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9권 -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특별한 ‘개인’에만 관심을 두는 태도를 인물주의라 한다. 인물주의는 오로지 해당 인물에만 관심을 갖는다. 시선을 확대한다고 해도 가족 등 그 주변 정도가 고작이다. 인물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인물주의는 엘리티즘 확산과 물질적 평가의 만연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인물주의를 대체할 만한 테제가 마땅치 않음을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사회라는 유기체를 훼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지어 비교적 최근에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소셜 네트워크’는 반가운 담론이라 하겠다. 상호 의존적이며 연동적인 무형의 연계구도를 가시적인 형태로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 시도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 독자적 존재의 나약함을 의식하게 된다. 인간과 사회와의 채무관계를 확인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개인은 사회적 ‘부채’와 ‘성공’ 사이에  필연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른바 '인물'들일수록 사회에 갚아야할 빚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가, 민족, 사회제도 모두가 개인에게 채무인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구조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존재할 수 없다. 
 

  개인의 탁월성은 사회관계를 통해서 만이 비로소 가치로움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출세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은 이러한 관계에 대해 하찮거나 편협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성공 원인을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고 여기는듯하다. 사회에 빚을 갖기는커녕 자신의 공로를 치하하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새삼 겸손이 미덕이라는 가르침이 새롭다. 개인 특히 성공한 개인은 사회적 채무를 상기하는 것이 겸손의 시작이지 싶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채무의 기산점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 전체 역사는 오늘을 사는 한국인과 다층적 수준에서 관련되어 있다 . 그러나 유독 식민지 조선을 그 역사에 포함시킬때는 한가지 측면으로만 경도하는 경향이 있다. 독립운동과 항일투쟁만으로 특징지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관심밖의 세월으로 치부된다. 그런데 이것은 인물주의의 폐단과 연계된 부정적 역사관의 소치일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요구된다. 일제 강점기하에 조선인들의 삶은 당시에도, 그 후에도 고단했다. 강점기에 짓눌렸고 해방후에는 ‘점령군 미군’과 ‘이념대립’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고통 받았다. 그러한 인고의 시간이 현대 한국의 지반이 되어준 것이다. 
  강점기 35년 인고의 세월이 한국사회에 기여한 바에 대해서는 가능한 광범위하게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당시를 살다간 모든 개개인이 소셜네트워크의 주체가 되었기에 험난한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를 이해하는 역사적 지식과 안목이 있어야 한다. 
 

  치욕적 역사라는 불편함으로 식민지 조선시기를 제외시키려는 것은 성공한 인물들의 안하무인적 행태와 유사한 심리라 할 수 있겠다. 2011년 한국은 식민지 조선에 큰 빚을 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채무를 이행할 것들을 발굴하고 지속적으로 변재해 나가야 한다. 

  일본 우익인사들의 독도방문 시도를 접했다. 심사가 불편해 진다. 그런데 이러한 끊임없는 일본의 만행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도 어쩌면 식민지 조선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식민지 조선, 임정, 광복군 등을 망라하여 강점기를 이겨낸 민족적 대안을 톺아보기를 바래본다.

<오자>
p.156 위에서 다섯째줄 “포기하게 만다는”----> 만드는
p. 242 마지막 줄 “핵심코드 였다”묘 ----> “핵심코드 였다”며
p. 328 아래서 11줄 “국제아편회의 이해”------> 국제 아편회의에 의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8-07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Rousseau 2011-08-0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한국 근대사 산책 8권 -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공황의 여파는 세계적이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 문제제기는 이념적 대안의 탐색으로 연계되었다. 당시 조선은 외국자본과의 시장 연동성이 미약했다. ‘대공황’이 조선에 미친 직접적 영향은 공산화의 명분제공 측면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소련 숭배적 콤플렉스를 취하였다는(p. 26)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적 사회주의가 태동할 수 있는 중대한 기회를 상실했다는 평가가 가능하겠다.

