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이, 당신 자신이 되세요 - 민감한 영혼 ‘엠패스’를 위한 풍요와 건강, 사랑에 관한 안내서
아니타 무르자니 지음, 황근하 옮김 / 샨티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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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LOW YOUR BLISS”라는 경구를 조셉 캠벨이 자신의 인생사와 신화학으로 풀어냈다면 저자는 같은 경구를 힌두교의 세계관과 유사한 자신의 임사체험(<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샨티)을 바탕으로 풀어낸다. 우주의 근원은 일자,만유, 순수한 사랑, 순수의식이고( 힌두교의 브라흐만과 유사하다.) 우리는 그런 브라흐만이 물질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태어난 신의 현현이라는 것이 저자가 임사체험 중에 얻은 깨달음이다. 저자 세계관에서 우리는 모두 내면에 신의 본질을 가지고 있고( 이건 아트만느낌이다.) 무작위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영혼의 의도, 목적, 소명같은 영혼의 설계도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만 해도 알레르기가 돋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의 전개 중에 근거로 드는 대부분은 ‘~그랬다더라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사례연구이고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같은 검증이 불가능한 자신의 임사체험이다. 에모토 마사루의 육각수 실험을 근거로 들기도 하는데 이거 이미 스켑틱한 사람들에게서 호되게 까인 것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홍콩에서 태어난 인도인이고 성장과정에서 베단타 철학을 공부했다는 저자의 이력은 본인의 임사체험이 자신의 문화적 토양에서 나온 환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 책은 소심한 사람들을 위한 힐링서적으로 괜찮고 결론도 꽤 래디컬하다. 결국 제일 중요한건 너니까 너부터 챙기고 눈치보지 말고 보헤미안으로 살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타겟팅하는 독자는 엠패스이다. 지나치게 민감하면서도 자기 주장은 약한, 회사 점심시간에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면서 짜장 대신 짬뽕을 외치는 사람들이다. 사실 이렇게 자신의 진실보다 주변의 가치관이나 관습을 택하는 모습은 굳이 엠패스가 아니더라도 흔할 텐데 MBTI 마냥 엠패스라는 단어를 쓰는게 아마 마케팅에는 적절할 것이다. 삶의 목적 중 하나가 진부한 표현을 쓰자면 자아실현이겠지만 저자의 버전으로는 영혼의 목적,의도를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온 후 우리는 환경의 여러 영향으로 이러한 의도를 망각하거나 의지를 꺾는다. 직관과 영감이 풍부한 엠패스는 상대적으로 더 높은 소명과 더 높은 자아에 연결되어 있으나 지나친 공감능력 때문에 자신보다 남을 더 챙기고 주변의 영향에 쉽게 휘둘리므로 그런 엠패스들이 자신을 지키면서 소명을 찾는 방법론을 제시하는게 이 책의 골자다. 저자가 전작에서 말한 자기를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자신으로 살아라등의 (<나로 살아가는 기쁨>,샨티) 내용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변주된다. 쉽게 흔들리는 엠패스의 특성상 자신을 방어하는 구체적인 방법도 소개하는데 결국 자기암시나 시각화 같은 기법들이다. (비법을 원하는 독자들은 맥이 빠질 수 있다.) 특히 강조되는 부분은 내면의 신비가육감이다. 오감 이외에도 육감, 직감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저자는 못을 박는다. “내면의 신비가는 흡사 고대 그리스 철학의 다이몬 같은 느낌인데 우주의 본질과 우리를 이어주는 존재로서 역시 실존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내면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육감을 믿고 내면의 신비가에게 답을 구하라고 말한다. “느낌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는데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따르라는 진부하고 추상적인 표현이 저자에게는 진리이다. 저자의 모든 논리에 깔린 대전제는 자기사랑이다. 이 대목이 저자 콘텐츠의 강점이다. 