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고차 월든 - 잉여 청춘의 학자금 상환 분투기
켄 일구나스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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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플로이드의 <월>을 떠올려보자. 햄 만드는 큰 공장이 있다. 꼬불꼬불하게 놓인 컨베이어 벨트 위에 일렬로 놓인 학생들이 거대한 기계 안으로 들어가면 맞은 편에서는 따끈따끈한 햄 덩어리들이 떨어진다. 식상한 비유이긴 하지만, 그 벨트위의 학생은 바로 나다. 끝없이 펼쳐진 레일 위를 달려서 햄으로 만들어 진 후 사회로 나간다. 그래서, 누군가의 위장으로 들어가겠지.

켄 일구나스는 그런 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들려 준 매직워드를 듣고, 홈디포 알바복을 찢어버리고, 알래스카로 날라 버렸다. 그런 그의 발목을 계속 잡는 불구대천이 원수가 있었으니 바로 학자금 대출이었다.

이 책을 “잉여청춘의 학자금대출상환 분투기”정도로 선전하는 출판사의 마케팅은 아무래도 이 책에 대한 평가절하 같다. 이 책은 캠퍼스 주차장 봉고차 안에서 숙식을 하며 학교를 졸업했다는 “세상에 이런일이” 류의 애기가 아니다. 내게는 이 책이 지금 현실에 대한 생생한 캐리커쳐이자 저자의 성장담으로 읽혔다. 특별한 목적없이 남들이 대학을 다 가니까 비싼 돈을 대출받아 가며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만 하면 뭐라도 될 줄 알고 나름 공부도 재미있게 했는데, 막상 닥치니 정말 글자 그대로 일자리가 없다. 실은 그 전부터 많은 대학생들이 졸업장이 필요없는 일자리에 취직했단다. 빚은 늘어가는 뱃살처럼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한다. 처음에 빚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탓에 꼼짝없이 저임금 알바자리에서 시달려야 할 판이다. 그런데, 어느날 주차장에서 켄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알래스카로 향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 책에서 가장 설명이 안되는 “비합리적인” 부분인데 나는 여기서 조셉 캠벨이 말한 “영웅신화”를 떠올렸다. 영웅은 자신만의 모험을 떠나 성장을 해서 귀환한다는 내용인데(그 여행은 물리적인 여행이 될 수도 있고, 영적인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캠벨의 주장은 우리는 모두 자신 속의 환희를 찾아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웅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떤 “사인”을 만나게 된다. ( 무라카미 하루키를 소설가로 만든 데이비드 힐튼의 오후의 2루타를 떠올려보라. 혹은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에서 와타나베 이타루에게 한 할아버지의 충고) 켄에게 그것은 주차장의 매직워드였다.

지금 꿈이라면 영원히 꿈으로 남는다. 대안은 그 꿈을 지금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떠난 알래스카. 역시 문제는 신체성이다. 우리는 학교라는 격리된 공간에서 성장하고 사회로 나가 일터라는 격리된 공간에서 일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음식과 옷은 돈으로 시장에서 해결하고, 남는 시간은 티비를 보거나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보낸다. 그리고, 그 옷과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하고, 쓰리디영화나 리얼리티쇼로 현실을 경험한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눈을 가린 말이 얌전해지듯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상에 뛰어들 열정이나 모험을 떠날 배짱을 기르기란 힘들 것이다. 블루클라우드를 정복한 것을 시작으로 켄은 반쯤 잠들어 있던 자신을 깨우고 , 빚을 청산해가며, 자신만의 여행을 시작한다. 히치하이크로 여행을 하며 레일 위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자신만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얻은 교훈은 웬만하면 삶은 이어지더라는 것,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은 의외로 적더라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가난과 장난치고 있다는 통찰도 빼놓지 않았다.