  일제의 음모로 인하여 조선과 중국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중국 전통 외교전략이라 할 수 있는 이이제이를 일본이 차용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에 ‘만보산 사건’이 이용되었다. 사변이란 정부의 전쟁 결정 절차를 기다리지 않고 군부의 일부 부대가 무력충돌을 일으키는 변고를 일컫는 말이다(p. 40). 만보산 사건 때 “호떡집에 불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p. 36)는 주장도 다루고 있다. 1932년 중국공산단의 민생단 사건(p. 72)도 외교적 갈등이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는 1932년 3월 1일 중국 동북 3성에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은 뒷날 남북한의 권력을 잉태시킨 공간”(p.49)이다. 박정희는 1942년 3월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하면서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금시계 은사품을 받기도 했다(p.51).
 

  김구선생이 기획하고 한국애국단원 이봉창과 윤봉길이 실행한 폭탄의거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공존하고 있다. 국사 교과서 중심 근대사에서는 대표적 항일독립 활동으로만 찬양하여 다뤄지는 애국활동일 뿐이었다. 의사의 행적에 회의적인 견해의 핵심은 “극소수의 폭력에 의한 운동은 필히 패배(p. 66)”하게 된다는 숙명론과 폭력에 대한 보복의 악순환이라 점에 있다.

  윤봉길 의사 의거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하이에 살고 있던 조선 민족 운동가에 대한 일제의 보복을 야기했다. 탄압을 피해 임시정부도 이전하게 된다(p.64).

  일제강점기하 ‘투기’에 대해 소개한 내용이 무척 생소했다. 나진 옹진 부근 땅값이 한달 만에 1000배가 오른 사례는 한국의 토지거래 역사에 남을 만한 폭등이었지 싶다. 금에 대하여도 놀랍다. 1939년에는 31톤(p.82)을 생산하였다는 것이다. 21세기 국제 금가격 앙등에 맞춰 채취했다면 국부증진에 긴요했을 것이다.

  단재의 명성을 신뢰하고 ‘조선상고사’를 구매한 적이 있다. 고대사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후 단재는 역사연구이며 민족주의의 성향일 것이라 짐작해온 듯 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나키스트였다. 10년 형을 받고 영어 8년째 되는 해 1936년 57세로 별세했다. 다른 책들에서 신채호가 조선 최고의 천재였으며 도덕주의자로 묘사되고 있으나 그에 대한 부연은 다루지 않는다. 다만 신채호가 구속된 이유는 운동자금 타개를 위한 외국환 위조혐의 였다는 것은 본권에서 알게 되었다. 막연히 필화정도의 독립운동에 연루되었던 것으로 추글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어시간에 배운 현대문학 단편의 대다수는 당대 신문 연재소설이었다. 신문의 특성상 독자를 고려한 통속성을 담고 있게 되었다. 순수 문학 작품이 아니었다는 점은 현대문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평가에서 “예술을 위한 친일”이라는 점에서 일반 친일보다는 너그러운 경향이 있는 듯 하다. 그런나 친일이라는 결과 행위에 주목하여 해석하는 것이 옳은 태도일 것이다.

  1930년대 문맹률이 77퍼센트 였다. 이런 사정이 동아일보 브나로드 운동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교과서에 없는 내용이다. 브나로드는 러시아어로 ‘민중속으로’라는 의미이다. 당시에는 러시아의 사용이 빈번했던 것 같다. 트로이카, 볼쉐비키 등속의 단어들도 러시아어였다. 

  일제강점기하에 도입된 제도 중 상당수는 현재도 기원적 가치를 갖고 있다. 농협 역시 일제의 노동조합에서 비롯되었다. 일제의 주택영단은 대한주택공사로 조직적 생명을 지속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하에 신도를 정교로 채택하려는 시도는 성과가 없었다. 현재는 그 흔적도 없다. 한국의 종교다양성을 고려하여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올림픽 마라톤 쾌거와 그에 대한 국민적 열광은 상징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스포츠와 국민의 심리적 연합의 시초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월드컵 열풍 등이 현대사회의 특성으로 단정짓은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1등만 기억하는 전통도 오래된 일이듯 하다. 남승룡도 기억해 주는 배려가 요구된다. 역사공부는 겸손함을 갖도록 유도하는 기능이 있다.