왠만해서 자기혐오가 없는 사람은 없고 일반적인 인도의 영적 전통은 자기 포기를 말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기사랑을 정말 한도 끝도 없이 강조하는데 그 근거는 임사체험 중에 겪은 일자가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이었고 자신의 본질이 바로 그 일자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다면 굳이 엠패스가 아니더라도 홀가분한 기분에 마치 종교에 빠진 듯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죄책감 없이 매 순간 자신을 고양 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마치 다이어트 때문에 금식하던 사람이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초콜렛을 즐기는 느낌? 영적 전통에서 부정적인 의미인 에고라는 단어도 자기사랑 앞에서는 물리적인 세계를 살아가게 하는, 무한한 자아를 탐구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이미지로 바뀐다. 오히려 두려움없이라는 표현이 저자에게는 에고 포기에 가깝다. 스스로를 표현하고 창조하려는 아트만을 방해하는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에고라는 게 저자의 조감도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포기하고, 자신이 조건없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마이클 싱어가 <될일은 된다>에서 항복실험을 했던 것처럼) 허용하기를 할 때 우주가 자기에게 진정으로 속한 것을 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약간 비약하면 저자의 자기사랑 방법론은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연상시킨다. 비록 부드러운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내가 죽어보니 나는 완벽한 존재더라,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건 전부 *까라 마이신이고 내가 매순간 최고의 기분을 맛보는 일을-그게 초콜렛을 먹는 일이라도- 할테야 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영성적인 포장을 벗기고 저자의 주장을 정리하면 대학 전공 선택할 때 부화뇌동하지 말고 네 적성대로 해라, 정도의 얘기일 것이다. 부모님이 아무리 국문과 가는 거 반대해도 듣지 마라, 너는 사랑받는 존재다, 정도일 텐데 저자는 라는 영혼의 지도를 집어넣는다, 개성과 적성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이 고3은 어느정도 주변의 상황을 고려하며 타협할 것이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영혼의 지도를 상정하는 순간 타협의 여지는 없어진다. 아마 이 고3은 많은 풍파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죄책감조차 무화시키는 자기사랑은 분명히 왜곡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본질이 조건없는 사랑무판단이라는 전제는 에고의 폭주를 가지고 오지 않을까. 외려 나태함의 변명거리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같은 뉘앙스로 무한한 자아를 언급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그 무한한 자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브레이크를 건다. 영성서적 특유의 추상적이고 안개 속을 걷는 듯한 애매모호함과 단순한 논리전개, 샥티나 푸르나같은 단어를 감당할 수 있다면 분명히 재미있고 힐링 효과가 있는 책이다. 다시 캠벨을 언급하자면 캠벨의 영웅신화에서 영웅이 삶으로 귀환하는 부분이 있다. 모험을 떠난 영웅은 보석을 가지고 세속으로 귀환하는데 그가 받는 반응은 오히려 멸시와 천대다. 이 때 영웅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는데 은둔생활을 하거나 어떻게든 세속과 보석을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아마 저자도 임사체험 후 귀환한 영웅 같은 대접을 받은 모양이다. (악플 얘기를 하는거 보니 상황이 충분히 연상된다.) 저자는 다시 임사체험 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고, 자신의 삶속에 어떻게든 자신의 깨달음을 통합해야 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을 한 결과물이 이 책이다. 굳이 엠패스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길을 걷다 풍파에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뭐 밑지는 셈치고 저자의 자기사랑 암시를 반복해도 손해보는 것은 없을 것이다. (뽕맞은 것 같은 효과는 미리 경고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건진 가장 시의적절한 충고는 디지털 단식하라는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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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주의적 표현이겠지만 세련된 홍상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홍상수 영화 중 특히 식사장면을 보면 속세적?, 촌스러움? 