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8권 -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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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공황의 여파는 세계적이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 문제제기는 이념적 대안의 탐색으로 연계되었다. 당시 조선은 외국자본과의 시장 연동성이 미약했다. ‘대공황’이 조선에 미친 직접적 영향은 공산화의 명분제공 측면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소련 숭배적 콤플렉스를 취하였다는(p. 26)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적 사회주의가 태동할 수 있는 중대한 기회를 상실했다는 평가가 가능하겠다.

  일제의 음모로 인하여 조선과 중국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중국 전통 외교전략이라 할 수 있는 이이제이를 일본이 차용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에 ‘만보산 사건’이 이용되었다. 사변이란 정부의 전쟁 결정 절차를 기다리지 않고 군부의 일부 부대가 무력충돌을 일으키는 변고를 일컫는 말이다(p. 40). 만보산 사건 때 “호떡집에 불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p. 36)는 주장도 다루고 있다. 1932년 중국공산단의 민생단 사건(p. 72)도 외교적 갈등이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는 1932년 3월 1일 중국 동북 3성에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은 뒷날 남북한의 권력을 잉태시킨 공간”(p.49)이다. 박정희는 1942년 3월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하면서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금시계 은사품을 받기도 했다(p.51).
 

  김구선생이 기획하고 한국애국단원 이봉창과 윤봉길이 실행한 폭탄의거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공존하고 있다. 국사 교과서 중심 근대사에서는 대표적 항일독립 활동으로만 찬양하여 다뤄지는 애국활동일 뿐이었다. 의사의 행적에 회의적인 견해의 핵심은 “극소수의 폭력에 의한 운동은 필히 패배(p. 66)”하게 된다는 숙명론과 폭력에 대한 보복의 악순환이라 점에 있다.

  윤봉길 의사 의거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하이에 살고 있던 조선 민족 운동가에 대한 일제의 보복을 야기했다. 탄압을 피해 임시정부도 이전하게 된다(p.64).

  일제강점기하 ‘투기’에 대해 소개한 내용이 무척 생소했다. 나진 옹진 부근 땅값이 한달 만에 1000배가 오른 사례는 한국의 토지거래 역사에 남을 만한 폭등이었지 싶다. 금에 대하여도 놀랍다. 1939년에는 31톤(p.82)을 생산하였다는 것이다. 21세기 국제 금가격 앙등에 맞춰 채취했다면 국부증진에 긴요했을 것이다.

  단재의 명성을 신뢰하고 ‘조선상고사’를 구매한 적이 있다. 고대사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후 단재는 역사연구이며 민족주의의 성향일 것이라 짐작해온 듯 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나키스트였다. 10년 형을 받고 영어 8년째 되는 해 1936년 57세로 별세했다. 다른 책들에서 신채호가 조선 최고의 천재였으며 도덕주의자로 묘사되고 있으나 그에 대한 부연은 다루지 않는다. 다만 신채호가 구속된 이유는 운동자금 타개를 위한 외국환 위조혐의 였다는 것은 본권에서 알게 되었다. 막연히 필화정도의 독립운동에 연루되었던 것으로 추글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어시간에 배운 현대문학 단편의 대다수는 당대 신문 연재소설이었다. 신문의 특성상 독자를 고려한 통속성을 담고 있게 되었다. 순수 문학 작품이 아니었다는 점은 현대문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평가에서 “예술을 위한 친일”이라는 점에서 일반 친일보다는 너그러운 경향이 있는 듯 하다. 그런나 친일이라는 결과 행위에 주목하여 해석하는 것이 옳은 태도일 것이다.

  1930년대 문맹률이 77퍼센트 였다. 이런 사정이 동아일보 브나로드 운동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교과서에 없는 내용이다. 브나로드는 러시아어로 ‘민중속으로’라는 의미이다. 당시에는 러시아의 사용이 빈번했던 것 같다. 트로이카, 볼쉐비키 등속의 단어들도 러시아어였다. 

  일제강점기하에 도입된 제도 중 상당수는 현재도 기원적 가치를 갖고 있다. 농협 역시 일제의 노동조합에서 비롯되었다. 일제의 주택영단은 대한주택공사로 조직적 생명을 지속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하에 신도를 정교로 채택하려는 시도는 성과가 없었다. 현재는 그 흔적도 없다. 한국의 종교다양성을 고려하여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올림픽 마라톤 쾌거와 그에 대한 국민적 열광은 상징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스포츠와 국민의 심리적 연합의 시초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월드컵 열풍 등이 현대사회의 특성으로 단정짓은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1등만 기억하는 전통도 오래된 일이듯 하다. 남승룡도 기억해 주는 배려가 요구된다. 역사공부는 겸손함을 갖도록 유도하는 기능이 있다.

  손기정 일장기 삭제 사건의 전말이 동아일보 일개 직원의 판단에 의하였다는 점은 그간 동아일보 애국사건 개요와는 거리가 있었다.

  김성수 김연수 형제의 중일전쟁 호재와 거부 축적에 대해 최소한 조선 자본주의 선각자라는 미화된 표현 만큼은 자제되어야 할 것 같다.

 황국신민화의 핵심배경은 병역징집시 전장에 충성을 확보(p.284)하기 위한 세뇌활동 이었다. 징집 시 체력검사 과목들(p. 290)은 오늘날 군에서 측정하는 체력측정 종목과 이상할 만큼 유사하다. 일제의 징병제가 하층민에게 신분상승 ‘사다리’가 되었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징집을 강제징용과 동일한 개념으로만 보는 것에 주의가 요망된다는 것이다. 일제 징집의 경력은 자의적 출병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1937년에는 전 민족 저항 이미지와 전 민족 협력이미지가 공존하였다(p.299). 식민사관은 강점 초기부터 준비된 일이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경찰을 동원하여 전국 도서를 색출하여 역사서 51종 20여만권을 태웠고 일본 중국 자료도 폐기하였다.

일제의 식민사관은 4가지로 요약된다(p.304) 첫째, 조선의 타율적 습성 둘째, 근대사회로의 이행의 정체, 셋째, 정쟁본성이라는 당파성, 넷째, 시조가 같다는 일선동조론 이다. 식민사관의 핵심주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강력하게 주입되게 되었다. 이병도 같은 괴뢰역사가의 악행은 특별히 단죄되어야 할 것이다.

당대를 살아가는 양심 있는 행위를 규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부작위도 친일이라고 하는 주장까지는 주의가 요망된다. 그러나 간혹 이런 뉘앙스가 담긴 주장이 발견된다. 세상을 역사적 판단까지 고려해서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라 하겠다.

1930년대 한국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1938년 여름부터는 경찰이 교회마다 천황과 하느님 중 더 높은 이를 선택하라는 설문(p. 338)을 받았다. 물론 천황이 높다는 응답이 대다수 였다. 교회 철수를 막기위한 위기대책이었을 것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역자를 제명한 장로회의 정책은 강제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중 주기철목사의 신사참배 거부와 옥중 고문에 의한 순교는 한국 기독교의 자존심이라 하겠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주기철 목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심적 개신교인이 전혀 없었다면 조상제사 금지를 설파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윤치호는 1932년 4월 17일 일기에서 “당파성이 조선을 움직이는 기본요소라면 전쟁은 일본을 움직이는 기본요소(p. 20)”라고 했다. 일본의 광기어린 전쟁으로 다음권이 이어질 것이다.

오자정정

p.159 아래에서 위로 셋째 줄

"면서기가 순사를 ----> 면서기나 순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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