  손기정 일장기 삭제 사건의 전말이 동아일보 일개 직원의 판단에 의하였다는 점은 그간 동아일보 애국사건 개요와는 거리가 있었다.

  김성수 김연수 형제의 중일전쟁 호재와 거부 축적에 대해 최소한 조선 자본주의 선각자라는 미화된 표현 만큼은 자제되어야 할 것 같다.

 황국신민화의 핵심배경은 병역징집시 전장에 충성을 확보(p.284)하기 위한 세뇌활동 이었다. 징집 시 체력검사 과목들(p. 290)은 오늘날 군에서 측정하는 체력측정 종목과 이상할 만큼 유사하다. 일제의 징병제가 하층민에게 신분상승 ‘사다리’가 되었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징집을 강제징용과 동일한 개념으로만 보는 것에 주의가 요망된다는 것이다. 일제 징집의 경력은 자의적 출병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1937년에는 전 민족 저항 이미지와 전 민족 협력이미지가 공존하였다(p.299). 식민사관은 강점 초기부터 준비된 일이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경찰을 동원하여 전국 도서를 색출하여 역사서 51종 20여만권을 태웠고 일본 중국 자료도 폐기하였다.

일제의 식민사관은 4가지로 요약된다(p.304) 첫째, 조선의 타율적 습성 둘째, 근대사회로의 이행의 정체, 셋째, 정쟁본성이라는 당파성, 넷째, 시조가 같다는 일선동조론 이다. 식민사관의 핵심주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강력하게 주입되게 되었다. 이병도 같은 괴뢰역사가의 악행은 특별히 단죄되어야 할 것이다.

당대를 살아가는 양심 있는 행위를 규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부작위도 친일이라고 하는 주장까지는 주의가 요망된다. 그러나 간혹 이런 뉘앙스가 담긴 주장이 발견된다. 세상을 역사적 판단까지 고려해서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라 하겠다.

1930년대 한국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1938년 여름부터는 경찰이 교회마다 천황과 하느님 중 더 높은 이를 선택하라는 설문(p. 338)을 받았다. 물론 천황이 높다는 응답이 대다수 였다. 교회 철수를 막기위한 위기대책이었을 것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역자를 제명한 장로회의 정책은 강제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중 주기철목사의 신사참배 거부와 옥중 고문에 의한 순교는 한국 기독교의 자존심이라 하겠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주기철 목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심적 개신교인이 전혀 없었다면 조상제사 금지를 설파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윤치호는 1932년 4월 17일 일기에서 “당파성이 조선을 움직이는 기본요소라면 전쟁은 일본을 움직이는 기본요소(p. 20)”라고 했다. 일본의 광기어린 전쟁으로 다음권이 이어질 것이다.

오자정정

p.159 아래에서 위로 셋째 줄

"면서기가 순사를 ----> 면서기나 순사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제 강점기 근대사의 포커스는 단연 독립운동사에 맞춰져 있다. 필자의 의식세계에서 1920년는 6.10 만세운동, '의거', 임시정부활동 정도로만 정리된 시대였다. 그런데 본 권에서 소개하는 당시의 단상은 그 외에도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였던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미 알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이해의 계기가 되었다.  근대사에 대한 체계적 고찰이라는 독서목적에 부합하는 시리즈다. 

  단재께서 의열단의 행동강령 및 투쟁목표로 써주었다는 '조선혁명선언'에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 폭력 파괴의 길로 매진(p. 24)"이라는 문구들에 단호한 독립정신이 느껴진다. 다만 열악한 여건으로 인해 의열단의 성과가 당시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전략수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혹시 의열단의 '불발폭탄'이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면 최초 조직성격을 유지했을 수도 있을것 같다. 김익상 의사가 일본 육군대장에게 던진 폭탄, 김지섭 의사가 일왕궁성에서 투척한 폭탄 3발,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사용한 폭탄 등은 불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조명하 의사는 천황장인 암살에 단도를 사용하였다.  물론 김상옥 의사의 종로서에서 사용한 폭탄, 장진홍 의사의 상자폭탄과 같이 정상제품도 있었다. 의열단 와해의 원인으로 희생대비 성과의 미흡으로 인한 사기저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독립운동 조직의 이념에 의한 좌우분열과 갈등이 언급된다. 의열단원에 의한 박용만 암살은 비극적 사건이었다.  

