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력 -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황선종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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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신성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역설은 사림들이 신성한 것을 재미없어 한다는 것이다. 이제 독서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한 곰팡내 나는 단어만 연상시킨다. 사이토 다카시가 <독서력>을 쓴 이유다.

 

이 책의 전반부는 독서의 역능을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에서 구체적인 독서법을 기술하고 있다. 이 독서라는 신성한 기도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하나의 나침반이 되리라 생각한다. 사이토 다카시에게 독서는 자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고,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의 자아에게 독서라는 것은 하나의 경험이고(input) 저자와의 대화이다. 그레서, 일종의 소통이다. (이건 묵독은 고립이라고 보는 <낭송의 달인,호모큐라스>(고미숙,북드라망)과는 다른 관점이다.) 독서보다 몸으로 하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주장에는 독서가 체험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체험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고 하면서 반론을 제기한다. 또한 독서라는 간접경험을 통해 체험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독서를 통해 자신이 풍성해진다는 애긴데, 이를 위해서는 내면의 마찰을 일으키는 책을 읽으라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시종일관 책을 사서 보라고 한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아서 읽고, 중요한 문장을 필사한 후 반납하는 나로서는 심히 거슬리는 대목이었다. 저자가 책을 강매(?)하는 이유는 첫째, 돈을 들여야 긴장감있게 책을 읽을 수 있고(다치바나 다카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걸로 기억한다) 둘째 자신만의 책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위험한 출발점이다. 책장을 만드는 순간부터 지옥의 제1관문이 시작될지 모른다. 오키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을 보라. 책 무게 때문에 방바닥이 꺼지는 일은 유도 아니다. 도서관에 가서 총류코너를 찾아보라. 이 지옥의 천태만상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장을 만들게 되면 나만의 지도가 완성되고,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떠올리기 쉬워진다. 책장을 바라보며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 (강신주 선생님도 그래서 e-book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책을 사라는 이유는 저자의 독서법과도 관련이 있다. 저자는 독서는 스포츠라며 독서력을 높이는 단계를 기술하고 있는데(독서 역시 피아노 연습처럼 계속해야 좋은 연주를 하며 즐길 수 있다.) 듣기, 음독하기, 묵독하기, 삼색 볼펜을 사용하여 책에 밑줄긋기이다. 이런 독서법을 따르려면 당연히 책을 사야 한다. 저자에게 책은 소비재가 아니라 자신이 보낸 시간의 한 부분이다. 밑줄을 긋는 순간 그 책은 자신만의 것이 되어 버린다.(알라딘에 팔 수도 없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책의 내용을 떠올리기도 쉽고, 책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긴장감 있는 독서를 할 수 있다.

저자는 출판문화진흥을 위해서라도 책을 사라고 하는데(아닌게 아니라 조금 전 출판업계가 고사 직전 이라는 신문기사를 보기는 했다) ... 이럴려면 자기만의 주거공간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하지 않을까. 2년마다 메뚜기로 이사를 해야 하는 사람에게 장서는 큰 부담이다. 만만한 서재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 공간을 장서로 채울 수 있겠지만, 열악한 주거공간을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 도서관은 구원의 장소다. 저자는 도서관에서 절판된 책을 구하고, “책의 지도를 그릴 수는 있지만, 자신은 대여해서 책을 읽지는 않는다고 한다. 나는 책을 대여해서 읽고, 중요한 문장은 필사하고 다시 반납하는데 책을 읽은 경험을 떠올리려면 필사한 문장을 보면 되고,(사이토 다카시도 책을 기억하고 싶으면 필사하라고 한다.) 반납할 책이기 때문에 긴장감있게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다. 단점은 문장을 필사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아마 이 점이 저자에게 가장 고깝게 여겨지지 않을까. 저자는 음독을 소개하며 예전에는 독서가 신체적 행위였고 수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여건상 자신은 정신적 긴장을 수반하는 독서(묵독)”를 권한다고 하는데, 그 밑바탕에는 책은 정보에 가깝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미 모래알만큼 많은 책이 깔려 있고, 책을 요약할 수 있다면 통독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더 많은 책을 읽기 위해서다. 문장을 일일이 필사하는 것보다 책에 밑줄을 긋는게 훨씬 빠른 독서일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에 독서는 커뮤니케이션의 기초라는 주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여기서는 저자가 말하는 대화의 요령이 오히려 주목할만 하다. 요는 독서가 대화의 맥락을 더 잘 파악하게 한다는 것인데 일종의 테니스게임처럼 대화라는 과정을 묘사한다.

