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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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해 동안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고향, 산들바람과 바닷소리가 들려오는 거리에 ‘미스 카브랄’이 섰다. 아니, 잔혹한 비극의 땅에 발을 내디뎠으니, 오랫동안 누구도 부르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그 이름으로 불러야겠다. 우라니아.

열네 살의 나이에 고향을 떠났던 아이는 이제 마흔아홉의 어른이 되어 돌아왔다.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조차 외면했던 그녀는 왜 이제야 돌아왔을까. 뒤늦은 연민일까, 끝내 끊어내지 못한 피의 이끌림일까. 평생을 절대 권력의 가장 충직한 사냥개이자 맹신자로 살며 온갖 영욕을 맛보았던 아버지는, 이제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한 채 병상 위에 무력하게 누워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 파멸을 내려다보는 우라니아의 서늘한 시선은 연민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지독하고, 증오라 부르기엔 너무나 시리다.

넌 그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 넌 계속해서 혼자 말해야 해. 네가 30년 넘게 매일 그랬던 것처럼. (p. 185)

분명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없을 그 잔인한 기억들이, 세월을 뚫고 카리브해의 눈 부신 햇살 아래로 들춰지기 시작한다. 어릴 적 기억을 따라 위태롭게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심장을 마구 뛰게 만드는 우라니아의 그 시절의 기억 속에는, 단지 개인의 과거를 넘어 도미니카 공화국 전체를 뒤덮은 비극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 장부터 압도적인 분위기로 숨죽이게 할 만큼 몰입력이 대단해 정말 술술 읽어나갔다. 특히 트라우마로 가득 찬 ‘과거’를 향해 스스로 던지는 인물들의 내면 고백, 저자가 배치해 둔 독특한 문장들이 내게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속으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보통 자신의 기억을 회상할 때는 1인칭을 쓰기 마련인데,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자꾸만 자기를 ‘너’라고 부른다. 우라니아뿐만 아니라 도미니카 독재정권 아래에서 저마다의 트라우마를 겪은 인물들에게, 과거의 기억은 너무나 끔찍하고 파괴적인 역사적 상처였던 것이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자신을 부르는 이 지독한 역설.

소설은 3인칭으로 건조하게 흘러가다가도, 갑자기 2인칭 ‘너는’으로 가슴을 훅 찔러 들어오는 문장들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그 시점의 균열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감정 속으로 더 깊숙이 끌려 들어갔고, 가슴 한구석이 서늘할 정도로 슬퍼졌다. 이야기를 읽고 있다기보다, 바로 옆에 나란히 선 채 그들이 외면해왔던 기억들을 함께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깊은 내면에 숨겨둔 상처를 억지로 끄집어내느라, 자신을 얼마나 아프게 다그치고 있을지가 문장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초반부터 할 말이 왜 이렇게 많아지는지 모르겠다. 이 뒤로 교차하며 펼쳐질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의 심리와 암살자들의 긴박한 이야기까지 남았는데, 이번 리뷰는 어째 막판에 무 자르듯 잘라야 할 것 같다.

당시 도미니카가 처한 고립된 국제 정세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절대 권력자 트루히요의 내면이 드러나는 장면도 꽤 흥미롭게 읽었다. 현재의 우라니아 시점과 35년 전의 과거가 교차하는데, 과거 속 트루히요가 목욕을 하면서 라디오 채널을 돌리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검열을 받는 라디오 속 세상은 국민을 현혹하고 독재자의 눈을 가리기 위한 뻔한 거짓 승리 소식만 가득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실제로는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왕따가 된 상태인데, 독재자 혼자 욕실 안에서 그런 방송을 들으며 가짜 우아함과 통제력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셈이다. 그가 통제 못 하는 것은 단 하나, 빌어먹을 방광이다.

재미있는 건 소설 속 트루히요가 자기 안의 ‘검은색’을 경멸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진짜 본모습(아이티 혈통)은 죽도록 혐오하면서 정작 라디오 속 기만적인 세상 뒤에 숨어 완벽한 척 허세를 부리는 모습, 여기에 제 목숨 하나 보전하겠다고 미신에까지 매달리는 그 지독한 열등감과 기괴한 집착을 들여다보자니 참 없어 보이기 짝이 없었다. 제아무리 절대 권력자라 떵떵거려도, 라디오의 거짓말 뒤에 숨은 실망스러운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명치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파국의 서막을 본인 또한 이미 직감하고 있지 않았을까? 더위를 식혀주는 인공적인 찬바람조차 ‘가짜 바람’이라며 집무실에 에어컨조차 두지 않았을 만큼 예민한 사람이니 말이다.

‘염소’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30년 세월이 넘도록 철권통치한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의 별명이다. 겉으로는 대단히 고결하고 전지전능한 지도자인 척했지만, 뒤로는 수많은 여성을 유린했던 그의 추잡한 성적 탐욕과 징글징글한 권력욕을 ‘발정 난 염소’에 비유해 비꼬아 부른 것이다. 그 뒤에 붙은 ‘축제’는 절대 권력자가 벌였던 광란의 지배 역사와 동시에 그 독재를 끝장내기 위해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준비한 거사를 뜻한다. 이렇게 제목의 의미를 알고 나니 확실히 다르게 와닿는다. 하지만 읽기 전에는,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은 작가라는 생각만 있었을 뿐 선뜻 손이 가는 제목과 표지는 아니었다. 딱히 그런 걸 많이 따지는 편은 아닌데도 어딘가 껄쩍지근한 느낌이 있었달까 ㅋㅋㅋ 원래는 리뷰도 안 남기고 읽었다는 흔적만 남길 생각이었는데, 이렇게까지 할 말이 많아질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이제 2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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