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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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채식주의는 생명을 향한 가장 큰 모독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오로지 도망칠 수 없는 것들만 먹는다.”(조셉 캠벨, 신화와 인생 중)

“ 다른 동물을 먹는다는 것”,“채식의 배신”,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한 강의 “
채식주의자”를 읽자 이런저런 책들이 떠올랐다. (물론 이 소설의 주제를 내가 헛다리 짚은 건지도 모른다) 나는 인용한 조셉 캠벨의 문장이 가장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 그런 관점으로 이 책이 읽힐 수 밖에 없었다. 캠벨의 주장은 대충 이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너의 삶을 이어라. 하지만 잊지 마라 너 역시 언젠가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

 그에게 생명이란 피로 이루어진 것이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삶이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고통과 슬픔을 기쁜 마음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말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내가 언젠가 누군가의 먹이가 될 것을 인식하면서 ,타인의 피를 먹는다- 과연 이렇게 상상하면 이 순간이 새롭게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전철을 기다리며 지루하게 보낸 시간은 내가 누군가의 생명을 갈취해서 확보한 것이란 애기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먹힐 순간을 생각하면 이 순간의 특별함은 더해진다. 그러고보니 몇가지 구절들이 더 떠오른다. 살아오면서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묻자 시골의 촌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산다는 게 죄지”. 박지원이 썼다는 문장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포악하다는 애기다” 박지원은 장수가 미덕으로 여겨지던 당시의 상식을 반박하는 의미로 이 문장을 썼다.

  하지만, 캠벨식의 사고에는 어떤 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잔인함과 폭력을 과연 어느 정도로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 구의역에서 숨진 노동자의 죽음은 잔인함과 폭력의 전형 아닌가. 뮤언가 신선하게 느껴지던(이렇게 쓰고나니 기분이 이상하다. 피가 “신선”하다니) 캠벨의 사고를 여기서 진전을 못 시키기겠다.

  폭력은 여러형태로 존재한다. 원치않는 야근을 시키고 직급에 상관없이 업무와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폭력아닌가? 하급자의 인격과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던 부장검사는 폭력을 휘두른 것 아닌가. 놀랍게도 나는 직장의 본질이 착취라는 것을 이제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강헌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타인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없는 법이다. 만약 부를 쌓고 싶으면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을 찾으면 된다. 외국인 노동자도 좋고 월급 70여만의 저학력노동자도 좋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구분도 착취의 사다리를 세분화시킨 것 아닌가. 더 많고 지속가능한 이윤을 위해서 새로운 금을 긋고 새로운 룰을 만든다. 그렇게 구조는 정교해지고 간교해진다. 한국사회를 생각하면 생물시간에 보았던 아메바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떠오른다.아메바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싸우는 힘으로 아메바는 꿈틀거린다. 메스로 한 부분을 찢으면 참았던 것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폭발 직전의 사람들은 보복운전을 하고, 시끄러운 윗층 사람과, 화장실에서 만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인다. 