 

입덕은 신중해야 한다. <책장의 정석>(나루케 마코토,비전피엔피) 같은 책이 나올 정도로 책에 집착하는 책중독자들이 있다.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톰 라비, 돌베개)에 나오는 것처럼 책은 이들에게 일용한 양식이고, 책중독은 은근한 자랑질이기도 하다.(장서의 괴로움, 오키자키 다케시,정은문고). 하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고양이 빌딩을 사지 못할 바에야 책덕후에는 고난의 길이 있을 뿐이다. 멋모르고 이 요지경의 세계에 입덕했다간 일터에서 쫓겨나고(왜냐면 당신은 사무실 서류더미에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책을 읽을 테니까), 인간관계는 파탄에 이르고(왜냐면 당신 애인이 더 이상 서점에서 데이트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 집에서도 쫗겨날 것이다.(당신 집은 이제 처치불가능한 책들로 거주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책이라는 술의 유혹도 만만찮은 것이어서 이 책을 읽고나면 어느 정도의 장서는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죽하면 피에르 바야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패러덕스) 같은 책을 썼을까. 나는 아직도 이 책이 피에르 바야르가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슬픔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기만술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키의 소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에는 도서관 방문객을 납치해서 공부를 시킨 다음 그 사람의 뇌를 먹는 악당이 나온다. 공부를 한 다음의 사람의 뇌수는 쫄깃쫄깃한 응어리가 들어있어 맛있다나 뭐라나.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머릿 속에서 음악이 들리는 것 같아하는 약간 뽕맞은 느낌이 든 적이 있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나를 궤도에서 이탈시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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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낭송Q 시리즈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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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씨네21에 실린 게임평론에서 한 평론가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청각,시각,촉각,후각,미각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자신은 시각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눈으로는 맛볼수도 있고, 들을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단다. 카프카는 폐렴에 걸려 맥주를 마실 수 없게 되자 술집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맥주를 사주며 그 사람이 맥주를 들이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아마 지금 사람들이 먹방을 보는 심리와 유사하지 않을까 한다. 영화나 연극을 보고 공감하는 것도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상상력을 자극하여 대리체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시각이 우리의 감각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인데 <호모 큐라스>에서 고미숙 선생님은 오히려 <청각의 복원>을 주장한다.

이 분의 공부에 관한 열정은 어디까지일까? 수유너머에서 시작해서 남산 감이당까지, <공부와 백수의 공동체>를 운영하고 <호모 쿵푸스>에서 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저자는 <호모큐라스>에서 공부의 “새로운 사잇길”을 찾아낸 것 같다. 그 사잇길은 우리가 공부하고 하면 익히 떠올리는 “묵독”이 아니라 “낭독과 구술, 낭송”이다. 일반화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가 예전보다 몸을 쓰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대체로 차로 이동하고, 티비와 컴퓨터를 의자에 앉아 시청하며 보내는 우리의 신체적 활동이다. 고미숙씨는 영화 <아바타>와 <인상여강>을 대비시키며 시각과 청각을 대비시킨다. 시각을 이미지, 환영으로 치환하며 시각보다는 청각이 우리의 신체성을 표상하며 신체성이 잠식되어 야생을 갈구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리, 청각의 복원이라고 주장한다. 말할 때 우리는 현재시점에서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몸을 쓰는 것이다. 말을 할 때의 단순한 의미 뿐만 아니라 소리와 파동이 우리의 뼈에, 우리의 몸에 새겨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최순실 시국에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진 않지만, 우주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원천도 소리와 파동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소리와 파동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라는 것이다. 저자의 지적편력을 보면 동의보감과 사주명리학이 있는데 이 대목에서 이런 지적편력이 백그라운드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런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 대목에서 설득력이 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지금껏 상대적으로 우리가 외면한 소리, 청각, 말하기에 중요성을 상기한다는 것은 하나의 시사점이 될 것 같다.