공부가 좋아 다시 듀크대 대학원 인문학과정에 복귀하지만, 이번만큼은 빚을 지고 싶지 않다. 켄이 짜낸 묘안은 봉고차에서 사는 것이다. (이 분야의 선배로는 “가난뱅이의 역습”을 쓴 마쓰모토 하지메가 있다.) 일찍이 소로우의 월든에서 감명을 받아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살아보니 소로우가 말한 게 전부 옳은 건 아니라는 거다. (견디지 못할 외로움과 성욕은 어쩔건데?-픽,하고 여기서는 공감의 실소)

찌는 듯한 더위, 견딜 수 없는 추위, 긴장시키는 경비원들의 발자국소리, 등등을 참아낸 후 결국 졸업, 대학원 졸업식에서 졸업 연설을 하면서 학교생활을 마무리한다.(하지만, 듀크대는 이후 주차장에서 거주할 수 없다는 새로운 규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역시 부자동네는 어쩔 수 없다.)

자, 이야기의 해피엔딩. 켄은 자신의 이야기를 기고해서 유명인사가 되고, 이름난 잡지사로부터 고액연봉의 일자리를 제의받는다. 몇 년전이라면 아마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만한 해피엔딩.하지만,막판 반전은 켄이 일자리를 거절하고 다시 알래스카로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는 거다. 아마도 켄은 닳은 여행도구를 대충 꾸린 낡은 배낭을 들쳐메고 신발을 툭툭 고쳐 신으며 길을 다시 나섰을 것이다. 가슴 한 쪽에 흥분과 두려움, 동시에 평온함을 가지고서 말이다.

일찍이 카이지 형님의 손가락을 잘라먹은 효우도 회장이 말했다. 생명은 너무 존중해 주면 썩는다고. 그래서, 모두들 기회를 잡지 못하고 죽은 듯이 살아가는 거라고(카이지 완결됐나?) 역시 마루야마겐지 할배도 말했다. 어쩌면 불황기에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난 것은 하늘이 자신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인지도 모른다고(“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켄이 여행을 떠나고 자신을 단련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에게 실업과 빚이라는 장애물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진솔한 어조덕에 읽는 내내 저자에게 친밀감이 느껴졌다. 83년생이라는데 자신을 “Y세대”라고 소개한다. 그러고보니 내가 청춘이었을 때는 X세대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여행길을 배웅해주며 어깨라도 툭 쳐 주고 싶다. 이봐 켄, 어디 한번 잘해보라고. 난 좀 늦은 것 같지만 말이야.. 네가 거절했다는 그 일자리, 나는 약간 솔깃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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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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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은 희뿌연 안개 뒤에 누군가 서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안개 때문에 그 모습은 쉽게 보이지 않고, 두려움과 답답함을 불러일으킨다. 글로 밥벌이를 한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마 나와는 다른 유전자를 가진 인종아닐까. 소통불능의 외국인과 마주 대하고 있는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읽고 나면 소박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안개 너머의 누군가가 별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고 난 다음 '그래, 당신은 킹이니까'하고 지레 포기할 필요도 없다. 물론 문학을 전공했다거나 무슨 상을 수상했다거나 하는 애기가 없는데도, 이렇게 계속 글쓰기와 계속 엮이는 걸 보니 나와는 다른 운명인 것 같기는 하다. 저자에게 글쓰기는 자기를 재구성하는 수단이고, 외부와 자신의 경계를 잇는 접점인 동시에 자신의 외연을 넓혀나가는 통로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기발한 발상과 풍부한 표현력이 아니라 자신만의 사유와 언어이다. 글은 결국 쓴 사람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자신의 깜냥을 벗어나지 말라고 충고한다. 자신이 살아오고 사유한 만큼 글은 나오게 되어 있다. 아마 유일무이한 글이 있다면 그 저자의 삶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글쓰기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수단이며,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수단이다. 또한 글쓰기는 외부와의 감응을 통해 새로운 외부를 발견하게 하고, 자신과 외부의 경계를 재구축한다. 저자는 말미에 인터뷰하는 요령을 소개하며 여기에 방점을 찍는다.