   만약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닭을 죽이고, 살아있는 물고기의 목을 땃다면 나는 좀더 “삶”과 “생명”이란 것을 실감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 잔인함에 질려 채식주의자가 되었을까 아니면 내 손에 죽어간 생명을 떠올리며 무언가 다른 삶을 살았을까.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내는 동박새를 물어뜯으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할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브래지어를 벗은 것은 가슴에 생명이 차 있기 때문이 아니라 덥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정도로 충고하지 않았을까. 이런, 이건 완전히 그 무신경 무책임 남편하고 똑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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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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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벨라루스. 얼마 전 이민설명회에 갔을 때 잠시 이 나라의 이름이 나왔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예쁜 이름인데, 동구권의 히든카드인가 하는 감상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다음-비하나 폄하가 아니다- 벨라루스에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초등학교 때인가 체르노빌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아침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심각한 목소리로 애기하던게 기억난다. 무언가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였고, 나는 안전했기 때문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중학교 때인가는 학교에서 구독하는 청소년용 신문에 체르노빌의 눈 없는 돼지사진이 실렸었다. 역시 충격이었지만, 공포가 체감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후쿠시마가 터졌을 때는 공포가 있었나? 비를 맞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불편’은 있었지만, 몸에 감기는 공포는 아니었다. 벨라루스는 체르노빌과 인접한 나라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정확한 통계는 잊어버렸지만- 사망률이 급증하고, 평균 수명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암, 백혈병, 기형아 출산 등등... 그리고, 이 재앙은 지진이나 태풍처럼 잠깐 닥쳤다 사라지는게 아니다. 방사능의 반감기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인간과 대부분의 생물종에게 영원에 가깝다. 영겁의 생을 사는 종족이 아니고서야 체르노빌 이후에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고, 새로운 지구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미래의 연대기”다. 그리고, 전기와 인터넷, 휴대전화를 쓰고, 일회용 플라스틱컵에 예가체프 커피를 마시며 여기 지금과 연결되어 있는 나는, 앞으로 존재할 또 다른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에 연결되어 있다.

내가 후쿠시마 때 공포를 느껴야 했나? 요오드제를 사는 것은 오바였을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 괴물이 땅 속에 웅크리고 있고, 언젠가 지상을 뚫고 나와 바로 나의 뒷덜미를 낚아챌 수도 있다는 것은 직시해야 한다. 순전한 직관이지만 지금 후쿠시마의 땅 속 어딘가에는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지구의 한구석으로 방출되고 있을 것이다. 장사 한두 번 해보나?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은 너무도 닮았다! 사고가 나자 권력은 그것을 덮기에만 급급했고 아무도 책임을 지고 현실을 대면하려 하지 않았다. 도쿄전력이 미적거렸던 것처럼, 소련의 위대한 당 지도부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행여 흔들릴까 인민들의 충성심을 이용했다. 가장 힘없는 장삼이사들이 체르노빌에서 소모품으로 사고를 수습했고, 후쿠시마에서는 비정규노동자들이 투입됐다.(그렇게 알고 있다.) 그리고, 온갖 기만이 횡행했다. 식사 전에 손만 씻으면 된다. 기저귀 말릴 때만 주의하면 된다. 우리 인민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이번에도 승리할 것이다. 허용치 이하다... 사카구치 교헤였던가.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에서 일본 정부의 당시 해명이 얼마나 바보스럽게 들렸던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체르노빌에서 배신자로 몰렸고, 후쿠시마에서는 비국민으로 배척당했다. 그리고, 우리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빠르게 망각해 가고 있다. “체르노빌레츠”들을 한 쪽으로 밀어 놓은 채 말이다.

기타노 다케시가 동일본 대지진이 수백명이 죽은 한건의 사건이 발생한게 아니라 한 명이 죽은 사건이 수백건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책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담는다. 누군가는 인터뷰를 거부하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절절히 토로한다.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황당해한다. 그 중에서 희망을 애기하는 사람도 있고, 하루하루를 체념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그들을 “체르노빌레츠”라는 쓰레기통으로 쓸어 담을 때 저자는 그들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살려낸다. 체르노빌 이후에도 그들의 삶은 이어졌다. 그들은 아직 살아 있으며, 죽은 사람들은 기억과 이야기를 남겼다.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개성이 있는, 존중받아야 할 누군가의 삶이었다. 때문에 저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록했다는 것. 그것 자체로도 저자는 체로노빌 사람들에게 최고의 존중을 보여준 것 아닐까.