같은 한국적?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비슷한 정서를 서구사람들도 이 영화를 보며 느낄지 모르겠다. 단 몇 개의 단어로 소설을 썼다는 헤밍웨이 이야기처럼 배우의 몇 개의 동작이나 표정으로 켜켜이 쌓인 정서나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다. 때문에 이영화는 별다른 스토리라인이 없는데도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듯 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다. 관람 후에는 내가 뭔가를 놓친 거 같은데 하는 느낌이 드는 영화다. (자막 때문에 한눈에 영화가 들어오지 않는 게 있으니.) 가족이라면 응당 서로를 잘 알고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유대감이 있어야 하거늘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허물어지는 유대감의 잔재거나 실은 우리는 가족을 모른다이다. 세 개의 에피소드 모두 돈이 갈등요소로 등장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남매는 아버지 부양을 놓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반대로 인정받기를 여전히 바라는 두 딸이 슬그머니 어머니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으려고 한다. (케이트 블란쳇은 역시 연기를 잘한다. 축 처진 어깨와 큰 뿔테 안경은 진짜 더블린 문화재위원회 위원같다.) 돈과 관련하여 그나마 제일 화기애해한 장면은 마지막 에피소드의 쌍둥이 남매가 같이 커피를 마시고 한 쪽이 커피값을 전부 내는 장면이다. 아직 젋고 같이 시간을 보낸 경험이 선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수십년 전 도올이 강의 중에 한 말이었나 책에서 읽었었나 가물가물하는데 자기가 닭을 키운 경험이다. 닭이 병아리를 낳아서 살갑게 돌보다가도 어느 시점이 지나면 닭은 철저히 병아리를 외면하고 자기 자신만 돌보더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이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마루야마 겐지 할아버지가 말하듯 제대로 된 부모라면 오로지 자식의 독립만 바라야 할 것이고 독립 후에 부모는 자신이 가진 자원을 자식이 아니라 본인을 위해 쓰는 것이 질척질척한 트라우마와 콤플렉스에 빠지지 않는 건강한 관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칼같이 베어버릴 수 없는게 가족아닐까. 영화는 그 머뭇거림과 애매모호한 다정함을 보여준다. 짐 자무시 다른 영화처럼 음악이 여기서도 끝내준다. 보고나면 특별히 한 건 없는데도 왠지 잔잔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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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일러)

시간의 블랙홀이 있는지 이 영화가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2014년작이다. 톰 히들스턴이 시드 비셔스 같이 퇴폐 이미지의 미남 록스타로 나오고, weird(?)한 이미지로만 기억되던 틸다 스윈튼이 아 이렇게 예쁜 여자였구나, 싶다.(어째 치와와를 닮은 거 같다.) 이 영화를 다룬 리뷰는 색다른 설정의 뱀파이어 영화라는 정도밖에 찾지 못했다. 짐 자무시는 현대를 살아가는 문명인 뱀파이어라는 설정으로 괴물 뱀파이어라는 관습을 뒤트는 재기를 부려본 것일까. 2014년에는 그런 시도가 신선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궁금해지는 게 왜 제목에 굳이 사랑이 들어가는 걸까. 피를 마시면 불멸하는 뱀파이어들도 꼭 사랑을 해야 살아남는다는 것인지.

아담과 이브는 교양있는 뱀파이어 커플이다. 아마도 지금이라면 기후운동에 진심인 ‘woke’ 나 트럼프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진보주의자들의 모습일 것이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아담이 세상사에 너무 밝아서 비관적이라면 독서가인 이브는 질 낮은 쾌락주의가 아닌 좋은 의미에서 낙관적이다. 과거에 아담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짐작되는 사고뭉치 동생을 여전히 스윗하트라고 부르며 챙기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재밌는 장면은 동생이 흡혈귀로 변신하자 이브가 “21세기에 이게 무슨 짓이니하고 동생을 타박하는 장면이다. 마치 현대의 진보적인 뉴요커(?) 정도가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를 타박하는 모습과 겹쳐지지 않은가. 뱀파이어 이브는 이때 생명수 같은 혈액 보틀을 카펫위에 팽개칠 정도로 충격을 받는 모습이다. 수저 쓰는 현대인이 맨손으로 밥을 집어먹는 야만인을 본 것처럼 말이다. 동생 때문에 위기에 몰린 이들은 미국을 떠나지만 이제 안정적으로 혈액을 확보하지 못한다. 낯선 이국에서 굶주리기 시작하자 이브는 인간들을 보며 한탄하듯 말한다. “15세기 이후로 이 짓을 또 해야 하다니”.