이런 전제에서 저자는 이러한 소리와 파동의 철학을 낭독, 낭송이라는 공부의 방법과 연결시킨다. 저자가 보기에 묵독은 신체를 쓰지 않는 <뇌의 특권화>이며 고립이고, 체화되지 않은 정보일 뿐이다. 그리고, 체화되지 않은 정보는 삶에 활용할 수 없다. 묵독과 연결되는 암기는 뇌의 비대화를 가져오는 정보의 집적일 뿐이고, 텍스트를 고정화시켜 비판,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에 비해 낭송은 텍스트를 새로 생성하는 창조이며 청중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소통의 장이다. 그리고, 정보가 아닌 체화되는 지혜이다. 저자는 친구들끼리나 학교에서 낭독회를 가져보는 것이 소통의 장이 될 것이며, 수학,물리학에서 말로 읊조리고 표현하는 소리의 공부법이 또다른 알찬 공부방법이 될 것이라고 한다. 낭송 후 내용은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소리와 파동은 몸에 새겨질 것이므로.(여기에서도 <동의보감>적인 시각이 끼어든다.)

이렇게 한 공부는 결국 삶을 변화시키는 <양생의 기술>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또다시 동의보감적 시각) 낭송이 가진 신체성이 몸을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에는 열하일기, 불면증에는 목민심서가 좋을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마지막에 산책을 하면서 낭송을 하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마치 철학자의 산책처럼, 저자가 꿈꾸는 삶의 한 이미지일 것이다. 더 나아가 손으로 직접 필사하는 신체성을 더한 후 최종적인 지성의 산출을 도모한다. 저자는 이책을 시작으로 낭송시리즈 28권을 출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책은 일종의 총설이다.

저자가 동의보감과 사주명리학에 관심을 가진 동기가 “왜 공부를 해도 삶이 바뀌지 않는가”라는 질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낭송과 듣기는 결국 앎이 신체와 만나야 한다는 결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여러 책을 읽는 다독가에게는 좀 뜨악한 애기일 수도 있다. 어떻게 모든 책을 낭송한담? 하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택스트를 접하는 복원된 경로 중 하나라고 받이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약발이 좋다고 저자가 강조하니 속는 셈 치고라서도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불면증과 우울증에 효과가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저자가 묵독의 폐해를 늘어놓는데 이걸 읽고 그나마 하던 묵독마저 팽개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은 금서가 아니라 책 자체를 금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강신주 선생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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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부모를 떠안다 - 고령화와 비혼화가 만난 사회
야마무라 모토키 지음, 이소담 옮김 / 코난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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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서 부쩍 나이가 드셨다. 아버지는 팔십, 어머니는 칠십이 넘으셨는데 아직 정정하시다. 아직 내가 <개호介頀>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역시 이 책은 내게 남다르게 읽혔다. 물론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대부분 부모님에게 애틋함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호 때문에 자식과 부모가 서로 날을 세우는 이 책의 일화들은 가슴이 아프다. 개호 때문에 결혼과 일상을 포기하고 자식들은 부모를 돌본다. 효자라는 주변의 시선이라도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오히려 부모에게 기생한다라는 시선을 개호자들은 느낀다고 한다. 책에 나오는 문장대로 즐거운 개호는 없다”.