  글쓰는 비법은 나오지 않지만(그런게 있기는 한 건가?) 여러번의 실전에서 나온 팁들이 군데군데 박혀있다. 내가 건진 것은 시외우기와 낭독하기다.

  읽고 나서 내가 작가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떠올렸다. 저자에 비하면 나는 타인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의 오만이다. 단지 자족적이기만 한다면 저자가 말하는 "삶의 경계를 흔드는 글쓰기"는 불가할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저자는 아직 감정이 풍부한 것 같다. 그건 아마 저자가 자신의 외부에 대해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런 외부에 대한 애정이 저자의 글쓰기를 풍성하게 해주었던 것 아닐까. 역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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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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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 흔한 레퍼토리지만 좀 다르다. 아이들은 낮은 점수를 맞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계층상승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할 하위계층 아이들이 공부 안하는 것을 더 긍정적으로 여긴다. 니트족도 특이하다. 사회에 적응할 수 없어 골방에 처박히는 게 아니다. 일하지 않은 것을 합리적이고,현명한 “선택”으로 여긴다.

우치다 타츠루가 제시하는 진단은 이렇다. 모든 것을 “등가교환”으로 평가하는 시장논리가 교육과 노동현장에 파고들어온 결과라고. 막스적인 애기를 하자면 갑과 을이 교환된다는 것은 갑과 을을 동일하게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척도가 있기 때문이다. 막스는 이것을 노동시간이라고 했는데 천원짜리 물건을 산다는 것은 천원이라는 무형의 척도가 천원이라는 종이와 물건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고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 때문에 돈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가치를 수량화하고 위계화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물의 개별성, 특이성은 무시되고 모든 가치는 평준화된다. 만약 갑과 을의 관계가 =이 아니라 >,< 상태가 된다면 누군가는 교환 자체를 포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시장”에 들어온 교육“소비자”는 선생들의 제시하는 교육"상품"에 어떻게 “값”을 매길까? 이 때 학생들이 제시하는 “화폐는” 수업을 집중해서 들을 때 발생하는 불쾌감이다. 아이들이 공부를 외면하는 것은 교육상품을 싸게 사기 위한 일종의 후려치기 전략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학력이 더 이상 입신양명의 보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고 있다. 투자가치가 낮은 상품에 신경 쓸 이유가 없는 현실을 하위계층의 아이들이 더 잘 인식하고 있고, 그런 현실인식이 역설적으로 그들을 더 하류지향적으로 만든다. 이 “소비자”들의 특징은 “자기완결성” 이다. 물건을 사기전과 사기 후의 주체는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배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주체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 배움이기 때문이다. 노동으로부터의 도피도 마찬가지다. 임금은 항상 기대치 혹은 등가관계보다 낮기 마련이고, 등가교환의 소비주체는 노동시장에서 항상 밑지는 장사를 하기 마련이다. 소비주체는 결국 “합리”적인 니트 상태로 돌입한다. 우치다 타츠루에게는 이것 역시 불합리하다. 노동에는 필연적으로 여분이 발생하고, 여분은 누군가에게 증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누군가로부터 증여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나올법한 애기들이 등장하는데 일단 무시하자. 오히려 하루키의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라는 말이 감각적으로 와 닿을지 모른다. 싫든 좋든 우리는 이 세상에 연결되어 있고, 내가 먹은 점심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과 연결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때문에 노동의 본질은 선택과 결정이 아니라 그것이 “의무”라는 것이다.

읽다 보면 약간 거부감이 생기는 대목. 이 주장을 좀 매도하자면 “니가 뭘 아니, 시키는 대로 해”하는 애기일 수 있다.(비슷한 예로 어른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가 있다) 근데 나만 해도 학창시절을 돌아보며 “왜 그 인간들 말에 순종했을까”하고 후회하지 않았던가. 우치다 타츠루가 말하는 “주체를 변화시키는 배움”은 진짜 스승이 있을 때 가능한 애기 아닐까?