책을 읽고 나면 정말 신이라는 게 존재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망한 느낌이 든다. 몇 대를 자연과 더불어 이어지던 삶의 순간들은 너무나 쉽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듬어 주던 자연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렵지 않은가? 이토록 인간은 무기력하다. 하루키의 어느 소설이 생각난다. 청소년기에 왕따를 간신히 버텨 낸 주인공은 성인이 된 후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때는 어쨌든 이겨냈어, 하지만, 그런 폭력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라도 다시 닥칠거야. 주인공은 밤에 잠에서 깨어나 아내를 껴안고 운다. 대체 문명과 원자력은 누가 만든 것일까? 나는 무력하다. 아침마다 지정된 장소에 지정된 시간까지 존재해야 하고, 허접한 상사의 허접한 지시를 들어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거대한 빌딩을 세우고, 원자력을 만들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말이다.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원자력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후쿠시마의 세슘이 혹시 나를 공격해 고통 속에 죽어가더라도 말이다. 체르노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는 내내 느껴지는 감정이 익숙했다. 몇백일 전에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며 느꼈던 감정이다. 우리는 그 사건 역시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놓고 있다. 아직 이어지는 삶들이 있는데 말이다. 사건 발생 몇 달만에 신문을 보며 "이제는 지겹다"고 말하던 윗대가리들. 나가 디져라 

 

ps. 커플끼리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 말고 이 책을 같이 읽는 건 어떨까. 지금껏 들은 가장 처절한 사랑 이야기가 실려있다. 게다가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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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에 대하여 - 고대 스토아 철학의 대가 세네카가 들려주는 화에 대한 철학적 사색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김경숙 옮김 / 사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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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나도 꼴에 “아랫것들”이 생겼다. 호명을 하면 누군가가 부산스럽게 나타나서 처분을 기다린다는 듯이 내 옆에서 대기하는 것이다. 처음 이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마음 한 구석에 어떤 자극을 느꼈다. 누군가를 나의 의지대로 한다는 느낌. 변대적으로 집착한다면 묘한 쾌감이 될 수도 있는 느낌 말이다. 이런 느낌이 발전한다면 사내 성폭력같은 걸로 이어지는 거겠지. 대기하는 누군가가 긴 생머리에 토끼귀 장식을 한 야들야들한 언니라고 생상해보라. 근데 가끔은 반대의 상황도 발생한다는 거다. 넌센스지만 세네카의 말을 빌리자면 “노예가 말대답하고 불순한 표정을 짓는다고 왜 화를 내는가?” 이다
  사실 직장이나 학교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 아닌가. 내가 팀장한테 깨질 때 옆 부서 팀장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한다. “저렇게 소리 안 질러도 무섭게 할 수 있는데”
직장이나 학교나 결국 유치원이고 군대다. “시키든 대로 안 하면 죽어” - 필수 교양이고 민주주의고 나발이고, 힘이 지배한다. 상대를 짓눌러서 장난감을 빼앗아야 하고, 학교와 군대에선 몽둥이가 날아가고, 직장에선 차마 그럴 수 없으니 말이 날아가고 가끔 결재판을 날리는 사람이 있긴 하다.
 세네카가 보기에 화는 추하다. 사람의 머리털을 뻣뻣하게 하고 얼굴이 붉어진다. 입고 있던 품위 있던 옷을 스스로 찢어버리고, 본인이 다치든 말든 칼날을 향해 돌진한다. 노비투스가 얼마나 화를 잘 냈던지 세네카는 조곤조곤 설득을 시작한다.
  화는 강인함이 아니다. 격정이란 공허하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사랑도 아마 마찬가지?)
너는 화를 에너지로 사용한다고 하지만, 적들을 뿌리뽑고, 도시를 폐허로 만드는 것은 화가 아니라 이성이다. 네가 정말로 복수를 원한다면 공허한 화 대신 강철같은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화는 약함의 상징이다. 불평을 하는 사람들을 보라. 노인과 아이들이다. 적들이 던지는 창은 강인함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올 것이다.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자는 그것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도 열등한 것이다. 강자는 그런 감정 자체를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인함이란 외부의 조건에 상관없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고요한 마음의 평화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미덕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화는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미덥진 않지만, 세네카에게 인간의 본성은 화합을 원하고, 앙갚음을 원하지 않는다. 고요한 마음의 평화만이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미덕이며 격정의 벗은 슬픔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다. 자비는 자신을 위해 베푸는 것이다. 우리는 화가 우리 내부에서 싹을 틔우기 전에 그 싹을 잘라야 한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용”이다. 사리분별없는 동물에게 화를 낼텐가? 너는 “부당하다”고 화를 내지만 너 역시 비슷한 실수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깜냥으로 정당과 부당을 판별하지 마라. 화를 내서 상대방이 두려움을 갖는다면 네가 이긴 것 같지만 악행에는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이다. 두려움의 대상은 그 대상 역시 두려워야 할 것이 많다. 사자는 사소한 움직임에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화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화풀이 본능>에 따르면 생명이 진화하면서 화풀이 본능을 내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집단 내에서 호구로 찍힐 경우 생존이 어렵기 때문에 보복본능을 발전시켰다는 거다. 요새 대세인 뇌3단계론(변연계-파충류의 뇌, 구피질-원숭이의 뇌, 신피질-인간의뇌)에 따르면 화풀이본능은 구피질이나 변연계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네카는 감정보다 이성이 강력하다고 한다. 화를 없애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분노가 치밀으면 그것을 발전시키지 마라. 화를 유예하고 숨겨라. 웃어버리고, 무시하고, 그래도 남는 것은 용서해라. 알렉산더 왕의 아버지 필리포스조차 무례함을 참고 견뎠다. 네가 필리포스 보다 위대한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고개를 돌리면 어느새 죽음이 다가와 있을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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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에 대하여 - 고대 스토아 철학의 대가 세네카가 들려주는 화에 대한 철학적 사색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김경숙 옮김 / 사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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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아씨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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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고차 월든 - 잉여 청춘의 학자금 상환 분투기
켄 일구나스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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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핑크 플로이드의 <월>을 떠올려보자. 햄 만드는 큰 공장이 있다. 꼬불꼬불하게 놓인 컨베이어 벨트 위에 일렬로 놓인 학생들이 거대한 기계 안으로 들어가면 맞은 편에서는 따끈따끈한 햄 덩어리들이 떨어진다. 식상한 비유이긴 하지만, 그 벨트위의 학생은 바로 나다. 끝없이 펼쳐진 레일 위를 달려서 햄으로 만들어 진 후 사회로 나간다. 그래서, 누군가의 위장으로 들어가겠지.

