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6권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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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사산책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5권씩 나뉜다. 제6권은 후반부의 첫 권이다. 저자는 후반의 시작에 재차 서문을 통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독립투쟁’ 중심의 일제강점기 역사교육에 대한 회의, 역사연구자들의 “전문주의의 함정과 학술이기주의”, “특정 연구자들의 전유물로서의 근대사”에 대한 대중화 필요성이 본 시리즈를 편찬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세 가지의 지적은 현대 한국 대중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문제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단(武斷)정치시대’란 1910년 일제강점부터 1919년 3·1운동까지의 10년을 의미한다. 무단에 필요한 것은 법률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1912년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이 공포되었다. 일본의 민법·민사소송법을 비롯한 23개의 각종 민사관계 법령의 조선시행을 규정한 것이다. 당시 일본의 민법이 현대 한국 민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 법을 비교하면 조항의 내용과 순서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p. 32-33)

1912년 7월 메이지 천황이 죽자 각지에 요배소를 설치하여 요배를 강요한다. 1912년 3월 조선총독부 제45호로 나온 ‘경찰범처벌규칙’제 20항은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불온문서, 도서, 시가를 제시, 반포, 낭독하거나 큰 소리로 읊는 자”도 형법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헌병 경찰조직(헌병 2000명, 경찰 5700명)에 의해 한국인의 하찮은 언동도 단속의 대상이 되는데 그 결과 1912년 5만 명 이상, 1918년에는 14만 명 이상이 검거되었다(p.33).

1912년에 12월 30일에는 태형준칙이 제정공포 되었다. 일본에서는 1882년에 폐지된 제도였다. 일제의 태형시행은 조선인에 대한 멸시적 태도와 강점의지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태형이 널리 시행되긴 했지만 처벌의 유형에서 차이가 크다. "신작로 부역관계자"가 가장 많은 태형의 대상자가 되었다는 것은 형벌의 수단보다는 지배의 도구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태형은 1920년 3월 31일 폐지되는데 3·1운동의 덕분이었다. 유럽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를 위해 파견한 관리는 보통 식민지 인구 2-3만명당 1명 이었는데 일제는 조선인 인구 400명당 1명의 일본인 관리를 동원하여 조선인의 일상적 삶을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다(p.38).

 순종의 일본방문을 다루고 있다. 1917년 6월 일본 도쿄에 방문하여 신하로서 대정천황을 배알하고 명치 천황의 능에도 참배했다. 우리 민족사상 미증유의 치욕적인 대사건 있었다는 평가를 소개했다(p. 65-66). 이 사건이 근대사에서 언급되는 않는 경향에 대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잊고 반대의 경우만 떠올리는 ‘선택적 지각’이라는 정서구조를 통해 설명한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임시정부 지원에 대한 내용은 조선독립운동사에 극히 소극적으로 소개되는 경향이 있다. 현재 진행중인 이념적 문제와 관려되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본서에서는 이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가 상해 임정에 200루블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그에 따라 공산주의권 우호반응이 형성되어 한반도 혁명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 운전면허는 1915년 7월에 시행되었다. 자동차취체(取締)규칙에 ‘운전을 하려는 자는 본적 주소 성명 등이 기대된 서류를 거주지 관할 경부부장(현재의 지방경찰청장)에게 내야한다’는 규정을 신설했다. 당시 자동차 운전수 감찰 이라는 운전허가 명패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자동차학원인 운전자 양성소에 합격증을 받아야 했다(p. 122).

  음주운전은 1915년부터 금지 되었다. 1934년 제정된 자동차 취체(取締)에는 ‘운전자가 주기를 띤 채 운전할 경우 50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거나 구류에 처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그러나 혈중 알콜농도 측정이 도입된 1962년까지 음주운전 여부는 순전히 단속 경찰관의 재량이었다(p. 123).

  본 권의 핵심은 고종사망에 이어 발생한 ‘3·1운동’이다. 저자는 한국 역사상 벌어진 주요 시위 계기에는 누군가의 죽음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한국인의 독특한 죽음의 미학 또는 억울한 죽음을 헛되게 할 수 없다는 분노와 정의감의 표현이었다고 부연한다.

  3·1운동에 관한 일천했던 상식에 무안함을 느꼈다. 한 두 차례 이벤트가 아니었다. 1500회 이상 전개되었고 7천명 이상이 사망한 전국적 독립요구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대강의 경향은 각 지방 장날에 시위가 있었고 한 장소에서 5일 10일 간격으로 거듭 일어났으며 그 방식이 지극히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p. 167)

  유관순 열사가 사형에 의한 순국이었다는 오해를 벗게 되었다.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중 형 집행 1년 반만의 고문에 의한 순직이었다. 최근 서울문화재단에서 발간한 서울관광 책자에 '유관순 우물터‘가 소개되어 있는 것을 읽었는데 기회를 만들어 방문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의 유래는 매우 강한 이미지를 주었다. 단체명은 '의로운 일을 맹렬하게 추진'한다는 의미에서 정해졌던 것이다. 부산 경찰서장 폭탄 사살 사례는 단체 성격을 특징해 준다.