개호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우울감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개호는 부모와 자식간의 닫힌 세계이기 때문에 고립된 세계다. 저자는 개호자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이 고립감이라고 한다. 누군가와의 대화가 큰 도움이 된다고, 개호를 미리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결국 <관계부족>이 원인이라고 저자는 진단하는 것 같다. 저자는 독신자가 부모를 떠안은 개호 스타일을 주목하는데 독신개호자가 미혼으로 생애를 보내게 되고 또다시 고립된 노령자가 되는 악순환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본은 이런저런 보완책과 서비스가 있는 것 같다. 예전에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서평에서 그래도 일본은 한국에 비하면 천국이라는 취지의 글을 본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비슷한 느낌이 든다. 부족하나마 여러 가지 개호보험과 의료지원서비스가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시작되고 갑자기 끝나는 개호, 결국 문제는 죽음으로 수렴된다. 개호 후에는 예외없이 후회가 남는다고 한다. 그래서,개호 중에는 이를 항상 염두에 두라고 한다.

누군가는 비웃겠지만 그래도 나이드신 부모님은 나를 짠하게 한다. 개호라는 상황은 러시안 룰렛처럼 사람을 덮친다고 저자는 환기시킨다. 어머니, 아버지 내가 기억하는 모습들은 전부 과거가 되어버리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누군가처럼 같이 죽자고 부모님께 악을 쓸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 쪽이 가라앉았다. 최근에 읽은 책들 중의 키워드가 <관계>였다.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예전에는 수명이 짧아 개호문제라는 게 그리 부각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풍성한 가족이나 기타 친족관계가 서로를 의지하는 계기가 되질 않았을까. 1인가구가 대세인 요즘 우리 모두 마음 한 구석에는 누군가를 절실히 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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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 - 그저 살다보니 해직된 MBC기자, 어쩌다 보니 스피커 장인이 된 쿠르베 이야기
박성제 지음 / 푸른숲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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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동안 엠비씨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러다 부당해고를 당했다. (재처리도 안된다는 김재철사장 때 일이다,) 자, 기분이 어떨까?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생계와 돈에 관한 공포와 압박은 어떻게 해결할까? 실직자라는 “낙오”의 이미지를 담은 주변의 시선은 또 어떡하나? 그런데, 불과 2년만에 스피커 만드는 회사의 사장으로 변신했다. 스스로 수작업으로 명품 스피커를 만든다. 이런 뜬금없는 도약이 어떻게 가능한 걸까? 이런 이야기는 백수전성시대에 또 다른 신데렐라 스토리 아닐까?

<어쩌다보니,그러다보니>는 엠비씨 해직기자였던 저자가 직접 수제 스피커를 만드는 장인으로 변신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중간중간 김재철 사장 이야기와 1백70일간의 엠비씨파업, 저자가 겪은 기자생활의 내막도 덤으로 들어가 재미를 더한다. 언론보도의 공정성이 훼손되는 과정을 보는 것은 물론 가슴아프지만, 저자가 또 다른 일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면 부러움과 한숨이 섞여 나온다. 저자에게 그런 변신이 가능했던 것은 그 때까지 “쌓아놓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연희동 한쌤이 강의 중에 “40대에 굶어죽기 힘들다”라는 취지의 애기를 한 적이 있다. 아마 그 때까지 쌓아놓은 경력이나 여러 가지 유무형적 자산이 그 사람을 먹여살린다는 취지의 애기로 이해한다. 노조위원장이지만 한량기자였다는데 저자 역시 해고를 당하면서 완벽하게 망망대해로 던져진 것은 아니었다. 일단 “복직”과 “해고무효”라는 것이 상당한 심리적 완충지가 되었을 것 같다. 실제 가능성여부는 차치하고 바라볼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실직이라는 황망함을 가라앉히지 않았을까. 최승호, 이근행 같은 동료해직자의 존재와 노조의 지원도 도움이었을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아내의 수입이 있었거나 노조의 금전적인 지원이 있어서 생계의 압박이 상대적으로 덜하지 않았을까. 골프를 즐기고 돈이 많이 드는 취미인 홈시어터 애호가였다니 지금 세상에서 한 끝자락 잡기도 힘든 사람들에게는 다른 세계 이야기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실직중 한 행동의 특징을 꼽으라면,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처음 서너달은 적당히 운동하고, 적당히 고민하고, 적당히 술 마시며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날 “식탁을 만들어 달라”는 아내의 부탁을 받고, 공방으로 향해 난생 처음 목공기술을 배워 8일만에 식탁을 완성한다. 그리고, “감동이다”라고 소감을 밝힌다. 아마 이 소감이 저자의 이후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성취감을 쫓아 목공일을 점차 늘려가다니 작접 디자인을 하고 자신의 취미인 음악듣기와 목공을 결합시켜 자작 스피커를 만들기 시작한다. 얼마나 성취감이 높았던지 <뉴스타파>의 합류제안과 연봉 2억(!)의 대기업 임원 취직제의를 거절한다. 이 대목이 가장 낯설게 느껴진다. 무려 2억이다! 내가 몇십년 일하면 그 정도 모을 수 있을까. 저자도 이 대목에서 “후회는 없다”며 자못 비장해지는데 나는 혼란스럽다. 당시 저자에게 목공일은 돈을 벌게 하는게 아니라 돈을 쓰게 하는 일이었다. 저자는 친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행복하게 살자”를 모토로 삼았다고 한다. 목공을 선택한 것은 두 대안 모두 행복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실직 후 생계의 부담같은 어두운 이미지가 이야기 내내 없다. 실직 중에도 아내는 와인 파티를 열고, 변호사 친구가 참석한다. 굶어본 적이 없어 당당한 건지, 아니 내가 실제로 굶어본 적은 있는 건지.