켄 일구나스는 그런 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들려 준 매직워드를 듣고, 홈디포 알바복을 찢어버리고, 알래스카로 날라 버렸다. 그런 그의 발목을 계속 잡는 불구대천이 원수가 있었으니 바로 학자금 대출이었다.

이 책을 “잉여청춘의 학자금대출상환 분투기”정도로 선전하는 출판사의 마케팅은 아무래도 이 책에 대한 평가절하 같다. 이 책은 캠퍼스 주차장 봉고차 안에서 숙식을 하며 학교를 졸업했다는 “세상에 이런일이” 류의 애기가 아니다. 내게는 이 책이 지금 현실에 대한 생생한 캐리커쳐이자 저자의 성장담으로 읽혔다. 특별한 목적없이 남들이 대학을 다 가니까 비싼 돈을 대출받아 가며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만 하면 뭐라도 될 줄 알고 나름 공부도 재미있게 했는데, 막상 닥치니 정말 글자 그대로 일자리가 없다. 실은 그 전부터 많은 대학생들이 졸업장이 필요없는 일자리에 취직했단다. 빚은 늘어가는 뱃살처럼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한다. 처음에 빚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탓에 꼼짝없이 저임금 알바자리에서 시달려야 할 판이다. 그런데, 어느날 주차장에서 켄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알래스카로 향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 책에서 가장 설명이 안되는 “비합리적인” 부분인데 나는 여기서 조셉 캠벨이 말한 “영웅신화”를 떠올렸다. 영웅은 자신만의 모험을 떠나 성장을 해서 귀환한다는 내용인데(그 여행은 물리적인 여행이 될 수도 있고, 영적인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캠벨의 주장은 우리는 모두 자신 속의 환희를 찾아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웅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떤 “사인”을 만나게 된다. ( 무라카미 하루키를 소설가로 만든 데이비드 힐튼의 오후의 2루타를 떠올려보라. 혹은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에서 와타나베 이타루에게 한 할아버지의 충고) 켄에게 그것은 주차장의 매직워드였다.