제목의 함의를 고민하며 떠올린 하나의 생각은 감독이 -뱀파이어가 하나의 은유라면- 뱀파이어를 역설적으로 보통의 인간에 대한 은유로 사용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지극히 교양있고 문명적인 인간이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자 내면의 아만성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아야기의 은유 아닐까. 강신주 콘텐츠 주요 내용 중 하나가 우리는 자족적인 존재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타자의 생명을 뺏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 내 팔을 뜯어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 강신주의 결론은 우리는 폭력의 정도를 따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타자를 대할 때 항상 윤리적인 고민과 성찰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강신주는 100%의 순수와 비폭력은 결국 파시즘으로 귀결된다고 한다. 인간 존재의 조건은 그런 이상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컴퓨터로 이 글을 쓰며 스마트폰으로 영화예매를 한다. 사회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상반기 주말 내내 거리로 나가 집회에 참여했고, 가치있는 소비를 위해 프차가 아닌 동네카페에서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마신다. 하지만, 내가 평소에 추구하는 가치들을 내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디스토피아같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까지 추구할 수 있을까?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러시아 병사라면, 하다못해 예전 월남에 파병된 군인이라면 어디까지 인도주의나 평화주의를 외칠 수 있을까? 베트남 양민학살 같은 의제에 소위 진보언론이 지금 취하는 스탠스를 취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자신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인간이란 한없이 가벼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궁지에 몰린 이들이 괴물로 돌변하기 전(이 때 틸다 스윈튼 특유의 weird 이미지가 위력을 발휘한다.) 주고받는 대화는 곱씹어 볼수록 서글프다. 마치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에서 연주를 했다는 악사들 같은 분위기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끝까지 부여잡고, 곧 마주해야할 자신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몸부림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동시에 이브의 마지막 대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하고 살아남겠다는 끈질김과-그 와중에서도- 달콤쌉싸름한 묘한 위트가 느껴진다. 그리고 살기 위해 오늘도 들의 싸움을 벌이는 수많은 중생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뭐 이런 느낌으로... 결국 폭력의 세상에서 그나마 사랑이라는 위안이라는 게 있다는 게 감독의 의도였을까. 적어도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긴 시간을 버텨냈고 버텨야할 운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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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리는 철학 - 오래된 지혜가 오늘의 나에게 답하다
알베르트 키츨러 지음, 최지수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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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것인가? 요즘 우리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행복이 높은 수입과 좋은 직장, 사회적 지위와 인정 같은 외부적 상황이 아니라 내면의 평화와 내적일관성, 내면의 균형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행복은 감정, 기분같이 가변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평화다. 외부적인 것은 수단에 불과하고 좋게 봐줘야 외부적인 것을 얻기 위해 내면의 평화를 희생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일단 내면의 평화에서 내면에 해당하는, 외부의 영향과 무관한 나다움이라는 것은 존재할까? 나는 어차피 다른 사람과 기존의 가치관의 영향 속에서 형성되는 것 아닐까? 저자는 강물은 계속 흘러 변하지만 강바닥은 그대로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디오티마라는 가상의 철학자와 상담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의 한 축은 번아웃에 시달리는 직장인에게 직장을 박차고 나가 새로운 삶을 찾으라는 격려와 나다움을 찾으라는 충고와 방법론이다. 예전에 김어준, 강신주 콘텐츠에서 나오던 내용과 비슷한데( 예를 들어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강신주의 <다상담>) 설득력은 상당하다. 저자의 직업이 철학 컨설턴트라고 나오는데 문장 하나하나에 내공이 느껴지고, 품위가 있다. 저자는 아마 그리스 로마철학부터 불교 유교같은 고대철학을 토양삼아 일종의 2차생산물을 만들었을 것이다. 저자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힐링서적으로 손색이 없다. 자기계발서로도 읽을 수 있지만 이토록 품위있게 힐링을 안겨주다니. 아마 상담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심란한 사람이라면 디오티마의 상담에서 적잖은 위로를 얻을 것이다. 이 책의 또다른 축은 내면의 평화평화를 해치는 여러 부정적 감정들에 대한 성찰이다. 그래서, 지나친 자책감에 시달리는 30대 여성부터 (디오티마는 자신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라고 답을 준다.) 