잉여분을 타인에게 증여해야 한다는 애기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2년정도 백수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취직해야 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계기가 일본 배낭 여행을 다녀온 후였다. 직장인은 한 곳에 매여있는 노예라는 관점이 있는데(고미숙 선생님의 백수론같은 느낌?) 내가 여행에서 느낀 것은 그렇게 매여있는 사람들 덕분에 나의 일본 여행이 가능했다는 거다. 사람은 어쨌든 일하면서 사는구나 하고 그 때 느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키에르케고르의 질문에 로댕은 사람은 일하면서 산다고 답했다고 한다.허영만의 만화 “미스터큐”에 등장한다) 하지만, 나의 증여분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가져간다면 기분이 어떨까? 요새 내가 다시 하는 고민이다. 교육과 현재의 시스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통찰이 적어도 이 책에는 없는 것 아닐까.(우치다타츠루가 아마 몰라서 애기 안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우치다 타츠루의 애기는 결국 주체와 타인과의 관계짓기로 이어진다. 소비주체로 자신을 한정한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고립되며 자기결정,자기책임론에 함몰되어 리스크 헤지에도 실패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차라리 “서로 피해주자”라고 애기한다.(이 이야기는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으로 이어진다.) 

자, 그럼 감자줄기처럼 이어지는 다음 질문. 나,자아란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 규정되는가, 타인에 의해서 규정되는가? 자유란 무엇인가? 나와 타인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공동체란 과연 무엇일가? 등등... 답은 (아마도 한참 뒤의) 다음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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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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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다. 산부인과에서 진통을 시작한 임산부에게 의사가 말한다.“ㅇㅇ씨, 혼자만 애 낳는 거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모든 여자들이 하는 거니까 유난 떨지 말라는 애기다)  죽음과 소멸도 마찬가지 아닌가. 죽음도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것이고, 유난 떨 일이 아니다. 책에 나오는 표현대로 장례식은 흔해 빠졌고, “죽음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죽음은 당연히 최대의 행사이다. 그 행사는 상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근접체험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완벽한 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인가. 체험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무가 아니다.
  오래전에서 지하철로 통근하며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고통의 리스트를 작성한 적이 있다. 지금은 잊어버렸는데, 허리가 아픈 것, 직장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것 등등이 그 리스트의 상위권을 차지했다. 그런 작업을 최근에도 출근길에 머리를 굴려가며 계속했다. 어쩌면 일터가 나에게 고통을 상기시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어쩌면 “유레카”인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아무리 고통에 대해 상상한다하더라도 그것을 체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고통이 나를 덮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전까지는 고통을 아무리 상상해봤자, 그것은 실재가 아니고, 나는 나의 고통을 실감할 수 없다. 죽음도 그런 것 아닐까. 아니 모든 순간이 그런 것 아닐까. 사진을 찍고, 영상을 남기지만, 그 순간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닥쳐오기 전까지는 그것을 실감할 수 없고, 그것이 지나간 후에 그것들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매 순간은 장례를 치르며 죽어나간다... 그런 생각을 한 이후로 그 "뻘짓"을 그만두었다.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근본적으로 완벽하게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우리를 편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 체념일테고, 무기력이지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불안에서의 해방일 수도 있다. 주인공의 몸 속에는 몇 개의 스텐이 박혀 있는 걸까? 작가는 마치 독자를 짜증나게 하려는 듯이 그 설명을 꼬장꼬장하게 늘어놓았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무기력하다. 게다가 “각오한다고 각오가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책의 표현대로 “버티고 서서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어쩌면 모든 순간에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른다. 지구가 생긴 후 수만 번의 우연과, 수 만번의 필연이 , 그 수만번의 필연과 수만번의 우연이 우연적으로 뒤섞여, 지금의 순간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주는 무거움. 어쩌면 온전히 순간순간을 받아들이는 것을 삶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모른다.