인상적인 것은 스피커를 만드는 과정에서 저자가 여러 인맥의 도움을 받는 다는 것이다. 10년 동안 동호회 카페의 열혈회원이었다는데 “재능 기부”처럼 도움을 받아 스피커를 완성한다. 기자시절의 인맥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후 그런 과정을 보고 있으면 “좋은게 좋은 것을 불러온다”는 어찌보면 씁쓸한 원칙이 사실인 것 같다. 그렇게 <어쩌다보니,그러다보니> 스피커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는 것인데-회사라기 보다는 1인기업이다- 이 책을 읽고 나자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의 와타나베 이타루가 떠올랐다. 두 사람이 비슷한데가 많이 있는데 목공과 제빵이라는 “장인”이라는 개념이 들어갈 수 있는 “중간 규모”의 일을 택했다는 점, 이윤보다는 장인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일에 접근했다는 점이다. 히라카와 가쓰미가 말하는 “소상공인”의 개념에 가깝다. 그리고, 소비가 아니라 노동에서 이미 삶의 정체성과 의미, 재미를 찾았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소중하고 행복한 감정을 찾아가니 일로 발전하고 자신의 또다른 정체성을 찾는 과정.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뭐가 중요한 걸까? 돈? 그러면 저자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1년동안 아내에게 가져다 준 수입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윤이 아니라 합리적인 가격으로 스피커를 공급하는게 저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착취할 수 있는 회사의 사장도 아니다. (아까 말했듯 1인기업이다) 아마도 스피커를 만들고 살아온 과정 자체가 저자에게는 돈 못지 않는 보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계는? 쌍용차 노동자들은 해고 이후 자살을 택했는데 어째서 이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알차게 만들 수 있었을까? 스스로 자신에게 다시 묻는다. 돈, 정말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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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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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원하는 것을 적어볼까요? 음... 크루즈타고 세계일주하기? 샥스핀과 캐비어로 식탁을 한달동안 도배하기? 오늘은 청담동 그녀와, 내일을 홍대그녀와 함께 놀기?... 이런 일을 직접 겪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렇게 살면 금세 질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삶의 공허가 닥칠 거라고 주변에서 지금껏 나를 가르쳐 왔다. 인간은 원래 삶의 의미를 찾고,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고 싶어하며, 그래서, 아마도 죽음 직전에는 “그래도 잘 살았다”라는 충일감을 가지고 눈을 감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나의 SNS에는 이런 경구가 떠 있었다.

 

“출근했으니까 영혼아 이따 봐.”

