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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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 얼마 전 이민설명회에 갔을 때 잠시 이 나라의 이름이 나왔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예쁜 이름인데, 동구권의 히든카드인가 하는 감상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다음-비하나 폄하가 아니다- 벨라루스에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초등학교 때인가 체르노빌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아침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심각한 목소리로 애기하던게 기억난다. 무언가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였고, 나는 안전했기 때문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중학교 때인가는 학교에서 구독하는 청소년용 신문에 체르노빌의 눈 없는 돼지사진이 실렸었다. 역시 충격이었지만, 공포가 체감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후쿠시마가 터졌을 때는 공포가 있었나? 비를 맞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불편’은 있었지만, 몸에 감기는 공포는 아니었다. 벨라루스는 체르노빌과 인접한 나라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정확한 통계는 잊어버렸지만- 사망률이 급증하고, 평균 수명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암, 백혈병, 기형아 출산 등등... 그리고, 이 재앙은 지진이나 태풍처럼 잠깐 닥쳤다 사라지는게 아니다. 방사능의 반감기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인간과 대부분의 생물종에게 영원에 가깝다. 영겁의 생을 사는 종족이 아니고서야 체르노빌 이후에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고, 새로운 지구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미래의 연대기”다. 그리고, 전기와 인터넷, 휴대전화를 쓰고, 일회용 플라스틱컵에 예가체프 커피를 마시며 여기 지금과 연결되어 있는 나는, 앞으로 존재할 또 다른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에 연결되어 있다.

내가 후쿠시마 때 공포를 느껴야 했나? 요오드제를 사는 것은 오바였을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 괴물이 땅 속에 웅크리고 있고, 언젠가 지상을 뚫고 나와 바로 나의 뒷덜미를 낚아챌 수도 있다는 것은 직시해야 한다. 순전한 직관이지만 지금 후쿠시마의 땅 속 어딘가에는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지구의 한구석으로 방출되고 있을 것이다. 장사 한두 번 해보나?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은 너무도 닮았다! 사고가 나자 권력은 그것을 덮기에만 급급했고 아무도 책임을 지고 현실을 대면하려 하지 않았다. 도쿄전력이 미적거렸던 것처럼, 소련의 위대한 당 지도부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행여 흔들릴까 인민들의 충성심을 이용했다. 가장 힘없는 장삼이사들이 체르노빌에서 소모품으로 사고를 수습했고, 후쿠시마에서는 비정규노동자들이 투입됐다.(그렇게 알고 있다.) 그리고, 온갖 기만이 횡행했다. 식사 전에 손만 씻으면 된다. 기저귀 말릴 때만 주의하면 된다. 우리 인민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이번에도 승리할 것이다. 허용치 이하다... 사카구치 교헤였던가.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에서 일본 정부의 당시 해명이 얼마나 바보스럽게 들렸던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체르노빌에서 배신자로 몰렸고, 후쿠시마에서는 비국민으로 배척당했다. 그리고, 우리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빠르게 망각해 가고 있다. “체르노빌레츠”들을 한 쪽으로 밀어 놓은 채 말이다.

기타노 다케시가 동일본 대지진이 수백명이 죽은 한건의 사건이 발생한게 아니라 한 명이 죽은 사건이 수백건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책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담는다. 누군가는 인터뷰를 거부하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절절히 토로한다.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황당해한다. 그 중에서 희망을 애기하는 사람도 있고, 하루하루를 체념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그들을 “체르노빌레츠”라는 쓰레기통으로 쓸어 담을 때 저자는 그들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살려낸다. 체르노빌 이후에도 그들의 삶은 이어졌다. 그들은 아직 살아 있으며, 죽은 사람들은 기억과 이야기를 남겼다.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개성이 있는, 존중받아야 할 누군가의 삶이었다. 때문에 저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록했다는 것. 그것 자체로도 저자는 체로노빌 사람들에게 최고의 존중을 보여준 것 아닐까.

책을 읽고 나면 정말 신이라는 게 존재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망한 느낌이 든다. 몇 대를 자연과 더불어 이어지던 삶의 순간들은 너무나 쉽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듬어 주던 자연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렵지 않은가? 이토록 인간은 무기력하다. 하루키의 어느 소설이 생각난다. 청소년기에 왕따를 간신히 버텨 낸 주인공은 성인이 된 후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때는 어쨌든 이겨냈어, 하지만, 그런 폭력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라도 다시 닥칠거야. 주인공은 밤에 잠에서 깨어나 아내를 껴안고 운다. 대체 문명과 원자력은 누가 만든 것일까? 나는 무력하다. 아침마다 지정된 장소에 지정된 시간까지 존재해야 하고, 허접한 상사의 허접한 지시를 들어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거대한 빌딩을 세우고, 원자력을 만들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말이다.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원자력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후쿠시마의 세슘이 혹시 나를 공격해 고통 속에 죽어가더라도 말이다. 체르노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는 내내 느껴지는 감정이 익숙했다. 몇백일 전에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며 느꼈던 감정이다. 우리는 그 사건 역시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놓고 있다. 아직 이어지는 삶들이 있는데 말이다. 사건 발생 몇 달만에 신문을 보며 "이제는 지겹다"고 말하던 윗대가리들. 나가 디져라 

 

ps. 커플끼리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 말고 이 책을 같이 읽는 건 어떨까. 지금껏 들은 가장 처절한 사랑 이야기가 실려있다. 게다가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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