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암이 의심스럽다는 진단을 받은 때가 2003년 11월 중순이다. 뒤에 알고 보니 이미 임파선으로 전이된 상태였다. 담당의사 말로는 이렇게 전이된 환자들 가운데 5년 생존율이 20-30% 정도라고 한다. 용케 5년을 잘 살아왔다. 

 2003년 12월 말부터 세 차례 항암 색전술을 받고 이어서 스물 네 차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때마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나마 입맛 당겼던 음식이 어머니가 해 주시던 콩죽이었다. 한 번은 시골에서 어머니가 직접 해 오셨고, 한 번은 아내가 시골 가서 쑤어왔다.  손바닥만큼씩 썬 두부에 비개 붙은 돼지고기 넣고 고춧가루 듬뿍 뿌려 끓인 두부찌개도 떠올랐다. 맵고 짠 두부찌개는 먹을 수 없고 콩죽만 몇 번 먹었다.

초기 항암치료 받고 나서 3년여 동안은 운동요법, 명상요법, 식이요법을 정성껏 잘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 그렇게 해보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어느 정도 살았다 싶을 즈음 빵가게 앞을 지날 때 마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빵 냄새를 참아내기 힘들었다. 슬그머니 빵을 사먹었다. 내가 세운 원칙을 어기는 짓이었다. 한두 번 먹고 나니 빵 특유의 냄새만 아니라 혓바닥이 옛 기억을 되찾아 난리였다. 안되겠다 싶었다.  아내가 거칠고 거무스레한 우리 밀 식빵을 사서 배낭에 넣어 주었다. 그것도 천천히 꼭꼭 씹으면 먹을 만 했다. 그렇게 제과점 빵 유혹을 벗어났다.  

 그 다음에는 붕어빵이 문제였다. 우리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20여분 걸린다. 늘 걸어 다녔다. 중간쯤에 붕어빵과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다. 어느 날 1천원에 네 마리 주는 붕어빵을 한 봉지 샀다. 한 달에 한두 번으로 늘어났다. 붕어빵을 들고 길에서 한 마리씩 꺼내 먹는 맛이 빵 못지않다. 신호등에 걸리면 집에 들어오기 전에 네 마리를 다 먹을 수 있다. 바로 파란불이 켜지면 시간이 모자란다. 그럴 때는 다음 파란불까지 기다리든가 아니면 아파트 담장 모퉁이 당단풍 나무에 기대서서 먹었다. 들고 들어가면 한 마디 들을 것이 뻔하고, 아이들 보기에도 창피하지. 그런 것도 못 참느냐고.  

 붕어빵을 먹다보면 어렸을 때 먹어본 풀빵 맛이 떠오른다. 껍질과 속에 넣은 팥 사이에서  말랑말랑하고 보드랍던 감촉을 느낀다. 강원도 홍천 서석장은 끝자리가 4와 9일일 때 서는 5일 장이다. 초등학교 다니던 1960년대도 마찬가지였다.

장날이면 장터를 몇 바퀴 돌다가 끄트머리에 있는 풀빵 장사 앞에서 맴돌곤 했다. 풀죽 쑤려고 만든 것 같은 밀가루 물을 주전자로 풀빵 틀에 돌아가면서 따른다. 구멍하나가 지금 국화빵보다 배는 컸다. 아래쪽이 다 익으면 나무막대에 굵은 철사 줄을 꼬부려 만든 꼬챙이로 콕 찍어서 홀딱 뒤집는다. 저러다가 익지 않은 밀가루 물이 쏟아지지 않을까, 삐져나가 땅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무색하게 제자리에 착착 들어가 앉는다. 조마조마하며 지켜보다 입안에 고였던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 앞에서 기웃거리다 보면 장보러 온 엄마를 만날 때가 있다. 잘하면 풀빵을 얻어먹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그때 풀빵에는 속에 팥도 들어있지 않았는데도 입에 착착 들어붙으며 살살 녹았다. 그 맛이 조금 뒤 신앙촌 크림빵이나 삼립빵 속에 발라놓은 하얀 크림을 앞 이빨로 삭삭 긁어먹는 것 못지않게 환상이었다.  

 초등학교 때 말고는 풀빵 먹던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20여년이 지난 뒤 1980년대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으로 나온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에서 다시 풀빵을 만났다. 이 부분이다. 

 “그 당시만 해도 도봉산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서 일이 끝나고 밤늦게 도봉산 집까지 가려면, 미아리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서 내려서 한 시간 남짓 걸어야만 했다. 