  처음에는 책 제목이 불만이었다. 60대에 30대의 트로피와이프를 얻는 사람이 왜 <에브리맨>이라는 말인가. 그 역시 죽음을 앞두고 후회와 고통에 찬 노년을 보냈다는 점에서 <에브리맨>의 고통을 겪긴 했지만 말이다. <에브리맨> 에는 소멸과 죽음에 관련한 대부분의 코드가 들어가 있다. 무기력, 수치심,외로움,후회, 자책, 분노... 우리는 언젠가 소멸할 운명이며 우리가 탄생해야 했을 필연은(의미는) 없다는 정서가 지배적이다. 주인공은 그림그리기로 빈곳을 채워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한 때 그를 지배했던 육체적 욕망도 육체의 쇠퇴와 더불어 요원해지고 말았다. 그 텅 빈 곳을 채워주어야 할 인간관계를 주인공은 그 동안 하나씩 파괴해 왔다. 종교를 믿지 않는 주인공은 부모님의 묘지에서 묻혀있는 뼈를 상상하며 마음의 안식을 찾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야근 후 텅 빈 방안에 들어서던 금요일 저녁을 떠올리며 공감했다.).
  작가는 주인공의 고통을 통해 “뿌린대로 거둔다”라는 격언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젊은 시절 “신뢰”를 무시하고 욕망을 좇아다닌 것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일까? 적어도 주인공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세동기가 묻힌 자신의 가슴을 쳐댔다. 아니면 보험사 직원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은 게 실수인 걸까. 취미생활 조금, 일 조금, 노년의 빈 곳을 채워 줄 인간관계에 조금, 투자를 해서 리스크를 분산하는게 전략일텐데. 혹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주변을 배려하며”살아야 했을까.
  만약 이혼하지 않고 살았더라면 주인공의 노년은 달라졌을까. 알 수 없다. 노년의 후회에는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단골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가장 후회하는 세 번째 결혼 역시 나름의 가치가 있는 관계였는지 모른다. 에로틱한 연결 고리로 이어진 관계도 분명히 하나의 색깔과 표정이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말년을 소진했지만, 죽음과 노년, 삶에 대한 다른 관점도 분명히 존재하리라 나는 믿는다. 생뚱맞게 떠오른 만화의 대사(“헬로우 블랙잭” 이란 만화다.) “죽음이 패배라면 모든 인간은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가 자살했을 때, 혹은 스콧 니어링이 자살했을 때 그들은 패배감에 시달리며 죽어 갔을까. 정황을 아직 알지 못하지만, 다른 시각도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우리가 죽음에 대해 어떤 갑론을박을 늘어놓느냐와 상관없이 그것은 공평하고, 단호하게 모두를 찾아온다. 주인공의 상관인 클레런스처럼 상찬을 받는 죽음이든, 주인공처럼 불현 듯 현관문을 노크하는 죽음이든, 죽음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영화 “아무르”에서처럼  사랑까지 모두) 갑자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는 것처럼 우리를 찾아온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어이쿠 얼른,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지, 그래서 무언가를 이어가야지 혹은 연금저축에 들어야 겠군, 아니면. 교회를 다시 다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우리를 찾아온다. 가끔.  주인공처럼 서른 넷에 그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서른 넷에 그것을 체험할 수는 없다. 혹시 타인의 일생과 죽음을 엿보고 추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읽더라도 마찬가지다. 알 수 없다. 그것이 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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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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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형님께서 권해주신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형님께서도 제가 나잇값 못한다는 애기를 들으셨는지 이삼십대에 어울릴만한 인생론을 권해주셨더군요. 요새 멘토, 힐링 바람이라는데 이 분도 그런 멘토들 중에 하나인가 봅니다그려. 과연 약력을 보니 빠지지않는 학력에 한 분야에서 대가를 이룬게 치열한 경쟁을 앞둔 이들에게는 <서바이버>가 하는 말처럼 들릴 겁니다. 물론 아직 미욱한 저로서는 이 사람 말에 딱히 이의를 제기할 마음도 없고, 형님께서 보신대로 나잇값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이 사람 말을 충분히 새겨야 할 듯 싶습니다.