  친일파의 자치운동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처음 접하는 내용이었다. 자치의 성격이 일본의 일부라는 대전제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재차 매국하는 장면으로 이해해도 될듯하다. 

  당시 사회주의와 친일의 이분양상에 대해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에 대응한다. '아틀라스 일본사(서울:  , 2011)'는 이러한 조치가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시행되었음이 어급하고 있다. 친미적 정치상황하에 일본은 사회주의를 극도록 배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순조사망은 6.10만세 운동을 추동했다. 운동은 좌파계열의 공헌도가 높았다고 하는데 이런한 점에 대하여는 이념을 넘은 수용적 역사관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1920년대 감옥과밀화로 인해 사면제도가 시행되었고 이것이 현대의 사면제도의 시초가 되었다(p.148). 과밀이 상당히 심각했던 것 같다. 감옥환경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은 없다. 다만 현재 한국은 교육형 행형을 지향하고 있다. 교정시설에서 교도교화를 통해 재사회화를 유도하는 것을 이념으로 한다. 과밀수용으로는 교화프로그램의 성공을 이룰 수 없다. 당시 일제가 이러한 것까지 고려했을리는 만무하다.  

  이광수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번역했다는 것이 의아하다. 히틀러를 추종했다면 민족적인 측면에서 더 많은 역할시도가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에 대한 자문이다. 

  1920년대 문화활동은 기존의 지식을 크게 초월한다. 방송, 언론, 문학, 영화, 스포츠, 전화, 자동차, 다방문화, 화장품, 패션유행, 라디오, 유성기, 헤어스타일, 연애편지 등이 당시부터 본격화 되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은 세계에서 6번째(p. 205)였다.  

  박노자의 지적(p. 213)대로 폭력행위로 인한 독립운동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겠지만 그러한 판단을 평온한 상태에서 하는 것과 위기상황에 처해하는 것은 다를 것이다.  

  1925년 자살자가 1500명 정도로 한강인도교와 철길 등이 이용되었다. '진달래꽃' 김소월, '사의 찬미' 윤심덕, 김우진도 자살했다. 의열단원들도 의거 중에 자살을 한다. 1920년대 기존보다 다양한 콘텐츠를 발견하여 반가웠지만 본질적으로 살기 어려웠던 시기였던 것은 틀림없다. 

 <오타>  56쪽 그림 "삽일전 ---> 십일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범죄에 관한 10가지 신화 한울아카데미 537
해럴드 페핀스키 지음, 이태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범죄에 대한 기존의 상식이 비상식이라는 자각을 발동시키는 레디컬한 범죄학서이다. 

  저자들은 "법집행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이며 권력자들에게 유리하도록 편향(p.133)"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낙인으로 순환되는 구조가 형사사법의 궤도라고 주장한다. 범죄학자 래트너가 전과기록에 누적된 사람들은 무죄더라도 유죄판결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p. 138)한 사례 등이 저자 주장의 뒷받침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  

  억압적 형사사법체계는 대중의 잔인성을 유발한다(p. 200)는 심각한 단점을 갖는다. 파괴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에너지를 건설적으로 배출 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노력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상응한 처벌의 문제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처벌의 엄격성, 신속성, 확실성의 균등한 강조가 불가하다는 저자들의 가설에 수긍이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도권내에 잉여인력의 확대 필요성의 주장은 지당한 주장인듯하다.

  이와 같은 형사사법 시스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가해자 피해자 화해프로그램을 제안하고 비범죄화의 영역확대를 제안하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가 부정적일 수 있는 법원판결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높은 가능성을 부여하고 싶다.  또한 사회적으로 일거리를 확충하려는 노력이 병행되는 것이 효율적인 범죄예방 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는 점도 착안할 필요가 있다.  