지금 꿈이라면 영원히 꿈으로 남는다. 대안은 그 꿈을 지금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떠난 알래스카. 역시 문제는 신체성이다. 우리는 학교라는 격리된 공간에서 성장하고 사회로 나가 일터라는 격리된 공간에서 일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음식과 옷은 돈으로 시장에서 해결하고, 남는 시간은 티비를 보거나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보낸다. 그리고, 그 옷과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하고, 쓰리디영화나 리얼리티쇼로 현실을 경험한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눈을 가린 말이 얌전해지듯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상에 뛰어들 열정이나 모험을 떠날 배짱을 기르기란 힘들 것이다. 블루클라우드를 정복한 것을 시작으로 켄은 반쯤 잠들어 있던 자신을 깨우고 , 빚을 청산해가며, 자신만의 여행을 시작한다. 히치하이크로 여행을 하며 레일 위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자신만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얻은 교훈은 웬만하면 삶은 이어지더라는 것,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은 의외로 적더라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가난과 장난치고 있다는 통찰도 빼놓지 않았다.

공부가 좋아 다시 듀크대 대학원 인문학과정에 복귀하지만, 이번만큼은 빚을 지고 싶지 않다. 켄이 짜낸 묘안은 봉고차에서 사는 것이다. (이 분야의 선배로는 “가난뱅이의 역습”을 쓴 마쓰모토 하지메가 있다.) 일찍이 소로우의 월든에서 감명을 받아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살아보니 소로우가 말한 게 전부 옳은 건 아니라는 거다. (견디지 못할 외로움과 성욕은 어쩔건데?-픽,하고 여기서는 공감의 실소)

찌는 듯한 더위, 견딜 수 없는 추위, 긴장시키는 경비원들의 발자국소리, 등등을 참아낸 후 결국 졸업, 대학원 졸업식에서 졸업 연설을 하면서 학교생활을 마무리한다.(하지만, 듀크대는 이후 주차장에서 거주할 수 없다는 새로운 규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역시 부자동네는 어쩔 수 없다.)

자, 이야기의 해피엔딩. 켄은 자신의 이야기를 기고해서 유명인사가 되고, 이름난 잡지사로부터 고액연봉의 일자리를 제의받는다. 몇 년전이라면 아마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만한 해피엔딩.하지만,막판 반전은 켄이 일자리를 거절하고 다시 알래스카로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는 거다. 아마도 켄은 닳은 여행도구를 대충 꾸린 낡은 배낭을 들쳐메고 신발을 툭툭 고쳐 신으며 길을 다시 나섰을 것이다. 가슴 한 쪽에 흥분과 두려움, 동시에 평온함을 가지고서 말이다.

일찍이 카이지 형님의 손가락을 잘라먹은 효우도 회장이 말했다. 생명은 너무 존중해 주면 썩는다고. 그래서, 모두들 기회를 잡지 못하고 죽은 듯이 살아가는 거라고(카이지 완결됐나?) 역시 마루야마겐지 할배도 말했다. 어쩌면 불황기에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난 것은 하늘이 자신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인지도 모른다고(“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켄이 여행을 떠나고 자신을 단련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에게 실업과 빚이라는 장애물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진솔한 어조덕에 읽는 내내 저자에게 친밀감이 느껴졌다. 83년생이라는데 자신을 “Y세대”라고 소개한다. 그러고보니 내가 청춘이었을 때는 X세대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여행길을 배웅해주며 어깨라도 툭 쳐 주고 싶다. 이봐 켄, 어디 한번 잘해보라고. 난 좀 늦은 것 같지만 말이야.. 네가 거절했다는 그 일자리, 나는 약간 솔깃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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