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도시에 갔다가 돌아오면 늘, 안정감을 느낀다 . 익숙해서 그렇기도 하지만깨끗하고 조용한 도시다.  특별한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수원은 오래된 품격을 가진  도시라고 느낄 만하다 .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76 년에는 확실히 조용한 도시였다 . 76 년 무렵엔 20 만이던 인구가 이제는  100만이나 되었고 토박이 보다는 이주해 온 사람들이 더 많은 도시가 되었다 . 하지만 특별히 수원을 떠나고 싶다거나 수원이 사람 못살 데라고 느낀  적은 없다 .




우리 아버지 고향은 개성이다 .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피해 남하해서 수원에 자리잡은 건 ‘10 전투 비행장’ 에 일자리를 잡아서라고 들었다 . 물론 그 당시 일자리가 번듯한 게 있을 리 없고 미군부대 식당  종업원 즉  하우스보이 노릇을 했다고 한다 .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고향에 돌아가기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다시는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7 년 전 돌아가셨다 .  수원 서민병원 병실에서 .  그리고  아주대병원 영안실에서 장례를 치르고 연화장 납골당에서 개성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으시다 .




나는 수원에서 40 년 넘게  살았다 . 대학 다닐 때와 결혼 뒤 잠시 이천에서 산 것을 빼 거의 수원살이를 한 셈이다 .   지금은 화성이 세계 문화유산이라고 여기를 답사하는 사람도 생겼지만 (!) 내가 어렸을 때 화성은 그냥 놀이터였다 . 나는 어린 시절 줄곧 북수동 , 신풍, 장안동에서 살았다 . 최근에 화서동 아파트로 입주를  했지만 돌아가신 어머니 소망대로 성안에서만 산 셈이다 (!) 어머니는 어쩐 일인지 사람은 반드시 성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에 서문 근처 신풍동과 장안동에서 살았을 때는 서문이 우리들 놀이터였다 . 




지금은 옹색하게도 느껴지는 동네지만 그때는 자연 환경이 좋은  놀이터였다 . 그때는 누구나 서문 위에 올라가서 놀곤 했다 .아니면 공심돈에서 누가 목매달아 죽어서 귀신이 나온다고 가슴 두근거리며 들여다 보기도 했다 .  아이들은 서문 누각 위에서 내려오는   계단 난간을  미끄럼처럼 타고  내리는 놀이를 하곤 했다 . 바로 밑에 동생 란이가 세 살 때인가, 하루는   난간을 미끄럼타고 놀던 란이가 미끄럼을 시작하자마자 균형을 잃고 굴러 떨어졌다 . 그런데 서문 근처 바닥은 넓적한 자연석으로 모자이크되어 깔려 있었는데 거기 바로 떨어졌으면 머리가 깨져 죽었을 것이다 . 그런데 당시는  그 근처에  솜틀집이 있었다  .때마침    솜틀집 주인이 서문 누각 계단 아래에  나무 반자(문짝)을 펴놓고 거기에 튼 솜을 펼쳐놓고 말리곤 했다 , 다행히 란은 펴말리던 솜 뭉치위에 떨어졌다 . 그래도 머리 어디에선가 피가 흘렀다 . 나는 놀라서 란을 흔들다가 마침 동네 미용실에서 고데를 하던 어머니를 찾아  뛰어갔다 . 어머니는  “ 엄마! 란이가 서문에서 떨어졌어요!” 하는 비명을 듣자 머리에 고데를 하던  한지 조각을 그대로 붙인 채 내달아왔다 . 어깨에 두른 분홍색 케이프가 황금박쥐  망토처럼 펄럭거렸다 .




어머니는 동생 란을 안고 도립병원까지  울면서 뛰어갔다 .  당시에 도립병원은 지금 행궁자리에  경기 간호전문학교와 함께 있었는데 그 오른쪽엔 경찰서 건물이  있었다 .  어머니가  동생 란을 안고 서문서부터 지금 제일교회자리인 도서관을 거쳐 법원자리였던 선경도서관 앞을 거치고 신풍학교 앞을 거쳐 도립병원까지 뛰어갈 때 나는 동생이 죽을까봐 그리고 그 애가 죽은 다음  동생 제대로 데리고 놀지 못했다고 혼날까봐 가슴 조이던 공포를 기억한다 . 119 구급차가 없었던 건지 거기에 연락할 수단이 없었던 건지 아무튼 인간 구급차 어머니는  피 흘리는 딸을 안고 뛰었다.