  청산리 전투는 한국 군사학에서 대표적인 승전사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이면에 ‘갑신참변’의 피해를 구체적으로 알고나니 자랑스럽기만하던 전사가 책망스럽기까지하다. 청산리에서 사살한 일본군보다 갑신참변의 민간이 피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선택적 지각으로서의 근대사 대목이었는지 모른다.

  강점기에 지방자치선거가 실시되었다는 점이 생소하다. 선거의 양상이 금권선거였는데 광복 후에도 그의 부작용이 영향이 미쳤던 것으로 추측된다. 서중석 교수님의 ‘대한민국 선거이야기’에서 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던 대목이었다.

  3·1 운동은 본격적으로 조직적인 독립활동을 촉발하였다. 그런데 독립운동 세력이 극심한 분열이 심각했다. 분열의 원인 중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자금지원이 있었다. 김구에 의한 김립의 사살도 그와 관련된 사건이었다. ‘동족테러(p. 292)’였는데 제5권의 붕당에 대한 논의와 관련된듯하여 아타까웠다.

 문화통치로의 전환은 3·1운동의 결과였다. 1919년 8월 12일 부임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만이 유일한 해군대장이었고 그 외는 육군총독이었다.

 사이토는 9월 10일 헌병경찰제를 폐지, 조신인의 관리 임용 및 대우개선, 언론 출판의 고려, 지방자치 시행을 위한 조사 착수, 조선 문화 관습 존중 등을 시정방침으로 밝힌다(p.210)

그런데 실제로는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소수에게만 문화통치를 적용하였다. 인구 절대 다수인 농민에게는 계속 가혹한 착취를 일삼았다.

 1920년과 1921년 각각 2500명씩 5000명 늘리는 등 일본군을 대폭 증강시켰으며 경찰 숫자도 종래의 6000명에서 2만 명으로 경찰관 주재소 역시 종래의 730개소에서 2700개로 늘렸다. 경찰관서에는 특별고등부라는 비밀경찰부를 설치하고 경찰무장을 강화했다. 

 백정계급의 형평운동은 한국 인권운동사에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 대표자이신 강상호선생의 운동은 어떠한 독립운동에 보다 고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40만이나 되었던 백정에 대한 차별은 마치 미국의 인종차별 보다 더욱 심각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직업적 천시가 인권의 멸시로 직결되었던 수백년 누적된 비합리가 흑인차별보다 심각한 것이라기에 충분하다. 합리적 사회는 차별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하는 태도가 발달된 사회일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살펴볼 일들이 산재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방정환의 어린이날 선포는 세계 최초의 사례였다는 점과 손병희의 사위로 천도교 였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오자>

p. 57 아래서 위로 7째 줄 (안기→인기)

p.162 사진설명 (시위횟수만 1500명→ 1500회)

p.295 위에서 아래로 4째 줄 (국민대표주비위 → 준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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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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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교수님 특유의 통렬한 지적들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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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5권 - 개화기편,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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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권은 대한제국의 공식적인 멸망시점을 다루고 있다. 감정이입은 문학작품에서나 경험하는 센티멘탈이라 여겨왔다. 한국 역사는 나의 과거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익숙한 전개였음에도 초조하고 안타까운 심경을 경험했다. 저자의 탁월한 서술방식이 만든 드라마틱한 효과일 수도 있겠다. 

  망국의 상황에서 불의의 타협과 묵시적 용인에 대하여 간략하게 검토한다. 묵인이 타협보다는 정당한 행위로 평가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구체적 행위가 없어 최소한 작위에 대한 비난은 면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묵인은 타협에는 없는 여죄가 추가될 수 있다. 비겁이라는 파렴치다.  결국 정의롭지 못한 행위의 총량으로서 묵인과 타협은 별 다를게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묵인으로 대응하는 태도에 대하여 중도라는 자기위안이 습성화 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을사조약에 따른 의병활동 등의 파장에 비해 경술국치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미약했다. 김용옥 교수는 <논술과 철학강의, 통나무>에서 경술국치 자체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이 낮았고 본격적으로 깨닫게 된 시점을 고종황제의 사망무렵이라고 주장했다. 책은 그에 대한 근본적 원인들을 지적하고 있다. 언론의 통제와 민중통제 그리고 의병의 압살 때문이었다.  

   
  일제가 1909년 반포한 범죄즉결령은 경범죄의 경우 재판절차 없이 경찰이 직접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1905년 무렵 일본 도교에서는 순사 1명이 600명을 담당하는데 비해 서울에서는 순검 1명당 129명을 맡을 정도로 엄격한 통제정치가 실시되었다(p.70).  
   

일제가 경성감옥을 증축한 것은 구체적 억압의 준비였다.  조선시대에는 교도소가 활성화 되어 있지 않았다. 많은 형벌이 유배와 태형으로 집행되었다.   

