뜻한 세상이었을텐데......

(P. 104) 봉지 속에 꽃씨들이 땅에 묻혀 새근새근 연초록 새싹을 내밀고 그 환하고 해맑은 얼굴로 향기를 날리며 피어날 봄을 기다리며, 내안에도 나만의 속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살아온 길을 들여다보니,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배짱 좋던 아이가 어느 새 자라나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향해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고, 민중의 고통을 덜어주려 평등과 희망과 사랑을 말하는 길 위에 서 있게 할 수 있었던 그 힘의 뿌리가 되었을 부모님과 할머니와의 이야기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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