  범죄에 관한 대부분의 정책이 신화에 근거한다(p.220)는 주장을 외면할 수 만은 없는 상황임은 자명한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근대사산책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5권씩 나뉜다. 제6권은 후반부의 첫 권이다. 저자는 후반의 시작에 재차 서문을 통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독립투쟁’ 중심의 일제강점기 역사교육에 대한 회의, 역사연구자들의 “전문주의의 함정과 학술이기주의”, “특정 연구자들의 전유물로서의 근대사”에 대한 대중화 필요성이 본 시리즈를 편찬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세 가지의 지적은 현대 한국 대중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문제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단(武斷)정치시대’란 1910년 일제강점부터 1919년 3·1운동까지의 10년을 의미한다. 무단에 필요한 것은 법률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1912년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이 공포되었다. 일본의 민법·민사소송법을 비롯한 23개의 각종 민사관계 법령의 조선시행을 규정한 것이다. 당시 일본의 민법이 현대 한국 민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 법을 비교하면 조항의 내용과 순서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p. 32-33)

1912년 7월 메이지 천황이 죽자 각지에 요배소를 설치하여 요배를 강요한다. 1912년 3월 조선총독부 제45호로 나온 ‘경찰범처벌규칙’제 20항은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불온문서, 도서, 시가를 제시, 반포, 낭독하거나 큰 소리로 읊는 자”도 형법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헌병 경찰조직(헌병 2000명, 경찰 5700명)에 의해 한국인의 하찮은 언동도 단속의 대상이 되는데 그 결과 1912년 5만 명 이상, 1918년에는 14만 명 이상이 검거되었다(p.33).

1912년에 12월 30일에는 태형준칙이 제정공포 되었다. 일본에서는 1882년에 폐지된 제도였다. 일제의 태형시행은 조선인에 대한 멸시적 태도와 강점의지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태형이 널리 시행되긴 했지만 처벌의 유형에서 차이가 크다. "신작로 부역관계자"가 가장 많은 태형의 대상자가 되었다는 것은 형벌의 수단보다는 지배의 도구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태형은 1920년 3월 31일 폐지되는데 3·1운동의 덕분이었다. 유럽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를 위해 파견한 관리는 보통 식민지 인구 2-3만명당 1명 이었는데 일제는 조선인 인구 400명당 1명의 일본인 관리를 동원하여 조선인의 일상적 삶을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다(p.38).

 순종의 일본방문을 다루고 있다. 1917년 6월 일본 도쿄에 방문하여 신하로서 대정천황을 배알하고 명치 천황의 능에도 참배했다. 우리 민족사상 미증유의 치욕적인 대사건 있었다는 평가를 소개했다(p. 65-66). 이 사건이 근대사에서 언급되는 않는 경향에 대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잊고 반대의 경우만 떠올리는 ‘선택적 지각’이라는 정서구조를 통해 설명한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임시정부 지원에 대한 내용은 조선독립운동사에 극히 소극적으로 소개되는 경향이 있다. 현재 진행중인 이념적 문제와 관려되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본서에서는 이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가 상해 임정에 200루블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그에 따라 공산주의권 우호반응이 형성되어 한반도 혁명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 운전면허는 1915년 7월에 시행되었다. 자동차취체(取締)규칙에 ‘운전을 하려는 자는 본적 주소 성명 등이 기대된 서류를 거주지 관할 경부부장(현재의 지방경찰청장)에게 내야한다’는 규정을 신설했다. 당시 자동차 운전수 감찰 이라는 운전허가 명패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자동차학원인 운전자 양성소에 합격증을 받아야 했다(p. 122).

  음주운전은 1915년부터 금지 되었다. 1934년 제정된 자동차 취체(取締)에는 ‘운전자가 주기를 띤 채 운전할 경우 50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거나 구류에 처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그러나 혈중 알콜농도 측정이 도입된 1962년까지 음주운전 여부는 순전히 단속 경찰관의 재량이었다(p. 123).