그리고 동생은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열 살이 되어보아야 사람이 될지 알 수 있다는 의사 진단처럼 입이 짦고 마른데다 약하고  암기력 부족한 아이로 자랐다 . 하지만 그냥저냥  중학교에 다니고 고등학교는 멀찌감치 영신여고를 다녀서 그때  추락 경험이  아무래도 두뇌활동에  일종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하는 짐작을 하게끔 했다 .  평준화가 되기 전 당시 영신여고는 학업보다는 자유로운 청소년기를 보내는 학생들이 선택하는  학교였다 .병약한 란을  유달리 사랑하던 아버지는 영신학교 덕분에 우리 둘째딸이 ‘고녀’를 졸업했다고 좋아하시곤 했다 . 내 동생이 영신여고 1회 졸업생이었다 .




3 학년 때부터 화홍문 근처 북수동에 살았는데 거기서 화홍문과 북문 , 성벽은 우리들 놀이터였다 . 68 년 무렵에 화홍문에는 깨끗한  물이 흘렀고 68 년에 태어난  막내 동생 기저귀를 화홍문에서 흘러내리는 수원천 물에 빨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 어머니는 양력 12 월에 지금은 없어진 김종훈 산부인과에서 서른아홉 노산으로 아기를 낳았다. 서울서 해산구완을 오신 이모님이 빨래방망이를 꽂고 엄마와 아기 빨래가 든 빨래 함지를 이고 화홍문 아래로 가셨다 . 나는 눈길을 걸어 그 뒤를 따라갔는데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 빨래돌을 찾아 자리 잡고 앉아  어머니  개짐을 물에 헹구니 붉은 핏물이 물에 흩어지며 흘러가던 기억이 선연하다 . 




그때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많은 부녀자들이 빨래함지를 이고 나와 거기서 빨래를  했다 . 여름이면 아이들이 거기서 멱을 감고 장마통엔 화홍문 일곱 수문이 미어지도록 수량이 넘쳤다 . 우리는 그곳을 ‘냇갈둑’ 라고 불렀는데  어느 핸가는 홍수가 나서  냇갈둑 제방이 넘칠까봐  사람들이 모두 나와 서서 구경하던 게 떠 오른다 . 설마 그 냇갈둑이 무너질 거라곤 생각안했다. 그러나   평이한 나날을 보내던 아이들이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내가 다니던 신풍학교 근처가 지금은 상전벽해가 된 것을 본다 .   지금 우체국 맞은 편 자리가 70 년대 당시엔 시외버스 터미널이었다 . 용인에 사는 고모님댁에 가기 위해 거기서 시외버스를 타곤 했는데 그 터미널 화장실 냄새가 지금도 기억난다 .  가뜩이나 비위가 약한 나는 버스에서 내리면 멀미가 나서 곧 토하고 싶은데 화장실에 가면 버스 매연 냄새에 잘 씻겨내려가지 않은 오물 냄새가 아주 복잡한 구성으로 어린 내 속을 복대겼다 . 나는 거기서 실컷 토하고 입가심도 제대로 못한 채 터미널 옆 낚시점과 그 근처 점포들 풍경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 그런데 수원서 오랜 산 친구들도 터미널 얘기를 하면 잘 기억하지 못한다 . 그건 내가 만들어낸 기억일까 싶기도 하지만 우체국 옆 동아약국 이층에 있던 동아치과에 갈 때마다 터미널 냄새를 아주 오래 기억하던 걸 보면 조작된 기억은 아닐 것이다 .




신풍학교가 곧 헐릴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 . 그래서 동창들이 반대를 한다는 둥 남창학교랑 통합을 한다는 둥 바람이 실어온 소문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 어린 시절에 낙남헌을 교무실로 이용하던 일도 있는데 시대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 나와 내 동생들과 내 딸까지 졸업한 신풍학교가 없어지면  좀 서운 할 것이다 . 그처럼  넓어보이던 운동장과 소풍날과 운동회날만 비가 오게 하던 이무기 전설어린  느티나무도  베어버릴 것이다 . 운동장 가에 선 은행나무가 가을이면 아름다운  황금빛 은행잎을 떨구던 기억도 소멸 될 것이다 . 그러나 모든 걸 인력으로 막을 수는 없고 어떻게든  달라질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담에 내 딸에게 혹은 내 딸 자식들에게 들려줄 수원 이야기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




어디를 가더라도 누가 ‘어디 사람’ 이냐고 물으면 나는 ‘수원 사람’ 이라고   대답한다 . 그리고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라고 , 한 번 와 보시라고 한다 . 그리고  누구나 이 도시에 한 번 와보면 참, 조용하고 깨끗하구나 하는 인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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