  헌병보조원은 조선시대에 누진된 계층적 갈등의 본격적인 폭발이라 할 수 있다.  

   
 

1908년 6월엔 한국인 헌병보조원 4200여명을 모집해 1908년 9월까지 헌병 1명에 2-3명씩 배치했다. 한국인 헌병보조원은 각지의 악소배들로 몇 푼 안되는 돈을 받고 양민을 무고히 죽이고 숙원을 갚았으며 동리를 겁탈하여 사복을 채웠다(p.84-85). 

  강점기 시대 관리의 60퍼센트가 조선인 이었는데 대부분 말단이었다. 순사보 또는 헌병보조원은 거의 조선인이었다(p.218).

 
   

 본권의 핵심 질문과 응답은 조선 망국 책임론으로 요약된다.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붕당의 유전자가 폐국의 직접원인이 되었다는 종류의 주장에 대해 이기백 선생님의 역사와 민족성의 시간순서에 대한 견해가 소개되어 있다. 역사의 결과물이 민족성인 것일 뿐, 민족성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고견이다.   

  망국의 시점을 고찰하면 오늘에도 재현되는 문제점이 발견된다. 저자가 지적한 외국 유학, 학연지연의 치졸한 가족적 신뢰현상 등이 그렇다. 이러한 부정적 현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한국사회의 발전은 한계를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 망국과 망국당시의 상황에 대해 와신상담하는 자세가 국가저변에 확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결코 진부할 수 없는 교훈이다. 저자가 지적한 한국인의 특질이 새삼 다가온다. 단기적으로는 극단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중용지향적이라는 지적은 결코 낮은 강도의 비난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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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은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이시 히로유키 외 지음, 이하준 옮김 / 경당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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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연구에 과학의 활용이 증대되고 있다. 문헌 중심의 고증학적 접근으로 인류과거의  구체적 발견이 요원해 진듯하다. 과학과 역사의식 이 둘간의 결합이 끌어내는 지난세월의 정보량이 엄청나다. 시대를 밝히려는 노력은 알래스카의 빙하, 스웨덴 호수바닥, 지질과 지층, 시베리아 동토를 가리지 않는다. 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은 꽃가루 흔적에 비해 오차가 크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종교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 중 질병관련 사항에 시선이 갔다. 부엉이와 늑대를 악마로 여기고 살육했던 종교적 편견이 페스트 창궐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생태계의 먹이사슬의 붕괴가 중세에도 있었던 것이다. 

책은 과거 인류가 환경과의 고난한 갈등을 근거로 오늘날 환경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과거의 여러 혁명은 욕망을 채우는 것이었지만 환경 혁명은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현대의 환경사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 유역의 염해 발생을 문명의 자살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오는날 원전의 무차별 건설과 무책임한 관리야 말로 전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자폭으로 해석할 수 있다. 후쿠시마에서 다시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재앙에 대한 실천적이고 시급한 대비책이 마련되길 바랜다. 책에서는 인류의 유머니티 회복을 권하고 있다. 직접성이 결여된 대안제시인듯 하나 실상 매우 중요한 부분인 듯 하다. 원전의 폐쇄를 위해 결국 개인들의 환경혁명 정신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별 둘을 주었다. 환경의 역사에 관한 일본 학자 3명의 대담을 책자화 했다. 대화체의 글이  난삽하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사례 소개가 빈번한 것 역시 불편한 느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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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법의 이해
김호.강은애 지음 / 에세이퍼블리싱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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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내지는 심리학 연구에서 중요한 종속변수로 선정되는 개념 중에 '몰입'이라는 것이 있다. 몰입이란 조직 구성원이 인식하는 해당 조직과의 심리적 동일성 정도로 조작해 볼 수 있다.  몰입이 높을 수록 조직에 대한 애정이 높다는 상관적 체계로 이해하여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몰입이 증대되어 조직에 대한 충성태도가 강화되었다면 바람직한 구성원의 자질을 갖춘것으로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몰입에 대한 긍정적 결과만 예상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신의 몰입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태가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분한 검토가 미흡한 상황에서 몰입의 정서에 근거하여 개인의 조직애를 설파하려는 태도는 주의가 요망된다.      

  군에서 헌병의 역할은 결코 미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군에서 중요하지 않은 병과는 없다. 헌병우월주의 같은 몰입은 군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소책자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매우 기본적인 측면에서다. 책의 제목과는 달리 오로지 헌병의 현안 과제들에 대한 병과 중심적 설득의 의도가 상당 분량을 담고있다는 점이다. 제목을 통해 호기심이 자극되어 구입한 독자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피할수 없을 것 같다. 

첵의 개정을 염두하고 있다면 '육군 헌병의 현안과제와 발전제언' 정도로 정정해 보길 권한다. 지금 책 제목이 지나친 포장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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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1-30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5년도에 부족한 부분 보완 후 재개정을 생각하고 있는데, 제목을 논평 주신사항 적극 수렴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