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5권 - 개화기편,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5권은 대한제국의 공식적인 멸망시점을 다루고 있다. 감정이입은 문학작품에서나 경험하는 센티멘탈이라 여겨왔다. 한국 역사는 나의 과거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익숙한 전개였음에도 초조하고 안타까운 심경을 경험했다. 저자의 탁월한 서술방식이 만든 드라마틱한 효과일 수도 있겠다. 

  망국의 상황에서 불의의 타협과 묵시적 용인에 대하여 간략하게 검토한다. 묵인이 타협보다는 정당한 행위로 평가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구체적 행위가 없어 최소한 작위에 대한 비난은 면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묵인은 타협에는 없는 여죄가 추가될 수 있다. 비겁이라는 파렴치다.  결국 정의롭지 못한 행위의 총량으로서 묵인과 타협은 별 다를게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묵인으로 대응하는 태도에 대하여 중도라는 자기위안이 습성화 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을사조약에 따른 의병활동 등의 파장에 비해 경술국치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미약했다. 김용옥 교수는 <논술과 철학강의, 통나무>에서 경술국치 자체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이 낮았고 본격적으로 깨닫게 된 시점을 고종황제의 사망무렵이라고 주장했다. 책은 그에 대한 근본적 원인들을 지적하고 있다. 언론의 통제와 민중통제 그리고 의병의 압살 때문이었다.  

   
  일제가 1909년 반포한 범죄즉결령은 경범죄의 경우 재판절차 없이 경찰이 직접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1905년 무렵 일본 도교에서는 순사 1명이 600명을 담당하는데 비해 서울에서는 순검 1명당 129명을 맡을 정도로 엄격한 통제정치가 실시되었다(p.70).  
   

일제가 경성감옥을 증축한 것은 구체적 억압의 준비였다.  조선시대에는 교도소가 활성화 되어 있지 않았다. 많은 형벌이 유배와 태형으로 집행되었다.   

  헌병보조원은 조선시대에 누진된 계층적 갈등의 본격적인 폭발이라 할 수 있다.  

   
 

1908년 6월엔 한국인 헌병보조원 4200여명을 모집해 1908년 9월까지 헌병 1명에 2-3명씩 배치했다. 한국인 헌병보조원은 각지의 악소배들로 몇 푼 안되는 돈을 받고 양민을 무고히 죽이고 숙원을 갚았으며 동리를 겁탈하여 사복을 채웠다(p.84-85). 

  강점기 시대 관리의 60퍼센트가 조선인 이었는데 대부분 말단이었다. 순사보 또는 헌병보조원은 거의 조선인이었다(p.218).

 
   

 본권의 핵심 질문과 응답은 조선 망국 책임론으로 요약된다.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붕당의 유전자가 폐국의 직접원인이 되었다는 종류의 주장에 대해 이기백 선생님의 역사와 민족성의 시간순서에 대한 견해가 소개되어 있다. 역사의 결과물이 민족성인 것일 뿐, 민족성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고견이다.   

  망국의 시점을 고찰하면 오늘에도 재현되는 문제점이 발견된다. 저자가 지적한 외국 유학, 학연지연의 치졸한 가족적 신뢰현상 등이 그렇다. 이러한 부정적 현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한국사회의 발전은 한계를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 망국과 망국당시의 상황에 대해 와신상담하는 자세가 국가저변에 확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결코 진부할 수 없는 교훈이다. 저자가 지적한 한국인의 특질이 새삼 다가온다. 단기적으로는 극단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중용지향적이라는 지적은 결코 낮은 강도의 비난이라 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