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채식주의는 생명을 향한 가장 큰 모독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오로지 도망칠 수 없는 것들만 먹는다.”(조셉 캠벨, 신화와 인생 중)

“ 다른 동물을 먹는다는 것”,“채식의 배신”,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한 강의 “
채식주의자”를 읽자 이런저런 책들이 떠올랐다. (물론 이 소설의 주제를 내가 헛다리 짚은 건지도 모른다) 나는 인용한 조셉 캠벨의 문장이 가장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 그런 관점으로 이 책이 읽힐 수 밖에 없었다. 캠벨의 주장은 대충 이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너의 삶을 이어라. 하지만 잊지 마라 너 역시 언젠가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

 그에게 생명이란 피로 이루어진 것이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삶이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고통과 슬픔을 기쁜 마음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말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내가 언젠가 누군가의 먹이가 될 것을 인식하면서 ,타인의 피를 먹는다- 과연 이렇게 상상하면 이 순간이 새롭게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전철을 기다리며 지루하게 보낸 시간은 내가 누군가의 생명을 갈취해서 확보한 것이란 애기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먹힐 순간을 생각하면 이 순간의 특별함은 더해진다. 그러고보니 몇가지 구절들이 더 떠오른다. 살아오면서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묻자 시골의 촌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산다는 게 죄지”. 박지원이 썼다는 문장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포악하다는 애기다” 박지원은 장수가 미덕으로 여겨지던 당시의 상식을 반박하는 의미로 이 문장을 썼다.

  하지만, 캠벨식의 사고에는 어떤 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잔인함과 폭력을 과연 어느 정도로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 구의역에서 숨진 노동자의 죽음은 잔인함과 폭력의 전형 아닌가. 뮤언가 신선하게 느껴지던(이렇게 쓰고나니 기분이 이상하다. 피가 “신선”하다니) 캠벨의 사고를 여기서 진전을 못 시키기겠다.

  폭력은 여러형태로 존재한다. 원치않는 야근을 시키고 직급에 상관없이 업무와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폭력아닌가? 하급자의 인격과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던 부장검사는 폭력을 휘두른 것 아닌가. 놀랍게도 나는 직장의 본질이 착취라는 것을 이제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강헌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타인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없는 법이다. 만약 부를 쌓고 싶으면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을 찾으면 된다. 외국인 노동자도 좋고 월급 70여만의 저학력노동자도 좋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구분도 착취의 사다리를 세분화시킨 것 아닌가. 더 많고 지속가능한 이윤을 위해서 새로운 금을 긋고 새로운 룰을 만든다. 그렇게 구조는 정교해지고 간교해진다. 한국사회를 생각하면 생물시간에 보았던 아메바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떠오른다.아메바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싸우는 힘으로 아메바는 꿈틀거린다. 메스로 한 부분을 찢으면 참았던 것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폭발 직전의 사람들은 보복운전을 하고, 시끄러운 윗층 사람과, 화장실에서 만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인다. 

   만약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닭을 죽이고, 살아있는 물고기의 목을 땃다면 나는 좀더 “삶”과 “생명”이란 것을 실감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 잔인함에 질려 채식주의자가 되었을까 아니면 내 손에 죽어간 생명을 떠올리며 무언가 다른 삶을 살았을까.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내는 동박새를 물어뜯으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할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브래지어를 벗은 것은 가슴에 생명이 차 있기 때문이 아니라 덥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정도로 충고하지 않았을까. 이런, 이건 완전히 그 무신경 무책임 남편하고 똑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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