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제 강점기 근대사의 포커스는 단연 독립운동사에 맞춰져 있다. 필자의 의식세계에서 1920년는 6.10 만세운동, '의거', 임시정부활동 정도로만 정리된 시대였다. 그런데 본 권에서 소개하는 당시의 단상은 그 외에도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였던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미 알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이해의 계기가 되었다.  근대사에 대한 체계적 고찰이라는 독서목적에 부합하는 시리즈다. 

  단재께서 의열단의 행동강령 및 투쟁목표로 써주었다는 '조선혁명선언'에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 폭력 파괴의 길로 매진(p. 24)"이라는 문구들에 단호한 독립정신이 느껴진다. 다만 열악한 여건으로 인해 의열단의 성과가 당시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전략수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혹시 의열단의 '불발폭탄'이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면 최초 조직성격을 유지했을 수도 있을것 같다. 김익상 의사가 일본 육군대장에게 던진 폭탄, 김지섭 의사가 일왕궁성에서 투척한 폭탄 3발,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사용한 폭탄 등은 불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조명하 의사는 천황장인 암살에 단도를 사용하였다.  물론 김상옥 의사의 종로서에서 사용한 폭탄, 장진홍 의사의 상자폭탄과 같이 정상제품도 있었다. 의열단 와해의 원인으로 희생대비 성과의 미흡으로 인한 사기저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독립운동 조직의 이념에 의한 좌우분열과 갈등이 언급된다. 의열단원에 의한 박용만 암살은 비극적 사건이었다.  

  친일파의 자치운동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처음 접하는 내용이었다. 자치의 성격이 일본의 일부라는 대전제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재차 매국하는 장면으로 이해해도 될듯하다. 

  당시 사회주의와 친일의 이분양상에 대해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에 대응한다. '아틀라스 일본사(서울:  , 2011)'는 이러한 조치가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시행되었음이 어급하고 있다. 친미적 정치상황하에 일본은 사회주의를 극도록 배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순조사망은 6.10만세 운동을 추동했다. 운동은 좌파계열의 공헌도가 높았다고 하는데 이런한 점에 대하여는 이념을 넘은 수용적 역사관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1920년대 감옥과밀화로 인해 사면제도가 시행되었고 이것이 현대의 사면제도의 시초가 되었다(p.148). 과밀이 상당히 심각했던 것 같다. 감옥환경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은 없다. 다만 현재 한국은 교육형 행형을 지향하고 있다. 교정시설에서 교도교화를 통해 재사회화를 유도하는 것을 이념으로 한다. 과밀수용으로는 교화프로그램의 성공을 이룰 수 없다. 당시 일제가 이러한 것까지 고려했을리는 만무하다.  

  이광수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번역했다는 것이 의아하다. 히틀러를 추종했다면 민족적인 측면에서 더 많은 역할시도가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에 대한 자문이다. 

  1920년대 문화활동은 기존의 지식을 크게 초월한다. 방송, 언론, 문학, 영화, 스포츠, 전화, 자동차, 다방문화, 화장품, 패션유행, 라디오, 유성기, 헤어스타일, 연애편지 등이 당시부터 본격화 되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은 세계에서 6번째(p. 205)였다.  

  박노자의 지적(p. 213)대로 폭력행위로 인한 독립운동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겠지만 그러한 판단을 평온한 상태에서 하는 것과 위기상황에 처해하는 것은 다를 것이다.  

  1925년 자살자가 1500명 정도로 한강인도교와 철길 등이 이용되었다. '진달래꽃' 김소월, '사의 찬미' 윤심덕, 김우진도 자살했다. 의열단원들도 의거 중에 자살을 한다. 1920년대 기존보다 다양한 콘텐츠를 발견하여 반가웠지만 본질적으로 살기 어려웠던 시기였던 것은 틀림없다. 

 <오타>  56쪽 그림 "삽일전 ---> 십일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