애인이 생긴 남편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인까지(디오티마는 관계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성장하고 죽는 것이니 자신의 행복에 관한 열쇠를 남편에게 두지 말라고 조언한다.) 여러 군상들이 디오티마와 대화룰 나누고 돌아간다. 아마 스토아 철학의 방법론이 주로 쓰이는 것 같다. 외부의 상황은 통제할 수 없지만 거기에 대한 반응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내면의 정원을 가꾸고 외부를 용기와 관용이라는 미덕으로 대하라는 게 디오티마의 대체적인 처방같다. 디오티마의 처방 중 내게 가장 낯선 덕목은 감사이다. 행복한 바보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결핍이 없다면 향상심도 사라지지 않을까?. 성취는 미래의 것이고 우리는 현재를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순간을 감사라는 덕목으로 충족하게 살라는 것일까? 디오티마는 나에게 지금 있는 것이 없는 것 보다, 이미 이룬 것이 갈망하는 것 보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아직 오지 않은 삶보다 더 가치 있습니다. 내면의 가치가 외적인 소유물보다 더 중요하고, 나의 자존감이 사회적 지위보다 더 중요합니다”(181페이지) 라고 말한다. 인상적인 문장이다. 이 책의 화자는 디오티마의 상담을 지켜 본 조수인데,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은 철학의 실천성이다. 고대철학은 삶과 결합된 실천철학이었고, 고대의 보편적 지혜는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내용은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열린책들) ).일상을 바꾸지 못하는 철학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책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이 책의 문장 하나하나의 배경에는 고대철학이라는 엄청난 백그라운드가 있지만 한 번 이 책을 읽고 훅 던져버린다면, 삶에 체화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디오티마가 강조하는 것은 꾸준한 연습과 반복, 결단과 용기이지만 막막하게 느껴진다. 매뉴얼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이 이런 막막한 끈기를 발휘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반드시 사서 읽을 것을 권한다. 체화되지 않는다면 절반도 읽지 못한 것이다. 가장 마음에 안드는 것은 저렴한 느낌의 한국어판 제목. 뭐 원제는 침착하게! - 철학으로 쉽게 잘 살기라니 출판사의 고충도 이해는 간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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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봤는데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초반부는 대사가 별로 없고 루마니아의 도시를 걷는 주인공을 계속 보여준다. 신호등을 건너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화면 한 구석 전봇대 기둥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낙서가 있다.  “sex”                               길거리에서 주차문제로 주인공과 우연히 설전을 벌인 남자도 익숙한 욕설을 내뱉는다. “내 *이나 빨아, 걸레야감독은 이런 식으로 일상에 슬그머니 숨어있는 우리가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기호들을 보여준다. 아이스크림 광고판의 문구는 목구멍 깊숙이이고 극장의 외벽에 장식된 그리스식의 남성 조형물은 성기가 당당히 드러나 있다. 길바닥에 버려진 여자 마네킹 다리 옆에는 그 가랑이 사이를 연상시키는 꽃이 피어 있다. 이 영화를 루마니아라는 국가의 사회분위기와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감독이 차우세스쿠부터 군가를 부르는 아이들,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같은 극우, 파시즘을 연상시키는 기호들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극의 마지막 학부모회의 중 한 명은 루마니아 군대는 패하지 않는다, 라고 외치는 군인이다. 감독은 루마니아의 파시즘이 여성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하는 걸까. 이게 남성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유는 섹스동영상이 유출된 여교사는 음란하다고 비난을 받는데 다른 남자 가수는 당당히 내가 박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어라고 노래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기억인데 한 미술교사가 자신과 부인의 누드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학부모의 항의를 받고 아마 징계를 받았던가?.. 하는 일이 기억난다. 주인공 여교사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학부모회의의 반응 그 때의 코리아의 학부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재밌긴 하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한국과 루마니아의 학부모가 비슷한 문제에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주인공이 헌신적이고 능력있는 교사라는 것은 후반 학부모 회의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어떻게 저런 추잡한 짓을!”은 변하지 않는다. 섹스는 더러운가? 우리는 단지 동물일 뿐인데 실은 고상한 척 하느라 섹스를 철저히 감춰야 하는 걸까? 이건 필패다. 섹스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인간은 (아마도) 없기 때문이다. 답이나 결론을 제시하는 영화라기 보다는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주는 영화같다. 무거운 영화가 아니라 탭댄스를 추듯 경쾌하고 안드로메다 결말을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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