 

물론 일부의 행운아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이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대다수 직장인들의 심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전에 김지룡씨가 “차라리 병렬형 삶을 살아라”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 성공한다” 중) 해야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병행해서 살아가라는 취지의 글이었는데 그 당시에 공감했었다. 대체 일과 삶이 함께 가는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될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앞의 경구가 유행하는 것처럼 현재는 일과 삶의 균형은 둘째고, 자신의 영혼을 어딘가에 저당잡혀야만 삶이 보장되는 시대다. (아니면 내가 지금껏 터프한 삶을 살아온 건지도 모르지만) 때문에 내가 지금 정말로 원하는 것을 말하라면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채워줄 수 있는,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무언가를 찾는 일”이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얄밉게도 와타나베 이타루는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에서 그 일을 해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중간에 작두타는 것 비스끄레한 애기도 나온다. 삶의 고민에 지쳐 잠이 든 어느 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타나 “이타루, 너는 빵을 만들어 보렴”하고 속삭였다고 한다. 이 말 한마디에 제빵사가 되기로 인생노선을 수정했다는 애긴데, 너무 꼬투리를 잡지는 말자. 무라카미 하루키도 데이브 힐턴의 2루타를 보고 작가가 되기로 했다지 않은가. 지은이가 진로문제로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스스로가 만들어낸 구원의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제빵사가 되기로 했다면 파리***나 뚜레** 체인점 하나 열어서 가정을 일구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는게 해피엔딩일텐데(맞나?) 이 책의 저자는 자연과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견딜 수 없었다. 시스템을 탈주하여 “나답게, 자유롭게”,“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고, 그것을 생활의 양식으로 삼아 살아가는” 과정이 이 책의 주요 줄거리이다.

지은이는 빵을 만드는 과정과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중첩시킨다. 이윤을 위해 인공적으로 배양된 이스트가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능케 했다면, 발효하고 부패하는 균은 “순환” 속에서 삶을 유지시킨다. 부패하지 않는 돈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가능케 했고, 삶과 자연을 왜곡하는 모순을 만들었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열심히 일할 수 있고, 좋은 음식과 술을 맛볼 수 있다면 누구나 즐겁고 넉넉하게 살 수 있는데 왜 부패하지 않는 이윤 때문에 일과 먹거리를 파괴하는가? 중간 중간 막시즘과 자신의 경험을 섞어가며 지은이는 자신이 체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설명하고, 그래서 자신이 선택한 대안과 그 대안을 시행하기까지의 과정을 풀어놓는다. 책에는 단순하게 쓰여져 있지만- 예를 들어 “마음이 참 복잡했다” 같은 문장- 실제 저자에게는 인생의 큰 파도였을 것이다.

“힘들기도 힘들고, 지치기도 지친” 직장인들을 위한 책들이 있다. “아, 보람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사표의 이유”,“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작고 소박한 나만의 생업 만들기 ”,“3만엔 비즈니스”,“적당히 벌고 잘 살기”,....... 한 쪽에서는 일 때문에 숨이 막힌다고 난리고 다른 한 쪽에서는 일이 없다고 난리다. “전부 자본주의 때문이야”는 만화 “엘리트 건달”에 나오는 농담이지만, 우리는 이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토대를 진지하게 재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왜 부장은 나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걸까? 왜 야근은 일상인 걸까? 월세는 왜 내야 하는 걸까? 지구를 자기가 만들었나?

마지막으로 행여라도 다른 삶을 꿈꾸는 내리막 시대를 사는 노마드들에게 저자의 충고를 전한다.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삶의 진리는 당장에 무언가를 이루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될 턱이 없다.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끝장을 보려고 뜨겁게 도전하다 보면 각자가 가진 능력과 개성, 자기 안의 힘이 크게 꽃피는 날이 반드시 온다.”

 

“ 우리 안의 힘이 당장에 꽃을 피우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자신을 키워가다 보면 언젠가는 만개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쉬지 않고, 싫증내지 말고, 자신을 연마하면 길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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