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린 베개와 자수 액자 속 정교한 바느질 한 땀 한 땀에, 저 높이 달린 흰 선반 위 도자기 십자가에, 참나무 탁자 위 하얀 도일리 한가운데 놓인 어머니의 애장품 담청색 꽃병에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빠가 들여왔던 번쩍번쩍한 밤색 라디오에는 아빠가, 손수 만든 체커판에는 캘 오빠가, 비비언 이모가 가장 좋아했던 의자에는 이모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남자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을 거라고 호언했다. - P255
긴 진입로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폐를 찢을 것처럼 날카로웠던 겨울바람이 어느덧 햇볕에 데워져 포근하게 느껴졌다. 바닥에 쌓인 눈은 경이롭게 반짝였다. 앙상한 미루나무 사이사이를 찌르레기들이 재잘거리며 날아다녔다. 봄이 오고 있다는 확실한 신호였다. 루비앨리스 집을 지나자 솔밭에 둘러싸인 그 작은 집이 내게 주었던 위안이 떠올랐다. 내가 처음으로 월의 품에 안긴 곳이었고, 빅 블루에서 내려온 나를 루비 앨리스가 돌봐준 곳이었다.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아쉬움이, 평생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 곧 물속에 잠겨버릴 풍경에 대한 아쉬움이 내 발목을 잡았다. - P258
새로운 삶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지난날의 선택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의심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지금을 지나야만 그다음이 펼쳐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가 없고 초대장이 없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공간으로 걸어 나가야만 한다. 그건 월이 가르쳐주고, 거니슨강이 가르쳐주고, 내가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마주했던 곳인 빅 블루가 끊임없이 가르쳐준 진리였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내가 나아가야할 다음 단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고, 나는 그걸 믿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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