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낭송Q 시리즈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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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씨네21에 실린 게임평론에서 한 평론가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청각,시각,촉각,후각,미각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자신은 시각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눈으로는 맛볼수도 있고, 들을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단다. 카프카는 폐렴에 걸려 맥주를 마실 수 없게 되자 술집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맥주를 사주며 그 사람이 맥주를 들이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아마 지금 사람들이 먹방을 보는 심리와 유사하지 않을까 한다. 영화나 연극을 보고 공감하는 것도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상상력을 자극하여 대리체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시각이 우리의 감각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인데 <호모 큐라스>에서 고미숙 선생님은 오히려 <청각의 복원>을 주장한다.

이 분의 공부에 관한 열정은 어디까지일까? 수유너머에서 시작해서 남산 감이당까지, <공부와 백수의 공동체>를 운영하고 <호모 쿵푸스>에서 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저자는 <호모큐라스>에서 공부의 “새로운 사잇길”을 찾아낸 것 같다. 그 사잇길은 우리가 공부하고 하면 익히 떠올리는 “묵독”이 아니라 “낭독과 구술, 낭송”이다. 일반화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가 예전보다 몸을 쓰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대체로 차로 이동하고, 티비와 컴퓨터를 의자에 앉아 시청하며 보내는 우리의 신체적 활동이다. 고미숙씨는 영화 <아바타>와 <인상여강>을 대비시키며 시각과 청각을 대비시킨다. 시각을 이미지, 환영으로 치환하며 시각보다는 청각이 우리의 신체성을 표상하며 신체성이 잠식되어 야생을 갈구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리, 청각의 복원이라고 주장한다. 말할 때 우리는 현재시점에서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몸을 쓰는 것이다. 말을 할 때의 단순한 의미 뿐만 아니라 소리와 파동이 우리의 뼈에, 우리의 몸에 새겨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최순실 시국에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진 않지만, 우주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원천도 소리와 파동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소리와 파동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라는 것이다. 저자의 지적편력을 보면 동의보감과 사주명리학이 있는데 이 대목에서 이런 지적편력이 백그라운드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런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 대목에서 설득력이 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지금껏 상대적으로 우리가 외면한 소리, 청각, 말하기에 중요성을 상기한다는 것은 하나의 시사점이 될 것 같다.

이런 전제에서 저자는 이러한 소리와 파동의 철학을 낭독, 낭송이라는 공부의 방법과 연결시킨다. 저자가 보기에 묵독은 신체를 쓰지 않는 <뇌의 특권화>이며 고립이고, 체화되지 않은 정보일 뿐이다. 그리고, 체화되지 않은 정보는 삶에 활용할 수 없다. 묵독과 연결되는 암기는 뇌의 비대화를 가져오는 정보의 집적일 뿐이고, 텍스트를 고정화시켜 비판,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에 비해 낭송은 텍스트를 새로 생성하는 창조이며 청중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소통의 장이다. 그리고, 정보가 아닌 체화되는 지혜이다. 저자는 친구들끼리나 학교에서 낭독회를 가져보는 것이 소통의 장이 될 것이며, 수학,물리학에서 말로 읊조리고 표현하는 소리의 공부법이 또다른 알찬 공부방법이 될 것이라고 한다. 낭송 후 내용은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소리와 파동은 몸에 새겨질 것이므로.(여기에서도 <동의보감>적인 시각이 끼어든다.)

이렇게 한 공부는 결국 삶을 변화시키는 <양생의 기술>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또다시 동의보감적 시각) 낭송이 가진 신체성이 몸을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에는 열하일기, 불면증에는 목민심서가 좋을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마지막에 산책을 하면서 낭송을 하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마치 철학자의 산책처럼, 저자가 꿈꾸는 삶의 한 이미지일 것이다. 더 나아가 손으로 직접 필사하는 신체성을 더한 후 최종적인 지성의 산출을 도모한다. 저자는 이책을 시작으로 낭송시리즈 28권을 출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책은 일종의 총설이다.

저자가 동의보감과 사주명리학에 관심을 가진 동기가 “왜 공부를 해도 삶이 바뀌지 않는가”라는 질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낭송과 듣기는 결국 앎이 신체와 만나야 한다는 결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여러 책을 읽는 다독가에게는 좀 뜨악한 애기일 수도 있다. 어떻게 모든 책을 낭송한담? 하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택스트를 접하는 복원된 경로 중 하나라고 받이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약발이 좋다고 저자가 강조하니 속는 셈 치고라서도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불면증과 우울증에 효과가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저자가 묵독의 폐해를 늘어놓는데 이걸 읽고 그나마 하던 묵독마저 팽개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은 금서가 아니라 책 자체를 금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강신주 선생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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