 때때로 그는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 값을 털어서 1원짜리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은 주린 창자를 안고 온종일 시달린 몸으로 다리를 허청거리며 미아리까지 걸어가면 밤 12시 통금 시간이 되어 야경꾼에게 붙잡혀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도봉산까지 걸어서 집에 당도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사이에 파출소 순경들도 사정을 알고 그냥 통과시켜 밤 한 시, 두 시가 지나 집에 돌아오는 일이 버릇처럼 되었는데, 이것은 그 뒤 그가 죽을 때까지 3, 4년 동안 계속되었다“

전태일이 사주었던 풀빵은 한 개에 1원짜리였다. 요즘 국화빵만한 크기였나보다. 서석시장에서 팔던 풀빵은 좀 커서 10원에 네 개였다. 전태일의 일기.수기.편지 모음집인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에 보면 풀빵이 국화빵이고 국화빵이 풀빵이었다. 

전태일이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 다니면서 풀빵 사주던 이야기는 지금도 거의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노동운동사 강의를 할 때 종종 인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을 읽은 때는 1984년이었을 것이다. 1983년 6월 초판이 나온 다음해이다. 나중에야 <<전태일 평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태일평전은 그전에 읽었던 광민사판 문고본 <<노동의 역사>>,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민중교육론>>, 조금 뒤에 읽은 쟝세노의 <<실천을 위한 역사학>>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 민중의 역사를 연구하고 교육으로 돌려주자고 마음먹게 만들었던 책 가운데 하나였다.    

 전태일을 따라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인 1960년대로 다시 들어가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가난한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 뒤 실제로 ‘목구멍에 풀칠’하던 배고픈 노동자들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1946년 10월인민항쟁이 일어났던 대구에서 일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귀환동포와 식량문제가 다른 지역보다 더 컸다. 식량난에 따라 식량폭동 일보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청송군 같은 산간지역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나왔다. 대구에서는 전매청 연초공장에서 담배를 말아 붙이는 풀을 직공들이 먹어치우자 붉은 물감을 섞어서 내놓았다. 물감 탄 풀까지도 몰래 먹으며 허기를 달래다 쫓겨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도청의 농산부장은 “장에 고기도 있고 잡곡도 있지 않은가? 굶어죽는다니 별말이다”고 했다고 한다. 10월인민항쟁의 도화선이 된 9월 총파업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울의 철도노동자들이 가족수당과 물가수당 인상, 일급제 반대, 식량배급 증대, 해고 절대반대, 임금인상을 요구하였다. 미군정 운수부장 코넬슨은 "인도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라도 먹으니 행복하다"고 했다. 프랑스혁명 때 마리 앙트와네트가 했다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지”하는 말을 외우고 다니다 내뱉는 듯한 말들이다. 지금이라고 그런 말들이 없을까. 먹고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끊임없이 ‘좋은생각’을 들먹이는 말들도 다를 바가 없다. 

학교도 아닌데 막강한 동문을 형성하고 있는 조중동문같은 ‘일보’들이나 뉴라이트나 이명박 정권처럼 이승만과 박정희 중심으로 현대사를 보는 것은 홍보지 역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담배 풀로 목에 풀칠하던 노동자들, 풀빵으로 허기를 달래던 배고픈 노동자들 자리에서 그들의 눈으로 그 시대를 보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얼마 전 강의를 갔다 오다가 기차에 도수 낮은 안경을 두고 내렸다. 책볼 때 쓰는 안경이었다. 부랴부랴 서울 전농동 네거리 가까이 있는 아는 안경점에 가서 안경을 마련했다. 버스를 타고 오다보니 답십리지하철 네거리 옆에 붕어빵을 파는데 1천원에 6마리 한다고 써 붙였다. 다른 곳에서는 밀가루 값이 뛰었다고 네 마리 하던 붕어빵을 세 마리 준다. 6마리짜리는 얼마나큰지 언제 다시 와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며칠 뒤 대방역 옆에 있는 서울여성프라자에 강의를 갔다. 길옆에 붕어빵 장사가 있다. 여기서도 1천원에 6마리이다. 좀 작기는 작다.  부부가 둘 다 말을 못하는데 열심히 붕어빵과 마른 호떡을 구워 팔고 있다. 3천원어치 18마리를 샀다.

역사를 보는 관점을 이야기할 때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은 붕어빵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그때 사가지고 간 붕어빵을 나눠주고 먹으면서 강의를 했다. 붕어빵은 생긴 모양이 붕어 같고 이름도 붕어빵이지만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붕어가 아니다. 붕어가 들어 있다면 그것은 붕어빵이 아니라 붕어튀김이 맞다. 빵과 튀김은 다르다. 그렇듯이 교수니 박사니 하면서 그럴듯한 폼으로 말과 글을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더라도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무엇이고 누구의 이해를 반영하는지 한 번 더 꼼꼼히 따져보자고 했다. 붕어빵을  먹으면서 보니까 더 실감이 난다고 한다. 

  80이 20에게, 90이 10에게 지배당하는 사회에서 붕어빵이 20과 10을 비춰보는 투시경이 될 수 있을까. 80과 90을 비춰보는 자성의 거울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아파트 옆 당단풍 나무 아래서 붕어빵을 몰래 먹곤 했던 것이 단지 유혹을 못 이겨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별 변명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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