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력 -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황선종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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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신성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역설은 사림들이 신성한 것을 재미없어 한다는 것이다. 이제 독서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한 곰팡내 나는 단어만 연상시킨다. 사이토 다카시가 <독서력>을 쓴 이유다.

 

이 책의 전반부는 독서의 역능을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에서 구체적인 독서법을 기술하고 있다. 이 독서라는 신성한 기도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하나의 나침반이 되리라 생각한다. 사이토 다카시에게 독서는 자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고,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의 자아에게 독서라는 것은 하나의 경험이고(input) 저자와의 대화이다. 그레서, 일종의 소통이다. (이건 묵독은 고립이라고 보는 <낭송의 달인,호모큐라스>(고미숙,북드라망)과는 다른 관점이다.) 독서보다 몸으로 하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주장에는 독서가 체험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체험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고 하면서 반론을 제기한다. 또한 독서라는 간접경험을 통해 체험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독서를 통해 자신이 풍성해진다는 애긴데, 이를 위해서는 내면의 마찰을 일으키는 책을 읽으라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시종일관 책을 사서 보라고 한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아서 읽고, 중요한 문장을 필사한 후 반납하는 나로서는 심히 거슬리는 대목이었다. 저자가 책을 강매(?)하는 이유는 첫째, 돈을 들여야 긴장감있게 책을 읽을 수 있고(다치바나 다카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걸로 기억한다) 둘째 자신만의 책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위험한 출발점이다. 책장을 만드는 순간부터 지옥의 제1관문이 시작될지 모른다. 오키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을 보라. 책 무게 때문에 방바닥이 꺼지는 일은 유도 아니다. 도서관에 가서 총류코너를 찾아보라. 이 지옥의 천태만상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장을 만들게 되면 나만의 지도가 완성되고,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떠올리기 쉬워진다. 책장을 바라보며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 (강신주 선생님도 그래서 e-book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책을 사라는 이유는 저자의 독서법과도 관련이 있다. 저자는 독서는 스포츠라며 독서력을 높이는 단계를 기술하고 있는데(독서 역시 피아노 연습처럼 계속해야 좋은 연주를 하며 즐길 수 있다.) 듣기, 음독하기, 묵독하기, 삼색 볼펜을 사용하여 책에 밑줄긋기이다. 이런 독서법을 따르려면 당연히 책을 사야 한다. 저자에게 책은 소비재가 아니라 자신이 보낸 시간의 한 부분이다. 밑줄을 긋는 순간 그 책은 자신만의 것이 되어 버린다.(알라딘에 팔 수도 없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책의 내용을 떠올리기도 쉽고, 책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긴장감 있는 독서를 할 수 있다.

저자는 출판문화진흥을 위해서라도 책을 사라고 하는데(아닌게 아니라 조금 전 출판업계가 고사 직전 이라는 신문기사를 보기는 했다) ... 이럴려면 자기만의 주거공간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하지 않을까. 2년마다 메뚜기로 이사를 해야 하는 사람에게 장서는 큰 부담이다. 만만한 서재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 공간을 장서로 채울 수 있겠지만, 열악한 주거공간을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 도서관은 구원의 장소다. 저자는 도서관에서 절판된 책을 구하고, “책의 지도를 그릴 수는 있지만, 자신은 대여해서 책을 읽지는 않는다고 한다. 나는 책을 대여해서 읽고, 중요한 문장은 필사하고 다시 반납하는데 책을 읽은 경험을 떠올리려면 필사한 문장을 보면 되고,(사이토 다카시도 책을 기억하고 싶으면 필사하라고 한다.) 반납할 책이기 때문에 긴장감있게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다. 단점은 문장을 필사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아마 이 점이 저자에게 가장 고깝게 여겨지지 않을까. 저자는 음독을 소개하며 예전에는 독서가 신체적 행위였고 수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여건상 자신은 정신적 긴장을 수반하는 독서(묵독)”를 권한다고 하는데, 그 밑바탕에는 책은 정보에 가깝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미 모래알만큼 많은 책이 깔려 있고, 책을 요약할 수 있다면 통독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더 많은 책을 읽기 위해서다. 문장을 일일이 필사하는 것보다 책에 밑줄을 긋는게 훨씬 빠른 독서일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에 독서는 커뮤니케이션의 기초라는 주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여기서는 저자가 말하는 대화의 요령이 오히려 주목할만 하다. 요는 독서가 대화의 맥락을 더 잘 파악하게 한다는 것인데 일종의 테니스게임처럼 대화라는 과정을 묘사한다.

 

입덕은 신중해야 한다. <책장의 정석>(나루케 마코토,비전피엔피) 같은 책이 나올 정도로 책에 집착하는 책중독자들이 있다.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톰 라비, 돌베개)에 나오는 것처럼 책은 이들에게 일용한 양식이고, 책중독은 은근한 자랑질이기도 하다.(장서의 괴로움, 오키자키 다케시,정은문고). 하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고양이 빌딩을 사지 못할 바에야 책덕후에는 고난의 길이 있을 뿐이다. 멋모르고 이 요지경의 세계에 입덕했다간 일터에서 쫓겨나고(왜냐면 당신은 사무실 서류더미에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책을 읽을 테니까), 인간관계는 파탄에 이르고(왜냐면 당신 애인이 더 이상 서점에서 데이트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 집에서도 쫗겨날 것이다.(당신 집은 이제 처치불가능한 책들로 거주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책이라는 술의 유혹도 만만찮은 것이어서 이 책을 읽고나면 어느 정도의 장서는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죽하면 피에르 바야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패러덕스) 같은 책을 썼을까. 나는 아직도 이 책이 피에르 바야르가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슬픔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기만술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키의 소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에는 도서관 방문객을 납치해서 공부를 시킨 다음 그 사람의 뇌를 먹는 악당이 나온다. 공부를 한 다음의 사람의 뇌수는 쫄깃쫄깃한 응어리가 들어있어 맛있다나 뭐라나.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머릿 속에서 음악이 들리는 것 같아하는 약간 뽕맞은 느낌이 든 적이 있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나를 궤도에서 이탈시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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