  본 권의 핵심은 고종사망에 이어 발생한 ‘3·1운동’이다. 저자는 한국 역사상 벌어진 주요 시위 계기에는 누군가의 죽음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한국인의 독특한 죽음의 미학 또는 억울한 죽음을 헛되게 할 수 없다는 분노와 정의감의 표현이었다고 부연한다.

  3·1운동에 관한 일천했던 상식에 무안함을 느꼈다. 한 두 차례 이벤트가 아니었다. 1500회 이상 전개되었고 7천명 이상이 사망한 전국적 독립요구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대강의 경향은 각 지방 장날에 시위가 있었고 한 장소에서 5일 10일 간격으로 거듭 일어났으며 그 방식이 지극히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p. 167)

  유관순 열사가 사형에 의한 순국이었다는 오해를 벗게 되었다.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중 형 집행 1년 반만의 고문에 의한 순직이었다. 최근 서울문화재단에서 발간한 서울관광 책자에 '유관순 우물터‘가 소개되어 있는 것을 읽었는데 기회를 만들어 방문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의 유래는 매우 강한 이미지를 주었다. 단체명은 '의로운 일을 맹렬하게 추진'한다는 의미에서 정해졌던 것이다. 부산 경찰서장 폭탄 사살 사례는 단체 성격을 특징해 준다.

  청산리 전투는 한국 군사학에서 대표적인 승전사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이면에 ‘갑신참변’의 피해를 구체적으로 알고나니 자랑스럽기만하던 전사가 책망스럽기까지하다. 청산리에서 사살한 일본군보다 갑신참변의 민간이 피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선택적 지각으로서의 근대사 대목이었는지 모른다.

  강점기에 지방자치선거가 실시되었다는 점이 생소하다. 선거의 양상이 금권선거였는데 광복 후에도 그의 부작용이 영향이 미쳤던 것으로 추측된다. 서중석 교수님의 ‘대한민국 선거이야기’에서 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던 대목이었다.

  3·1 운동은 본격적으로 조직적인 독립활동을 촉발하였다. 그런데 독립운동 세력이 극심한 분열이 심각했다. 분열의 원인 중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자금지원이 있었다. 김구에 의한 김립의 사살도 그와 관련된 사건이었다. ‘동족테러(p. 292)’였는데 제5권의 붕당에 대한 논의와 관련된듯하여 아타까웠다.

 문화통치로의 전환은 3·1운동의 결과였다. 1919년 8월 12일 부임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만이 유일한 해군대장이었고 그 외는 육군총독이었다.

 사이토는 9월 10일 헌병경찰제를 폐지, 조신인의 관리 임용 및 대우개선, 언론 출판의 고려, 지방자치 시행을 위한 조사 착수, 조선 문화 관습 존중 등을 시정방침으로 밝힌다(p.210)

그런데 실제로는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소수에게만 문화통치를 적용하였다. 인구 절대 다수인 농민에게는 계속 가혹한 착취를 일삼았다.

 1920년과 1921년 각각 2500명씩 5000명 늘리는 등 일본군을 대폭 증강시켰으며 경찰 숫자도 종래의 6000명에서 2만 명으로 경찰관 주재소 역시 종래의 730개소에서 2700개로 늘렸다. 경찰관서에는 특별고등부라는 비밀경찰부를 설치하고 경찰무장을 강화했다. 

 백정계급의 형평운동은 한국 인권운동사에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 대표자이신 강상호선생의 운동은 어떠한 독립운동에 보다 고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40만이나 되었던 백정에 대한 차별은 마치 미국의 인종차별 보다 더욱 심각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직업적 천시가 인권의 멸시로 직결되었던 수백년 누적된 비합리가 흑인차별보다 심각한 것이라기에 충분하다. 합리적 사회는 차별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하는 태도가 발달된 사회일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살펴볼 일들이 산재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방정환의 어린이날 선포는 세계 최초의 사례였다는 점과 손병희의 사위로 천도교 였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오자>

p. 57 아래서 위로 7째 줄 (안기→인기)

p.162 사진설명 (시위횟수만 1500명→ 1500회)

p.295 위에서 아래로 4째 줄 (국민대표주비위 → 준비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