“현재를 살아라”,“제대로 보라”,“자기자신 내부의 점을 이어라”,“권위에 굴복하지 마라” 등등 ..우리가 익히 알고는 있지만 실천은 하지 못하는 덕목들을 다시 재미있게 자기 체험을 곁들여 가며 풀어놓았더군요. 이 분은 특히 <주체적인 삶>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인생.... 저자의 이 여덟 단어들을 결국 주체성라는 한 단어로 수렴됩니다. 아마 “. 자신의 내부에 기준점을 잡고”, “동의되지 않는 권위들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현재 자신의 삶을 제대로 보는” 삶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 역시 읽고 나면 이제 막 스타트라인에 선 마라톤 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전의가 느껴지게 하는 책입니다.
 하지만, 배웠다는 식자들이 흔히 비하하는 자기계발서와 이 책과의 차이점은 뭔가요? 이 저자가 취하는 관점이 진보적(?)이기 때문인가요? 저는 이제 A를 하면 B가 된다라는 식의 “인과론”을 믿지 않습니다. A는 A일 뿐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A를 한다면 A밖에 할 수 없거나  A 그 자체가 가치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나 다양한 결을 가지는 현실에서 A가 B를 불러온다는 확신은 저는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자신의 내부의 점을 잇고”,“현재를 주시하며”,“본질을 추구”하고서도 교수가 되지 못하고, 책도 쓰지 못한 수많은 강판근씨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누군가 주체적으로 살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은 주체적이지 않은 삶이 그에게 삶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그가 만약 굴종을 피할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린다면 그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누군가가 “서바이버 박웅현이 기회는 언젠가 온다고 했으니 그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 지금부터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라고 마음먹는 다면 그게 무슨 꼴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기회라는 게 뭡니까. 광고제 대상인가요? 광고제에서 대상을 받지 못해도 충만한 삶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또 하나 책을 읽으면서 못내 껄끄러웠던 것은 저자가 자신이 비판하려고 했던 외부의 권위를 다시 인용하는 것 같았다는 점입니다.“자존” 편에 인용된 강판근 교수가 교수가 되지 못했다면,이름난 책을 쓰지 못했다면 이 “자존”편에 인용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결국 권위를 비판하는 주장을 해 놓고, 자신의 주장의 설득력을 얻기 위해 , 자신이 비판하려 했던 외부의 권위를 다시 인용한 꼴 아닐까요. 사람들이 권위에 굴복하고 자존을 찾지 못하는 것은 주변의 환경이 그런 삶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좋은 말을 차고 넘치는데 왜 삶과 세상은 요지부동인지가 더 궁금합니다.
 저자의 원래 목적이 강의를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면, 좀 더 깊이 있게 내용을 전개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차라리 8개의 단어를 가지고 한 단어마다 한권의 책을 쓰는게 나을 듯 싶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애기 하지 않은 담에야 이 애기들이 사람들에게 체화되겠습니까. 읽고 나면 포만감은 들겠지만 당연히 바뀌는 것은 없겠지요.
 그나마 제가 책에서 위안을 느낀 대목은 저자가 40대를 “만혹”이라고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서른평 아파트에 아내와 딸이 있는 저자의 처지가 저와는 심히 다르지만 말입니다. 솔직히 이 대목이 가장 웃겼습니다. 많이 오바하다면 정희진씨가 말한 “말하는 자의 위치성” 이란게 이런거 비슷한거 아닐까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지금의 이,삼십대들은 이 대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입니다. 저 역시 그들의 삶은 귓등으로만 들었지만, 아마 이 대목에 가장 큰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고 지도로 삼을 수 있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좋은 책을 권해주시는 형님께 감사드립니다. 언제 찾아뵙겠습니다란 말로   맺고 싶지만 형님에게만큼은 빈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이란게 참 이상한 것이 마음은 형님을 뵙고 싶은데 ,이상하게 발은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신경 써 주시는 형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말 한마디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나 봅니다. 형님이 주신 편지로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밖은 이미 더위가 닥쳐왔지만 저는 아직 추운 겨울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다시 연락드리지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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